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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4/26 17:28:29
Name 해소
Subject [일반] 나에게 쓰는 편지










  나는 이제 십대의 문턱을 넘어 이십대가 되는 앞에 서있습니다.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써봅니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를 아마 당신은 기억할지도 몰라요. - 당신이란 호칭을 어색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린 같은 존재이지만, 그러면서도 당신이나 나나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조금은 달라졌기를 기대하고 있을거에요 -

  12월 말이었을까. 뉴스에서는 오늘밤, 별의 비가 내린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2년 전쯤인가 친구들과 계곡에 놀러갔다가, 물에 발을 담그고 누워서 별이 흔들리도록 목청껏 노래를 불렀더니 정말 별이 떨어졌지요. 그날이 페르세우스 유성우의 극대일 이었다던가요. 우린 그런 건 전혀 모르고 그곳에 갔고, 더군다나 그 날 낮에는 소나기가 내려 구름도 먼지도 쓸어갔으니 우린 정말 운이 좋은 셈이었지요.

  어쨌거나 그 일 이후로 나와 친구 녀석들은 유성우와 특별한 인연이 생긴 셈이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품고 자정이 넘어서 모인 녀석들은 정과 한이었어요. 우린 우선 정이 사는 동네로 갔습니다. 그곳엔 이제 완공 단계인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쪽은 길도 새로 난 것이었어요.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고 가로등도 그냥 잠들어 있었지요. 두꺼운 파카를 입고도 몸이 덜덜 떨리는 날씨인데 우린 그냥 아스팔트 위에 벌렁 누워버렸습니다. 하늘로 맺히는 우리 입김에 별은 촉촉하게 젖은 것처럼 점점 뚜렷이 다가왔습니다. 첫 유성을 누가 발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 땐 너나할 것 없이 와아, 저기! 하며 소리쳤을 테지요.

  시간은 듬성듬성 떠있던 구름마저 밀고 가버리고. 아파트 철골 사이로 구조물 사이로 가끔씩 별똥별이 꼬리를 끌었습니다. 정말 비처럼 우수수 내리는 게 아니라 어디 처마나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시간을 두고 또옥, 또옥 떨어졌어요. 우리는 냉골바닥에 몸을 떨면서 한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밤하늘, 그 시간의 여백을 메우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나눴던 수많은 대화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떠오르는 대로 적어볼게요. 우린 먼저 첫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그 화제를 꺼낸 건 정이었어요. 그 녀석은 한 여자를 삼 년째 좋아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여자는 저를 삼 년째 좋아하고 있었구요. 참 얄궂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어요. 사실 우리들 사이에서 그 사실을 쉬쉬하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정과 나도 다 알고 있었거든요. 녀석과 나는 가장 친한 친구이지만 첫사랑에 관해서는 악연이기도 합니다. 중학교 시절 제 여자 친구를 그 녀석이 좋아했고 저는 결국 헤어졌거든요. 유행가 가사에 자주 나오는 소재이기도 하지요, 사랑이냐 우정이냐. 그러나 정과 나는 오래 전부터, 그런 노랫말에는 전혀 맘이 동하지 않는다고 했었어요.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면 중요한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맘이며 그로 인한 관계라는 게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 예측할 수 있나요. 정이 말했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어느 쪽에서든 다른 존재가 끼어들게 마련이잖아. 나중에 무엇이 제일로 소중했는지 알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인거야. 그래요, 우리는 이제 겨우 이십년도 안 살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이 스쳐갔습니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다가 그냥 사라져버린 맘도 있고 가슴 깊숙한 곳을 스쳐지나간 사랑도 있었어요. 십대의 열정이란 건 사실 그 어수룩함에서 기인하고, 그 때문에 지나가버린 맘들 중에 잡으려고 손이라도 뻗었던 것들은 나중에 보면 아무 가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린 그걸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제 십대의 끝자락에서 가장 중요했고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존재가 누구였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곧 우리가 가게 될 대학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군요. 원서를 쓰겠다고 하루 종일 교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대학 이름과 점수 사이만 왔다 갔다 하고 나서 갈 곳을 결정하고, 이름도 적고 도장도 찍고 했었지요. 나는 원서를 다 작성하고 나서도 정체모를 계약서에 서명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으로 한동안 뚫어지게 붉은 도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냥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정하고 학과를 정했지요. 꿈이라는 게 갑자기 멀어진 느낌이었습니다. 글을 쓰고 싶었던 나는 경영학을 공부해야했고 음악이 하고 싶었던 정은 생물학 원서를 읽게 되었어요.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직 모르겠다던 한은 나와 마찬가지로 가장 무난한 경영학과를 택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먼 나중의 일이지만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한은 그 때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했어요. 정과 나는 그 즈음엔 그냥 무덤덤했습니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꼭 어릴 적에 대통령이니 세계정복이니 거창한 꿈을 이야기했다가 머리가 자라면서 금방 잊는 것처럼, 철없던 시절에 잠깐 만져본 뜬구름처럼 느껴졌습니다.

  나였는지, 아니면 친구 두 녀석 중 어느 한 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먼저 헤어지기 싫다고 말했어요. 별의 비는 서서히 멎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저 평범했습니다. 학교에 가고, 같이 공부하다가 때론 땡땡이도 치고, 점심도 거르고 운동을 하고, 주말엔 다 같이 몰려다녔고요. 평소와 다른 것들이라고 해봤자 가끔 몰래 모여 술을 마시거나 교장선생님께 졸라서 보충수업을 빼먹고 농구대회 연습을 했거나. 기껏해야 일상이라는 그림 위에 붓으로 몇 번 덧칠한 수준일 뿐이었는데. 다음 날이면 무채색의 날이 밝았고 우리는 언제나와 같은 하루를 보내며 별다른 설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무 일 없는 그런 보통날들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삶은 흔히 말하는 캠퍼스의 낭만일수도 있겠지만, 밤하늘에 별이 저렇게 떨어져도 주변의 모든 것들은 미동조차 없던데요. 이제 시작하는 우리는 적어도 서로의 자리는 지켜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두런두런 그 밤도 흘러가고 별에 젖은 우리들도 흘러가고… 어느새 12월이 지나 또 다른 해가 시작되면서 이십대라는 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왔습니다. 봄은 오래 전에 왔는데 화분에 꽃이 피고 나서야 아 정말 봄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자고 일어나면 간밤에 꾼 꿈을 생각하듯이 추억이라고 이름 붙인 기억 속의 장면과 장면, 그 사진들을 떠올릴 때에만 나는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그 날 밤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막 진정한 인생이 시작될 것 같았던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아파트가 숙연하게 내려다보는 아래서 우린 소원조차 빌지 않고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느 불 탄 자리에 홀로 서게 될 우리를 안쓰러워했어요. 별에 흠뻑 젖은 몸을 이끌며 헤어질 땐 괜스레 어디 멀리라도 가는 것처럼 손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우리가 본 별들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가 그날까지 꼬옥 쥐고 있던 별들은 작별의 손을 흔들면서 어디론가 흩어졌겠지요. 다만 시간이 흐르고, 눈 밑이나 손톱 밑이나 이마에 하나쯤 남아서 먼 훗날에나 찾아낼 것입니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이 편지는 당신이 받는 거예요. 당신은 우리의 별을 찾았나요?










===



고등학교 졸업하고 적었던 수필입니다(벌써 3년도 더 된 이야기...)
대학교 1학년 때 꿈도 의욕도 없이 어영부영 살아버리고,
군대에서도 고작 일기 쓰는 정도로 만족해버렸더니,
작가가 꿈이었던 놈치고는 몇 년간 이렇다할 완성작이 없네요.

너무 바쁜 요즈음,
옛날, 옛꿈 그리고 옛사람들이 그리워져서 오랜만에 꺼내본 수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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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flying
11/04/26 20:09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10대가 참 까마득하게 느껴지네요.
그 동안 만난 사람들도 참 많았고 스쳐간 사람도 많았는데
다들 잘 살고있는지 문득 궁금해질때가있습니다.
어느새 전 30대로 접어드는 길이라
언제부턴가 꿈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살아온것 같습니다.
다시 꿈꾸고 싶네요.
11/04/26 21:25
수정 아이콘
제목만 보고.. 신해철씨의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노래인줄 알았네요..
나래이션 형태의 랩이 참 인상적이었던 노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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