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은 불멸의 이순신 엔딩 "승리의 바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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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가 되었다!
장계를 옮겨 보겠습니다.
[삼가 적선을 무찌른 일을 아룁니다. 경상도 연해안의 적을 세 번 왕래하여 무찌른 뒤로 가덕에서 서쪽으로는 적의 그림자가 아주 끊어졋습니다. 그러나, 각도에 가득찼던 적들이 날마다 내려온다 하므로 그들이 도망해 갈 시기를 이용하여 수륙으로 한꺼번에 공격하려고 본도(전라도) 좌우도의 전선 74척과 협선 92척을 모두 철저하게 정비하여 지난 8월 1일 본영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한산도 대첩의 의의는 "가덕에서 서쪽으로는 적의 그림자가 아주 끊겼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대마도-부산포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가 아닌 모든 바다는 원래 그러했듯 조선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은 마침내 그렇게 염원하던 곳으로 향합니다. 부산포였죠.
이순신은 24일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배를 띄워 경상도로 향합니다. 이 때 전라수군의 병력이 판옥선 74척과 협선 92척, 저번 편에 언급했듯 전력 증강이 이뤄지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억기의 병력이 50척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전라우수영 전체의 병력이 동원된 거죠. 임란 이후 최강의 전력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때 원균의 병력이 3차 출동 때와 같다고 치면 판옥선만 80척에 달하는 병력이 만들어진 거죠.
25일 원균과 만난 후 당포 -> 거제도 -> 웅천으로 향합니다. 이전 출동에서 조금만 이동하는데도 하루에서 이틀 넘게 걸린 걸 생각하면 쾌속 진격인 셈이죠. 28일에 육지로 정찰을 보내니 와서 하는 말이 "고성, 진해, 창원 병영 등지에 머물고 있던 적들이 24, 25일 밤중에 모두 도망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수군의 출현은 이제 적들에게 재앙이었습니다.
29일, 동래 장림포에서 낙오된 적 30명이 대선4척, 소선 2척에 나눠 타고 도망치다가 따라잡혀서 육지로 도망칩니다. 배는 당연히 불태웠죠. 9월 1일에는 화준구미에서 대선 5척, 다대포 앞 바다에서 대선 8척, 서평포 앞 바다에서 대선 9척, 절영도(영도)에서 대선 2척을 만나서 모두 불태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적은 육지로 도망가서 쳐다볼 뿐이었죠. 이후 영도 근처를 모두 수색했으나 적이 없었고, 부산포 앞 바다에 500여 척이 포구에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대다수가 수송선이었겠습니다만, 지금까지 만난 적과는 차원이 다른 수였죠. 그래도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돌격.
이 때 적들은 배를 최대한 안 쪽에 묶어 둔 후 언덕 위에서 저항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조선인들까지 끌고 간 건지 순왜들이 도운 건지 모르겠지만 조선에서만 쓰는 편전, 총통들까지 동원했죠. 이제까지의 적들도 육지에서도 맞서 싸우기는 했지만 조총 수준이었고 아군이 들이닥치면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부산포 해전은 달랐죠. 그냥 배를 보호하면서 육지에서 싸운 겁니다. 이 때 아군의 진형은 길게 늘어진 장사진. 이전의 전투처럼 접근해서 불태우는 마무리는 하지 못 하고 그저 계속 화포만 쏘아 댄 듯 합니다.
적선이야 과녁 수준으로 그대로 있었겠지만, 육지의 적들은 위에서 쏘는 상황이었고 아군과도 그리 다르지 않은 화포를 쏘는 상황이었죠. 장계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편전을 쏘는 것은 우리 나라 사람인 것 같았으며, 혹 대철환을 쏘기도 하는데, 주발덩이 만한 것이 우리배에 많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여러 장수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돌진하면서 천ㆍ지자 총통에다 장군전ㆍ피령전ㆍ장편전ㆍ철환 등을 일제히 발사하며 하루 종일 교전함에 적의 기세는 크게 꺾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적선을 마구 부쉈고, 그렇게 깨뜨린 적선이 백여척. 세세한 이순신조차도 확실히 전과를 기록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육지의 적들이 많아 상륙은 하지 못 하고 후방에서 포위를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로 돌아오게 되죠.
[적들로 하여금 마음이 꺾여 가슴이 무너지고 머리를 움추리며 두려워서 떨게 하였는바, 비록 머리를 벤 것은 없으나 힘써 싸운 공로는 먼저번 보다 훨씬 더 하므로 전례를 참작하여 공로의 등급을 결정하고 별지에 기록하였습니다.]
해전에 대한 이순신의 평가였습니다.
일본은 일본대로 근거지인 부산포가 공격받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조선군은 조선군대로 적의 방침이 바뀐 것에 당황했습니다. 이후의 해전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사자 6명. 하지만 안타깝게도 녹도만호 정운이 그 중에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이를 슬퍼하며 이전에 전사했던 녹도 만호 이대원의 사당에 그 역시 올리게 해 달라고 조정에 청합니다.
2. 그 이후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륙병진은커녕 해전 자체를 하지 말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해안가에 왜성을 만들어서 요새함대 전략을 쓰게 되죠. 조선 수군이 없으면 어떻게든 돌아다니다가 만나면 곧바로 도망치고 숨어 버리는 것이었죠.
한편 9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조선 수군의 움직임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조선 수군 역시 공세의 한계에 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조정에 보낸 장계에서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일족에게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취소해 주기를 청하는 계본"이죠. 이 때 조정에서는 소모사를 보내 각 고을에서 병력을 뽑았는데 그냥 몇 명을 뽑아라고만 했고, 이 때문에 수군이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수군에 포함되는 병력 역시 육군으로 징발해 가고 의병들이 일어나면서 거기에 또 딸려 가 버린 거죠. 수군이 인기가 많았다 하나 그건 나중의 일이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수군은 천시받았습니다. 목을 베기가 힘들었고, 공을 세울 기회는 전혀 없는 격군으로 배정받으면 노만 젓다가 끝내야 했죠. 서양에서도 노를 젓는 격군은 죄수로 채워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거기다 유교 때문에 매장이 보편화된 조선 시대에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죠. 지금 해군도 평시에도 배를 탈 때면 하루에 네 끼를 먹는다고 하죠?
결국 이순신은 친족들에게 징발했고, 이 때문에 "대충 징발하지 마라"는 명령이 내려옵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악습 중 하나였지만,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죠. 이순신은 구구절절한 이유를 대면서 "대충 징발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됩니다. 군량이 부족하다고 장계를 올리면서도 곡식, 종이 등을 계속 조정에 지원해야 했죠. 장계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본영과 각 진포에 있는 화약은 기본 수량이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전선에 나누어 싣고 다섯 번이나 영남 해역(경상도)으로 출전하여 거의 다 써버렸습니다. 더구나, 본도 순찰사ㆍ방어사ㆍ소모사ㆍ소모관 및 여러 의병장과 경상도 순찰사 및 수사들의 청구도 번거로운 정도로 많아서 달리 쌓아둔 것이 매우 적습니다.]
조정의 지원은커녕 계속 물자를 지원하던 상황, 결국 조선 수군은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습니다.
우선 몇 차례 장계를 보내면서 섬에 피난민을 정착시키고 논밭을 개간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둔전 역시 포함되었죠. 또한 화약에 필요한 염초를 구하기 힘들었다가 군관 훈련 주부 이봉수가 묘안을 찾아내어 3개월동안 1000근을 끓여 냈다고 합니다. 보통 염초는 초가집 밑의 퇴비를 긁어서 끓여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러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양도 적죠. 영화 신기전에 살짝 묘사돼 있죠?
이봉수는 인분(-_-)과 짚들을 연구해서 인공 발효를 시켰다고 합니다. 얼마나 연구했을지 궁금하네요. 이 때 각 포구 앞에 철쇄를 설치해서 적선이 올 경우 막으려 했다고 하는데 이봉수는 도르래를 만들어서 쉽게 할 수 있게 했고 그 때문에 주목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조선 수군 승리의 숨겨진 공신이죠.
하지만 염초는 해결해도 유황이 부족해서 조정에 요청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조선 수군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 수군을 시켜 고기를 잡고(주로 청어) 염전을 만들어서 파는 등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또한 조총을 직접 만들어서 조정에 진상하기도 했고, 인재를 찾기 위해 수군에서 따로 무과를 보기도 했죠. 처절한 노력이었습니다. 이러면서 수군 전력 증강을 위한 시도를 계속합니다. 그 내역을 보면 전라우도(15관 12포) 90척, 전라좌도 5관 5포 60척, 경상우도 40척, 충청도 60척이었죠. 총 250척의 거대한 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육군에게 계속 병력을 뺏겼고, 연해안의 관포는 모두 수군에 전속시켜 달라거나 육군과 수군에서 교대로 병력을 징발하게 하지 말라는 요청을 계속 합니다. 94년까지 계속되는 걸 보면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하네요. 거기다 조정에서는 도움 하나 안 주면서 계속 "대충 징발하지 말라니까!"고 했고, 이순신은 계속 맞서서 "대충 징발하게 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일본군과의 싸움도 힘든 상황에서 이순신은 권율이 지휘하는 육군과도 맞서 싸워야 했죠. 배만 계속 만들면 뭐 하나요. 수군이 없는데-_-; 전라도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농사 지어야 될 장정들을 끌고 가니 상황이 좋을 수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전염병이 돌아 버립니다. 육군은 물론 일본군도 큰 피해를 입었고, 이순신은 "수군 중 절반이 죽었다"면서 의원을 보내 달라는 요청까지 하게 됩니다. 결국 구상했던 250척의 절반 수준밖에 만들지 못 했고, 그나마 병력이 없어 쓰지 못 하게 되었죠.
덤으로 원균은 아주 기가 살아서 난리를 쳐 대고 기대했던 충청 수군은 계속 오지 않는데다 충청도 소속 관리들이 말을 따르지 않아서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을 겁니다. 충청 수군을 기한 내에 오게 해 달라고 하는 장계도 계속 보이네요.
... 처절하죠?
3. 숨어버린 적
1) 웅포 해전
이런 상황에서 길고 참혹했던 임진년이 지나고 (위 내용은 93~94년 동안 계속 진행됐던 일들입니다) 93년 계사년이 밝았습니다. 드디어 명이 대군을 파병하고 이순신에게도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이 내려지죠. 이 때 동원한 병력이 89척, 이순신은 부산으로 가기에 앞서 웅포로 향합니다.
웅포는 적이 왜성을 쌓아서 방어하고 있었는데, 툭 튀어나온 안골포에 비해 내륙 깊숙히 들어가 있었습니다. 계속 유인해도 나오지 적은 나오지 않았죠. 오히려 좌우의 산에 진을 치고 공격할 뿐이었죠. 2월 8일에 모인 이래 10, 12, 18, 20일에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순찰사 김성일에게 수륙 합공을 건의했지만 "곽재우에게 창원을 먼저 공격한 다음에 웅천으로 가라고 지시했다"는 답이 와서 실망만 할 뿐이었죠. 결국 22일에 단독으로 의병과 승병, 수군을 상륙시켜 공격해서 나름 성과를 올렸지만 성을 깨뜨리는 데는 실패합니다. 28일과 3월 6일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서 비격진천뢰를 써 봤다고 하는군요.
온다는 명군은 오지 않고 육군은 자기들 일에 바빴으며, 장수들은 이제 왜군을 얕보고 마구 덤벼들다가 배 두척이 부딪혀 침몰할 뻔 했습니다. 거기다 멋대로 돌격하다가 썰물 때문에 갇혀서 적의 공격도 받았다는군요. 한편 아군의 진도 배가 위험할 때 경상우수영 배들이 돕지 않았고, 이게 원균의 명령이었다고 합니다. 또 하루는 경상우수영 배가 이상한 곳에 있길래 알아보니 어부의 목을 베려고 하고 있었다는군요. 2월 22일의 일이었는데, 그 날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늘의 통분함을 어찌 다 말하랴. 모두 경상우수(원균)의 탓이다.]
일본으로서도 웅포는 잃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가 당하면 다음은 다시 부산포였으니까요. 이순신으로서도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곳을 반드시 깨뜨려야 했구요. 결국 이순신은 점령을 포기한 채 물러나야 했습니다.
[왜군들이 다들 지쳐 누워서 쏘면 쏘는대로 그저 맞기만 한다]
김경진님은 장계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 전 못 찾겠군요. 이 때 웅포를 지키던 장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얼마나 처절하게 지켰는지 보입니다. 이후 적이 총퇴각 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이 웅포 인근을 맡게 됩니다.
2) 2차 당항포 해전
93년 7월 15일, 전라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합니다. 그 전인 5월에 다시 거제도로 향하여 위세를 떨쳤지만 이미 왜성은 웅포부터 거제도 영등포까지 쌓여 있었고, 계속 요새 함대 전략을 펴면서 공격을 포기해야 했죠. 거기다 6월 중순 800여척의 적선이 웅천, 제포, 안골포 등지로 온 걸 확인하면서 공격하다가 몰살당하는 걸 피하기 위해 견내량을 차단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꿉니다. 퇴각한 육군이 해안을 맡게 되면서 적 수군은 크게 증강되었고 여전히 오라는 명군은 오지 않는 상황 -_-; 이 때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의 지위를 받습니다. 마침내 수군의 총대장이 된 거죠. 8월 15일의 일이었습니다.
이후 견내량 북쪽에서 소규모의 신경전이 계속된 걸로 보입니다. 일본군은 당연히 조선 수군이 무서워서, 조선 수군 역시 곳곳에 틀어박힌 적이 너무 많기에 먼저 싸우는 걸 두려워 했죠. 이런 상황에서 94년 갑오년이 왔습니다. 1월에 조정에서는 다시 적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고성의 벽방산에 투입돼 있는 제한국이 "대선 10척, 중선 14척, 소선 7척이 영등포에서 나오다가 21척은 당항포로7척은 진해 오리량으로, 3척은 저도로 갔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이에 이순신은 4일 조방장 어영담에게 삼도 수군 30척을 적을 치게 했고, 20척은 견내량에 두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으며, 나머지는 이억기, 원균과 함께 영등포와 장문포 앞 바다에서 학익진을 형성해서 퇴로를 막았습니다. 어영담은 각 곳에서 10척을 불태우고 돌아왔고 5일에는 당항포로 들어가서 21척을 모두 불태우고 돌아오죠. 이 때 역시 육군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실패했고 적들은 모두육지로 도망갑니다. 이후 더 나아가려다가 병력도 부족하고 충청 수군도 오지 않아서 7일 한산도로 돌아가죠.
임진년의 해전보다 상황이 나아져서 조방장으로 유군을 따로 편성하는 등 나름 여유가 있었지만 역시 요새 함대 전략 때문에 타격만 줄 뿐 어떻게 하지 못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해전에서 적군은 호소카와 타다오키 휘하였다고 하는군요.
6일에 기효근이 적이 아군을 불렀다고 보고를 해서 만나 보니 적 8명과 명나라 사람 2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적을 무찌르지 말라"는 패문을 보냈는데, 이순신은 이에 답하면서 분해 했습니다.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면서 공격하긴 했지만 마음대로 적을 치지도 못 하는 상황이 얼마나 안타까웠을지 짐작할 만 하죠. 이 일을 조정에 따로 장계로 올립니다.
그리고 원균은 여기서 이 31척을 혼자 다 깨뜨렸다고 장계를 올립니다.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어 위에 있었는데도 이 정도니 이전에는 어땠을지 참 궁금하네요.
3) 장문포 해전
94년 9월 3일, 선조의 밀지가 도착합니다.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는 내용이었죠. 당시 휴전 협상으로 적을 공격할 수 없는 상황에 요새 함대 전략으로 육군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상황, 그저 어이 없을 뿐이었습니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나날을 보내지마는, 적이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있으니 경솔히 나아가 칠 수도 없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마침 흥양현감이 내가 혼자 앉아 있음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이야기하였다.]
그 날의 난중일기 내용입니다.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해 할 만 하죠.
하지만 까라면 까야죠. -_-; 선조는 이에 앞서 류성룡과 대화하면서 이순신을 까기도 합니다.
한편 윤두수는 명군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조선군 단독으로라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애초에 윤두수는 명으로 가는 것도 반대하고 명에게 기대지 말고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죠. 그 생각만큼은 좋습니다만... 이 양반이 원균의 친척이었죠 -_-
윤두수가 억지로 계획해서 일어난 것이 장문포 해전입니다. 나름 수륙합공으로 괜찮은 계획을 세웠지만, 세부적으로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듯 하네요. 권율은 "27일까지는 군사를 출동시켜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에 따라 26일 곽재우, 김덕령 등이 견내량에 도착합니다. 수군과 합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거였죠.
출동한 후 10월 4일까지 계속 장문포를 쳤습니다만,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 했습니다. 4일 곽재우와 김덕령의 병력이 공격하여 적을 혼란시키긴 했지만 역시 적을 무찌르는 데까지 이르진 못 했죠. 이런 과정에서 적이 사도 2호선에 불을 던져서 침몰할 뻔 했습니다. 해당 군관은 처벌받았죠.
6일에는 일본군이 패문을 땅에 꽂았는데 화친을 논하고 있으니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항포 해전처럼 명나라의 위세를 빌린 거죠. 결국 적이 처절하게 성만 지키면서 8일 작전은 종료됩니다. 이 일로 윤두수는 파직당하죠. (그 때 실록 기사 보면 윤두수 파직하라는 게 가득합니다 - -)
일본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적장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시마즈 요시히로. 네임드네요. 이들이 이순신을 격퇴했다고 돼 있습니다. 거의 무승부로 봐야 될 해전이지만 조선측에서도 패전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11월에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이 위에서 언급한 사도 전선이 결국 불타고 사후선 3척이 실종됐는데 보고되지 않았다는 장계를 올립니다. 각 장수들이 모두 숨겼으니 처벌하라는 내용이었는데, 선조는 "내가 직접 들은 일이 하나하나 다 맞다"고 하죠. 정말 해당 장수들이 (이순신도 포함해서) 숨긴 건지 모함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탄핵을 받습니다만 다행히 거부되죠. 아무튼 장계를 보내면서 "거제도에서의 패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의 정치 생명은 조금씩 위협 받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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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부터 다 몰아 넣어 버렸네요. 흐음... 참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칭찬은 못 해 줄 망정 뭐 그리 딴지 거는 게 저리 많은지...
그럼 다음 편은 거북선에 대해서 좀 얘기해 보도록 하죠. 마지막 편은 아무래도 정유재란과 연결시켜야 할 테니까요. 수군 장수들 얘기도 되도록 다뤄보려고 합니다. 권준, 어영담, 정운, 배흥립, 김완부터 경상우수영의 이운룡, 우치적 등등... 짧게나마 다뤄볼 인물들이니까요.
생각해보면 일본군에게 이순신은 인공 재해에 꿈에서도 보기 싫을 적이었겠지만 조선인들에게는 딱히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조의 밀지부터 그렇고 왜 부산포로 가서 적을 뿌리뽑지 않느냐는 비난이 많았다고 하네요. 거기다 병사들은 수군을 싫어해서 육군으로 갈 궁리만 하고 육군 장수들은 병력 뺏어갈 궁리만 하고... 차라리 적과 싸우는 게 더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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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분에게서 어떻게 깔 거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너무 FM군인이다, 깐깐하다, 완벽주의자다, 이런 평도 있겠지만...
(예전에 어떤 분이 댓글로 '너무 깐깐해서 평시에는 절대 성공 못 할 인물'이라고 평하셨더군요.)
그때 상황에서 깐깐하지 않았다면 조선 수군 자체가
칠천량 해전 전까지(-_-;;;) 그 정도로 유지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적 뿐만 아니라 아군에게서까지 태클이 들어오는 그 상황에서 말이죠.
충무공의 숨겨진 능력치 내정이 나오는군요. 무에서 유를 만들었지요. 어떻게 보면 선조가 벌벌 떠는게 이해가 됩니다. 그게 바로 군벌이거든요. 그나마 이때는 근거지라도 있었지 진짜 명량해전 뒤에는 12~3척 가지고 시작해서 맨손으로 스스로 다시 80여척의 함대를 재건해 냅니다. 전투능력 S급 짜리 장수가 내정능력도 S급이라니...
한동안 pgr을 잘 안오다가 뒤늦게 연재소식을 듣고 정독하다가 이제야 따라잡게 되었네요.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
저도 이순신장군 가장 존경해서 여러책을 소장하고 있는데 비봉출판사에서 나온 충무공 이순신전서(전4권)이게 가장 자세히 사료와 난중일기 위주로 잘 나와있는거 같더군요. 재미는 김경진님의 임진왜란(전8권)이나 이우혁님의 왜란종결자(전4권)이 재밌지만 말이죠.
근데 어떤 책을 봐도 느껴지는 감정은 그냥 숨이 막힐 정도의 답답함과 절박함입니다. 이순신장군은 매번 상황이 가장 최악이고 혼자 항상 고립되어있죠. 드라마같은 곳에선 류성룡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긴하지만 난중일기같은거 보면 딱히 서애가 큰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그냥 오직 혼자일뿐이더군요. 기껏해야 위에도 언급된 배흥립등과 술이나 마시며 한탄할뿐 누구하나 크게 도움을 못주더군요.
사실상 조선남부의 군정과 군령권을 쥐고 있던 체찰사 이원익이 그나마 이순신장군을 비호한편이긴 한데 이양반도 답답하게 구는 게 꽤 있어서 이순신장군이 일기에서 뒷담화로 까더군요.
본문얘기를 좀 하자면 윤두수가 저때까지만 해도 자주국방파였는데 저때 까이고 나서부턴 철저하게 친명으로 돌아서더군요. 아마 저때 일로 정치적입지가 좁아진후 조선군에 대한 원망으로 전향한게 아닌가 싶더군요. 병사또였던 박진이 고작 하급무관에게 쳐맞아 죽고 진린은 노량진에서 선조앞에서 조선벼슬아치를 두들겨 패는 그런 상황하에서 이순신장군은 명나라의 금전명령에 꼬장꼬장 개겼던건 의미있는 일인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기고만장한 명나라장수들이 별소리도 못하는것도 그렇고요.
역사 좋아해서 저도 여러곳에서 역사글도 올리고 토론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과 한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를 비교하면 참 감개무량합니다. 그당시에가 원균명장론과 이순신재평가론이 극에 달했던 시점이었는데 그게 좀 시대상황과 어울려 묘한 구석이 있었거든요.
당시 경제위기속에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심해지고 칭송분위기가 되면서 넷상에선 그 반발이 일어나곤 했었죠. 그러다가 박정희가 이순신장군을 흠모했다란것이 번져서 박정희에 의해 이순신은 띄워지고 원균은 그 반대급부로 나락으로 떨어졌다란 설이 소위 말하는 어줍잖은 진보주의자들사이에서 지지를 받곤했죠. 그들에겐 원균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사회에서 매장당한 민주투사처럼 보였고 이순신장군은 반공의 기틀하에 기득권과 야합한 세력처럼 느껴져서인지 맹렬하게 공격하곤 했습니다. 이들에게 사료를 들이대도 무조건 조작이고 죄다 일본탓 박정희 탓으로 몰고가며 이순신장군을 공격하고 옹호하면 박정희에게 쇄뇌된 놈이라고 난리치곤 했었는데 다행히 역사에 해박한 분들이나 김경진님같은 소설가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진압하여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걸 생각하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드네요. 박정희라는 교활하고 변화무쌍한 인간을 굉장히 싫어함에도 이순신장군 옹호하다가 박빠로 몰렸던걸 생각하면 참 감개무량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글 부탁드리겠습니다. 임진왜란이 아예 종결된 이후 명나라군이 철군하는 과정도 재미있는데 그것도 다뤄주실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