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으로 바라보면, 11층 복도쪽 내 방에서는 깜깜한 하늘아래 아파트 불빛만이 가득하다.
찬 바람이 방충망사이로 스며들어오는데, 때마침 방에서 어머니가 저녁 드신게 소화가 잘 안된다고 약을 사다달라고 하셨다.
투덜투덜 대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서, 재빨리 옷을 입고 맨발에 슬리퍼를 낑겨신은 뒤 어머니의 소화제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에서 내리고서야, 아.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올해의 첫눈. 나는 함박눈만 첫 눈 카운트에 넣는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이게 2010년 겨울의 첫 눈이다.
발 등위로 톡 톡 터지며 찌르르한 차가움이 싱그럽다. 하얗게 나오는 입김위에 눈꽃이 방울방울진다. 일요일 밤 늦게까지 하는 약국에서 약을 사 집에 들어오니, 그새 까만 머리가 물방울로 반짝거린다.
어머니께 약을 드리고 방에 들어와 핸드폰을 연다. 슬라이드나 폴더에 비해 터치폰이 싫은 이유 중 하나는, 화면을 여는 느낌이 밋밋하다는 것이다. 예전에 쓰던 폴더폰을 닫고 여는 것 처럼,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켰다-를 반복한다. 첫 눈이다. 첫 눈이 내린다는 것을 느꼈을 때에,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속이 불편하다는 어머니의 약도, 하얀 눈이 겨울밤 주황색 가로등 아래에서 춤추는 아름다움도 아니었다. 누나, 지금 밖에 눈 내려요.
화면을 수십번을 껐다 켰다 반복한 뒤에, 메세지함을 누른다. 그리고 다시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우기를 몇 번, 지워도 지워도 기억에 남을 11자리의 숫자가 익숙하다. 7과 3, 1과 9, 그리고 0. 간혹 모르는 사람의 번호안에 저 숫자가 몇개만 들어가 있어도 덜컹하고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번호. 겨우겨우 입력한 번호 아래로 메세지를 적어낸다.
"날씨가 많이 춥죠, 밖에는 눈이 많이 와요."
아니야.
"와! 눈 오는거 봤어요? 올해 첫눈인거 같은데?"
아니야.
"눈 온다.. 아직 퇴근 안했죠? 갈때 조심해서 들어가요."
아니야.
"눈 너무 예쁘다, 눈 내리는거 보고있나요?"
아니야..
30분이 넘게 핸드폰을 쥐고있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뒤로' 보낸다. 임시메세지에 저장되었습니다. 한숨을 푸욱 내쉬고 창 밖을 보니, 아직도 눈이 한참이다.
"만나고 싶어요. 지금 나랑 만나요. 내가 그리로 갈게요."
"만나면 어떡할 건데."
"그래도 그냥 만나요."
"만나도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어."
"상관없어요. 그냥 만나요."
"...정신차려."
머리속에서 마치 어릴 때 보던 만화영화에 나오는 것 처럼 두 사람이 뿅 하고 튀어나와 싸운다. 시끄럽게 웅웅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지만, 여전히 고민은 남아있다. 이럴 때는 보통 담배 한 대 물고 후욱-하며 회색 연기를 뿜어내야 장면이 사는데, 아쉽게도 난 담배를 피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어색한 손만 두 주머니에 쿡 찔러넣으니 찰랑거리며 차가운 동전이 반긴다.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면 가자, 뒷면이면.. 자자."
조용해 지는 머리속. 약간 떨리는 손가락으로 100원짜리를 허공에 튕긴다. 뱅글뱅글뱅글뱅글. 손바닥에 탁 하고 잡았지만, 차마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슬그머니 손을 떼어내며 눈을 꽈악 감았다. 앞면, 앞면, 앞면, 앞면! ...동전 던지기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손에는 100원이 표시 된 부분이 위로 올라와 있었지만, 100원이 앞면이겠거니 했다. 재빨리 이것저것 옷을 주워입고 거리로 나섰다. 마음이 급했다. 눈이 그치기전에, 달이 잊혀진 동네로 가야한다.
헉헉대며 단숨에 지하철까지 뛰었다.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가니, 때마침 전철이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11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어디론가 흘러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가쁜 숨을 내쉰다. 몇 정거장을 지나며 들썩이던 어깨가 사그러들었다. 한 껏 달려서 따뜻해진 몸이 좀 식자, 머리가 이내 차가워졌다. 나 지금 무슨짓을 하는거야? 이번 역은, 혜화. 혜화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그럼에도 차마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날 용기도 없지만 돌아갈 용기는 더 없었다. 4호선은 덜컹거리며 도봉산까지 날 데려가 주었고, 난 그곳에서 다시 1호선으로 갈아탔다. 다행히 아직 눈은 내리고 있었고, 누나가 사는 동네가 한정거장밖에 남지 않았음을 안 뒤에는 심장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처럼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역이었다. 누나가 사는 지역에 도착은 했지만, 이제 어떻게 하지. 전화를 해야할까? 아직 눈에 젖지 않은 벤치에 앉아서, 지하철이 네번쯤 지나간 뒤에야 누나의 번호를 다 눌렀다. 그리고 다시 두 개의 차가 지나간뒤에, 차가워진 손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태연한 척 근처에 친구가 산다고 할까? 아니면, 누나가 보고싶어서 왔다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사실 오늘 이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라도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까? 고작 30초정도의 뚜르르르 하고 울리는 신호음 동안에, 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지만, 30초가 1분이되고, 1분 15초즈음에 고운 여성의 목소리로, '소리샘으로 연결합니다.."가 들릴 때 쯤에는 이내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맞다.. 오늘 일요일이구나. 아직 학원에서 일하고 있겠구나.
벤치에 앉아 계속 누나를 기다려볼까 하다가, 이왕에 온 거 동네나 둘러보자는 생각에 출구로 나섰다. 거리를 두리번 두리번 돌아보며, 조금은 어둡고 조용한 동네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걸음을 옮기며 자꾸 누나가 생각났다. 이 보도블럭 위를 누나는 걸어가려나? 저 횡단보도를 지나려나. 아, 저기 보이는 빵집에서 가끔 빵을 사다 먹을지도 모르겠다. 저쪽 편의점의 알바생은 좀 잘생겼네. 누나가 저 편의점 이용하면 안되는데.. 같은 실없는 생각들에 웃음지으며 몇 없는 가로등과 간판사이를 누빈다. 그렇게 역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돌고 돌으니, 어느새 막차시간이 다 되어간다. 어깨에는 벌써 소복히 눈이 쌓였고, 귀는 새빨갛게 변해버린 듯 하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주머니속에서 꼭 쥔 채 터벅터벅 역으로 돌아가는 길, 찬 바람에 시린 얼굴 덕택에 정신이 좀 들었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한번 더 걸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만나고 싶은 마음에 한 달음에 달려왔건만, 실컷 찬 바람과 눈을 맞고서야 누나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란 것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래. 만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것이었다. 내가 곧 이 곳을 떠난다는 사실도, 그녀가 하염없이 바쁘다는 사실도, 내가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더미같다는 사실도, 그녀 역시 그녀가 짊어진 무거운 짐들이 가벼워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가 나를 거절했었다는 사실까지도. 나는 이곳에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게 아니었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불편함을 갖고있었다.
가로수 아래 벤치의 눈을 툭툭 털어내고 앉았다. 그리고는 누나와 나눴던 문자를 쭈욱 다시 돌려보았다. 수백건이 넘는 문자메세지를 보며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아, 이럴때도 있었구나. 아 이런말도 했었지. 괜시리 전에 지운 문자들이 아쉬워졌다. 한 줄 한 줄 누나와의 기억을 되살리며 웃음짓다가, 순간 그 웃음이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한다. 11월 18일 AM 00:07분. 그 뒤에 남겨진 몇 통의 문자들. 쓰라리다 못해 입 안이 꺼끌거리는 듯한 느낌에 황급히 핸드폰의 배터릴 뽑아버렸다.
그렇게 외투의 주머니에 핸드폰과 손을 꾸겨넣은 채, 지하철의 막차시간이 지나도록 거리를 누볐다. 같은 거리를 한 번, 두 번, 세 번. 누나가 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 때쯤의 시간까지, 난 정처없이 처음 만난 그 거리를 떠돌았다. 우연히 만나지는 않을까하는 기대와, 제발 마주치지 말아달라는 걱정이 뒤섞여 느린 걸음에 고개만 푹 숙인다. 다행인지 아닌지, 첫 눈이 내리는 날에 어울리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우리가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치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았다. 밝은 간판의 빵집도 불이 꺼지고, 잘 생긴 편의점의 알바생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서야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몸을 실었다.
첫 눈이 내렸다.
그녀와 꼭 첫 눈을 보고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내가 정말 많이 좋아했다는 것을 알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쿨하게 대답할 수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아무리 매몰차게 대한다 한들
그녀에게 수 많은 오해를 쌓고 쌓는다 한들
화가 날 지언정 미워지지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이 마음을 어떻게 조각내어 죽여나가야할지
새롭지 않음에도 막막하기 그지없다.
집에 들어와 핸드폰을 켜니, 한 통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전화했었어요? 일하고 있어서 못 받았어요."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까 하다가,
전화버튼을 잘못눌렀다는 바보같은 핑계를 대었다.
그리고는 목록을 눌러, 전체 선택을 한 뒤에, 삭제를 눌렀다.
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