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따뜻해해 지고, 저녁 무렵이면. 노을에 하늘이 맥주빛으로 물들어서 그런지, 요즘 술을 마시자는 친구들이 부쩍 늘었다. 주말에는 오히려 너무 바쁘기에 평일에 친구들을 만나는 경우가 더 많다. 어제가 그랬다. 자주가는 술집이지만, 술도 맛있고 안주도 언제나 처럼 맛있었다. 그렇게 술을 적당히 먹었을 때가 문제다. 다들 돌아가고 난 혼자서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길을걷고 있는데 청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포니테일을 한 젊은 여자분이 커다란 가방을 옆에 끼고 거리에 앉아있다. 왜 이시간에 거리에 앉아 있을까 란 생각보다 한눈에 이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날씬한것도 좋지만 좀 말랐군 이런 생각하면서 지켜보고 있는데 눈이 마주쳤다. 머리속에 갑자기 한 망상이 떠오른다.
"저기요 혹시 연락처주실수있나요??"
이건 너무 없어보인다.
"인상이 너무 좋으세요 혹시 도를?"
이건 대꾸도 안할거같다.
술 안먹으면 아무말도 못할 내가 여러가지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웃으면서 내가 좀 취하긴 했구나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며 발자국을 다시 집으로 옮기려는 순간 그 여자분이 말을 한다.
"저기요!"
이게 웬일인가. 술은 적당히 먹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헛것이 들린다.
그냥 지나쳐 가려고하다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키며 물어봤다.
"저요??"
"네!!"
갑자기 여자분의 표정이 밝아보인다.
"무슨일로?"
"아 저기 죄송한데 이거좀 들어만 주시면 제가 들고 갈께요."
그제서야 아까부터 끼고 있던 큰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여자 혼자 옮기기에는 무거워 보인다. 그래 들어다 주자. 이정도 선행은 사실 누구에게라도 베풀수 있다. 들어주려 하는데 갑자기 가방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 집에 안가..."
이게 뭔가. 가방이 말을 하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사람이다. 그것도 여자. 요가자세같은 웬 기묘한 자세로 펴져있어서 마치 가방처럼 보였던것 뿐이다. 아니면 알콜탓이든지. 술냄새를 풍기는 그 가방에게 난 다가가서 흔들었다.
"저기요 저기요. 이름이 뭐에요?"
술에 만취한 사람은 이름 부터 물어봐야 한다. 반복적으로 이름을 불렀을때 술이 그 순간만큼이라도 잠시 깬다.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단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잽싸게 부축했다. 저항하기 시작한다.
"놔요."
"하하 그냥 조용히 따라와지 착하죠.."
이건 웬 어린이 다루는 수법이란 말인가. 하지만 먹혀들었다. 조용히 저항을 포기하고 나에게 몸을 맡긴다. 만취한 사람은 정신상태가 어린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인가. 나는 아무래도 유괴에 소질이 있나보다. 도움을 요청한 여자분은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이제 자기가 끌고 가겠단다. 그런데 이 친구 버티는 힘이 장난아니라서 갸날픈 여자몸으로 끌고 갈수 없다.
"제가 집까지 모셔드릴께요.."
"아뇨 제친구는 제가 데리고 갈께요.."
혹시 내가 신경쓰여서 그런가 싶어서 떠봤다.
"혹시 집 몇층이에요?"
"5층요"
다행히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다가구 주택일것이다.
"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세상이 워낙 험하다 보니 혹시 낯선남자에게 집 알려지는게 신경쓰일수도 있어요. 만약 그래서 부담되시면요 제가 엘리베이터 까지만 데려다 드릴께요. 그건 괜찮죠? 제가 볼때 저기분께서는 못데리고 갈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밝은 목소리다.. 하긴 자기도 혼자 끌고 가려면 걱정 꽤나 됐겠지. 난 열심히 가방녀를 옮기고 그분은 계속 감사하다 감사하다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신호등을 건널때쯤 여자분이 입을 열었다.
"감사해서 그런데 연락처좀 주세요."
"하하 괜찮습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죠."
예의 바른 여자다. 고마움도 알고. 어느새 엘리베이터에 다 왔다. 엘리베이터에 가방녀를 살짝 기대 놓았다.
"감사합니다."
"뭘요."
"근데 빈말이 아니구요..진짜 제가 꼭 답례를 하고 싶은데 연락처좀 가르쳐 주세요. 진짜 꼭 답례할께요.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요."
정말 빈말이아니구나. 답례를 할줄 아는 사람이다. 답례를 잘 하는 사람치고 고마움을 아는 사람치고 괜찮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런 예의바른 괜찮은 여자에게 선행을 했다니 좀더 뿌듯하다. 선행은 답례를 받지 않아야 더욱 빛나는 법. 답례를 받으면 댓가성이 있어보여서 빛이 바랜다. 이런 괜찮은 분이라면 좀더 확실한 선행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들기 시작했다.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는걸 보여줘야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걸 보여줘야지.
"괜찮습니다.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받은걸로 할께요."
"그래도 수고 많으셨는데..."
"하하 친구분 맛있는 해장국 사드리시구요. 아니 얻어먹어야겠네 이건. 다음에 길에 술취한 분들있으면 저대신 좀 도와주세요."
"아 그럼 오늘 고맙습니다."
돌아서서 나가다가 살짝 뒤돌아봤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엘리베이터를 잡고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손을 흔들어 준다. 나도 살짝 손을 흔들어줬다. 여러모로 뿌듯한 하루다.
다음날 술이 깨고 난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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