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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23 00:31
조조의 서주 대학살은 여러모로 재밌는 논쟁거리죠.
조조의 가족을 잃은 애통함 vs 도덕성이 가르는데 사실 창천항로에서 유비가 말한 것과 가장 가깝다고 봅니다. '땅따먹기'
10/11/23 00:32
연의는 분명 나관중의 소설이지만 정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것..
역사를 어떻게 볼것인가는 참 어려운문제인것 같습니다..ㅠ
10/11/23 00:38
< 대놓고 큰 악행을 저지르는 쪽에게는 오히려 능력만 있다면 도덕성은 상관없다 라며 옹호를 받고 그런 악행을 막겠다고 나서는 쪽에게는 사소한 흠집이라도 있으면 그 흠집이 큰 악행보다도 훨씬 작은것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비판을 하며 깍아내리곤 합니다. >
공감 95% 입니다. 서주 대학살은 정말 나쁜 짓이긴 했습니다. 조조가 유비보다 더 잔혹한 사람인 것도 이론의 여지가 없지요. 하지만,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는 쪽이야 악행을 덮을만한 다른 공적을 쌓겠다는 것이고, 그 악행을 막겠다는 쪽이야 악행을 막는 것이 자기의 존재 가치인 것이니, 양쪽에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후자쪽에 이미 편향된 시각이겠죠. 조조에 대한 사람들의 호의는... '내가 조조처럼 살면 참 간지나겠는데?' 라는 식인 것이지, '조조같은 사람을 섬기고 싶다' 라는 식의 호의를 품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유비는 그야말로 '유비같은 사람을 섬기고 싶다' 라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인간형이지만, 21세기 식의, '내가 뭐가 못나서 남을 섬기나?' 라는 개념이 팽배한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사실 '위대한 주군' 이런 이야기 자체가 약간 구시대적인 것 같습니다. 조조가 유비보다 각광받는 현대의 유행은, 조조가 리더로써 더 훌륭해서가 아니라, 영웅을 부러워는 할 지언정 존경하지는 않는 시대의 성향에 따른 것 아닐까요?
10/11/23 00:42
본문과는 약간 별도로, 창천항로라는 만화는, 다른 쪽에서 바라보기라는 명제에 상당히 충실했고,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응? 이라는 의문을 품게했다는 면에서 그 존재가치가 확실하긴 합니다. 하지만 조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주변인물들을 병풍처리해버린 우를 범하여 자기 자신의 품격을 너무나도 낮춰버렸지요.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가, 서주 보복전 중에 일어났던 여포 내습은, 100% 순욱과 기타 군사들의 공으로 막아낸 것이 진실이죠. 하지만 만화에서의 순욱은 꼴사납게 말에서 떨어지기나 하다가 조조느님께 구원이나 받습니다. 그리고 조조느님께서 '넌 전투가 약하다' 라는 간지 폭발 대사를 남기는 것으로 에피소드가 끝나는데... 아.. 보다가 혈압 올라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10/11/23 00:37
다분히 소설적인 망상으로, 제갈량이 그 능력 및 인재 집단의 '조조'에 대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안티 조조였던 이유로 서주대학살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제갈량 본인이 서주 출신이라서...
그리고 정사의 '승자'는 사마염이기에, 사마씨를 제외한 부분은 상당히 중립적이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가 꽤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서주대학살은 조조 최대의 악행이자 아킬레스건임에 틀림없습니다.
10/11/23 00:40
그런데 정사 삼국지의 내용도 사실 정확하다 보기 어렵다는 소리도 있더군요.
괜히 배송지가 열심히 주를 단게 오히려 책 한권 분량이 나올 정도가 된게 아니라고 하구요. 사실 삼국시대에 있던 일들은 진짜 사실로 제대로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평화시기도 아니었고 전쟁이 연일 벌어지던 시기입니다. 그런 시기는 역사서가 제대로 남아있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조조의 서주대학살도 다른 면에서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적인 면이 아닌 다른 면에서 말이죠.
10/11/23 00:49
조조는 능력이라도 있지 요즘엔 능력도 없는 것들이 "능력만 있으면 도덕성은 중요하지 않다" 드립이나 쳐대니 문제죠. 꼼수 사기 불법 편법 뒤통수를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들 말입니다.
10/11/23 00:50
재미있는건 무고한 백성을 수십만씩 쳐죽인 조조는 이에 대해 별 욕을 안듣는데 도적놈이랑 편먹고 명사 몇명 박대하고 약탈 좀 한게다인 도겸은 혼자서 대악당, 막장하며 온갖 욕을 다먹더군요... 이해하기 힘든일이죠.
10/11/23 00:53
나이좀 먹고나니 조조가 그렇게 넘사벽처럼 느껴지고 부러울 수가 없었는데,
요새는 유비가 오히려 더 대단해 보입니다. 가진것 쥐뿔도 없는게 어떻게 거렁뱅이에서 황제까지 되나 싶었는데, 유비의 능력도 조조와는 엄청난 능력이 있는거죠. 돈이 많은것도 아니고, 빽이 있는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하느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것도 아니고... 라고 생각했는데 유비는 제갈량이나 조조와 다른의미에서 머리가 진짜 좋았던거 같네요.
10/11/23 01:02
뭐랄까요..
중국은 일단 사람죽이는게 그냥 일상다반사일정도로 빈번했고 또 그스케일이 워낙 커서 조조의 만행이 역사적으로 혼란기엔 의례 있는일 정도로 그냥 보아주는게 아닐까 하네요 일단 근대들어서 모택동만 해도 그의 국공내전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령에 증거인멸로 사라졌는지는 그냥 추측으로 집어댈 정도 이니까요 청나라의 양주대학살도 스케일면으론 정말 후덜덜하고 하도 많이 죽여대서 그냥 거기에 무감각해진게 아닌지
10/11/23 01:22
중국역사에 아주 조그마한 일부분이 이토록 오랜 세월동안 언급되고 인물이 시대에 따라 계속 재조명 되고 있다니
삼국지 연의란 소설의 힘은 정말 크네요.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없는게 아쉽네요. 사료도 부족한 것 같고;;
10/11/23 01:24
창천항로를 보면서 느낀점은
"조조가 했던 못된짓은 그냥 대충 넘어가는구나..." 랄까요. 근데 사실 창천항로의 해석도 별로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작품에서는 천하인... 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_-(이건 좀 허세라고 보이네요) 사실 저런시대에 세계의 머리가 되겠다는 사람은... 나쁜쪽으로나 좋은쪽으로나 사람... 으로 있기는 어려울테죠.
10/11/23 01:39
삼국지를 알면 알수록 느껴지는게 '유비사기설'같습니다.
애초에 삼국의 주인들인 조조, 손권은 유비와는 시작부터가 달랐죠. 조조야 십상시의 양자의 아들로 원래 집안인 하후씨도 꽤 괜찮은 집안으로 알고 있고 그당시 십상시는 부와 권력의 핵심층이었죠. 이건 시작부터 인재풀이 유비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조 집안이 원래부터 있는 집안이고 이름이 높으니 인재가 몰리는건 자연스런 현상인거죠. 손권도 아버지와 형이 어느정도 기반 닦아놓은걸 바탕으로 평생 우려먹었고요. 유비는 한왕실의 친척이라지만 이것도 거병하고 나서 꽤 시간이 흐른뒤에야 인정받기 시작했고 원래는 돗자리팔던 유협(양아치)정도였을까요. 운좋게 얻은 동생들이 그당시 넘버 1, 2급 무장이었지만 그 둘을 빼면 거병후 서주에 가기까지 꽤 긴시간동안 제대로 된 인물한명 못얻습니다. 서주에서도 조조랑 여포 사이에서 껴있다가 패주, 여포가 죽자 원소랑 조조사이에서 껴있다가 패주.... 그럼에도 백성들에 인망을 얻어 조조의 대군이 남하하는데 신야에서 백성들이 같이 따라 피난을 가고 결국 조조를 적벽에서 패주시켰으며 기세를 몰아 형주와 서천을 얻고 한중에선 조조와 대등하게 붙어서 승리까지 하는 인간승리에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앞선시대에 유방도 있고 결국 통일을 못하기 때문에 유비가 넘버원의 인물이라고 말하는건 무리가 따르지만 그당시 군웅들만 놓고 따져보면 유비가 잘났으면 잘났지 못한건 없는 인물이라 봅니다.
10/11/23 01:38
공명의 선택이라는 책을 보면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중에 하나죠.
서주 대학살.. 상당히 괜찮은 책인데 읽어본 분들이 많이 없어서 아쉽네요.
10/11/23 01:56
글쓴이 님은 상당한 대착각을 하고 계시는거 같은데요.
"비가 저지른 잘못이야 조조의악행에 비하면 세발의 피고" 라는 말 좀 수긍이 안가네요. 잘못은 조금만 저지르면 용납되고 크게 저지르면 용납이 안돼나 보죠? 다 거기서 거긴데요. 더군다나 삼국의 군웅들이라면 더더욱 말할 거 없이 거기서 거기일테구요. 기록에 안남을 뿐이지. 기껏해야.연의는 소설이고 정사는 승자의 주관대로 쓰여진 글자 덩어리일 뿐인데요. 사람들의 인식이 정말로 이상하게 박힌듯 합니다. 연의는 소설일 뿐인데 무슨 역사와 관련지어서 엮으려는 지 모르겠네요.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 부터 시작해서 터무니 없는 나관중도 몰랐던 삼국지 이야기까지. 소설은 소설일뿐. 마지막으로 조의 악행이 잘못됐다는건 인정하지만 유비나 조조나 다른 군웅들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보는데요. 숨겨지고 가려져왔을뿐.
10/11/23 01:54
매우 잘못 해석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법은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 중 가장 최악의 해석법이죠.
(193년)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해 십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 -무제기- 초 평 4년(193년) 조조는 도겸을 정벌하고 십여 개의 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팽성(彭城)에 이르러 크게 싸웠다. 도겸의 군대는 패하고 도주 하였는데 죽은 자가 수만에 이르니 사수(泗水)가 (막혀)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도겸은 물러나 담(서주 동해군 담현)현을 지켰다. 조조는 군량이 부족해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도겸전- 도겸전과 무제기의 내용을 보시면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지금 도겸전을 보니 도겸전의 내용은 도겸의 군대가 패하고 죽은 자가 수만에 이르니 사수가 막혀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다른 곳에는 엄연히 학살로 기록되어 있으니 그게 사실이다는 표현을 하시네요. 당장에 삼국지 내의 기록들도 죄다 제각각이고, 이후의 기록은 수십만을 죽인 것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즉 이 학살 자체도 의문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서를 보실 때 무조건 이게 맞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보시면 결국 다른 기록은 무시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엄연한 사실은 조조가 도겸을 공격했다는 것 하나 뿐입니다.
10/11/23 02:01
다만 뒤에 있는 2차 학살에 대해서는 무제기와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사실이라 볼 수 있으나
그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쪽에서 어느정도의 살육을 자행했는지에 대해서 판단하기가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쪽에서 약탈하는 것은 기본이었거든요. 약탈해서 초토화시키는 것을 가지고 학살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조조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10/11/23 08:04
그런데 사실 중국사의 황제뿐 아니라 삼국지의 인물들도 모두 현대적인 관점의 악행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죠.
이것보다도 그 정욱관련인가 이야기 해주실 분은 없나요? 거의 나오는 데가 없던데.
10/11/23 08:48
살육이고 학살임에는 분명한 일이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에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을 터이니 그리 한 것이죠.
그저 전략적인 이유가 가장 강할 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라는 명분은 그냥 허울 뿐이었겠죠. 별개로 본문은 그냥 '안티조조, 친유비'라는 인식이 너무 강하군요. 카리스마형 리더라고 해서 그 리더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 가라앉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조조의 능력은 그냥 인재관리와 국가라는 조직의 운영 측면에서 타산지석이 되는 것이지 도덕적 측면에서 본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로 현재 조조의 리더쉽을 이야기하는 면에서도 '조조의 도덕성'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상당히 드문 편입니다. 그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는 당시 삼국의 군웅들은 모두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고 할 바가 아니지요. 전략적인 면과 관리자의 면이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이 될 뿐이지 조조의 도덕성을 아예 무시하거나 묻어놓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 조조빠 만화라고 욕을 먹는 창천항로도 조조의 도덕적 측면에 대해서만큼은 그냥 '자기 멋대로 인생을 즐기는 인간'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조조를 왜, 어떤 면에서 칭송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을 하셨으면 합니다. 유비를 현 세태에서 비판하는 것이 크게 받아들여 지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유비가 연의라는 명작 소설에서 너무도 착한 명군주의 이미지를 썼기에 그 만큼 반작용이 크게 작용한 점이 큽니다. 반면에 조조는 천하의 악당에서 재평가가 이루어 지는 시점이고요. 재평가라는 것이 좀 과한 측면도 있지만 다만 상대적인 인식의 수준일 따름입니다.
10/11/23 09:36
사실 유비가 최고의 먼치킨이죠.
민주주의라는 현대사회도 그런데 2천년전 중국에서 [가문]과 [재력]과 [인맥]의 힘이란 게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원소? 수대간 3공을 지낸 집안의 후예에 인맥은 당대 최고였고, 인재풀이 흘러넘칠 정도죠. 조조? 승상을 지낸 가문에, 허주에서 둘째가면 서러울 부자에 인맥이야 원소 못지 않죠. 친인척인 하후, 조씨만 해도 후덜덜 유비는 관우, 장비 둘 데리고 시작한 건데, 시작점을 보저면 원소 조조와 비교는 민망한 수준이고, 여타 수십명의 군웅들에 비해서 나을게 하나도 없는데, 그걸 딛고 결국 톱3에 해당하는 대성공을 이뤘죠. 조조는 뭐, 심하게 말하면 이재용이 삼성회장된 거나, 정몽구가 현대회장된거랑 큰 차이 있나요? (이건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부러워할 일이겠지만, 흉내낼 일도 아니고, 롤모델로 삼을 수도 없다는 거죠.) 유비의 경우는 스티브잡스까지는 안될지 몰라도, 손정의 정도는 될 겁니다. 맨손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성공시킨 인물 정도? 그리고, 사회생활 해보고 조직관리란 걸 해보면, 결국 리더의 능력에는 덕성도 큰 역할을 합니다. 시스템이란건 조직의 모든 리더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거니까요. 리더가 덕성이 있으면 고대건 현대건 아랫사람들이 마음으로 따르고, 그런 조직은 당연히 성과도 좋습니다. 물론, 이런 덕성이란걸 조직에서 키워줄 수는 없으니 조직은 리더의 덕성 따위보다는 시스템을 강조하지만... 결론적으로 한 사람의 인간이 표상으로 삼을 정도의 인물로 볼때 현대사회에서도 유비가 조조보다 낫다고 봅니다.
10/11/23 10:02
조조빠로 서주학살은.. 좀 스킵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지요.
라이트한 삼국지빠라 자세하게 알지도 못하지만요. 어떤 이유에도 학살이라면 안 되는 일이겠지만 그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서 사람이 죽고 죽이는 일이 불가피한 일이고 전쟁을 하다보면 많은 백성들이 약탈당하고 죽는 건 불가피한 일이라 생각해 넘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유비와의 비교는 조조빠로 좀 발끈하게 되네요. 흐흐 유비가 굉장히 좋지 못한 상황에서 한 나라를 건국한 위대한 인물임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조조가 이재용에 비교될 정도의 인물은 아니죠. 원소에 비하면 조조도 상당히 낮은 곳에서 출발한 조조였고 또 관도대전 전에 실질적으로 No.1이었던 원소를 그것도 꽤 격차가 많이 나는 상황속에서 원소를 이긴 조조니까요. 실질적으로 중국은 이때 통일됐다고 보는 분들도 계시고 저도 관도 후에 중국은 조조가 지배했다고 보니까요. 촉과 위는 상당히 국력의 차이가 심했고 위는 굳이 무리해가며 촉을 토벌하거나 할 필요가 없었죠. 오히려 촉이 여러가지이유로 북벌을 해야만 했던 상황이고 실제로 제갈양이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론 실패했구요. 손건은.. 이 둘과 비교될 레벨의 인물이 아니라고 보구요. 개인적으로 삼국지 최고의 인물은 조조라고 보고 유비는 그 아래 레벨에 있다고 봅니다.
10/11/23 10:42
삼국지에 명언이 하나 있죠...약한 적 여럿이 강한 적 하나보다 무섭다고...조조야 말로 그 공식을 제대로 지킨 사람입니다.
동탁 토벌때 제후 연합 주최한거나 원술 토벌 시 여러 군웅들 화합, 원소 토벌 시에 모든 약한 세력 규합 및 적벽 때 후방 제후 설득... 이후에도 조조는 원호법 등을 통해 계속 제후 달래기 등...최후 1인자가 될때까지..되고 나서도 약한적에 유독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더욱 강력해보였을지도...
10/11/23 10:53
유비의 황족설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듯 하여 마지막 댓글을 달아봅니다.
----------------------------------------------------------------------------------------------- 유비가 황족이라고 자칭해서 얻을수 있는 이득은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중산정왕의 자손은 그 숫자가 너무나 많았고, 유비 정도의 방계 황족은 빗자루로 쓸어버릴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유비 이외에 그 시대에 군웅으로 이름을 날린 황족(유표, 유언, 유우)등은 유비보다 훨씬 격이 높아서 공(公)의 작위를 받은 황족이었으며, 진왕 유총처럼 왕(王)의 작위를 가진 황족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실력이 없으면 왕(王)의 작위를 가진 황족이라고 해도 도적떼에게 쫓겨 산속에서 객사하는 시대였다. 따라서 방계 황족 임을 자처해서 얻을수 있는 메리트는 0에 가깝다. 있다면 한을 잇는 정통성 정도일까? 그나마 방계 황족 타이틀이 유비에게 도움이 된 것은 한중왕을 자칭한 이후라고 봐야 할 것이다. (<a href=http://m.enha.kr/wiki/%EC%9C%A0%EB%B9%84) target=_blank>http://m.enha.kr/wiki/%EC%9C%A0%EB%B9%84)</a>
10/11/23 10:55
분명히 승자는 유비가 아닌 조조인데 (뭐 결과적으로 사마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삼국지에서 승자는 조조죠)
유비가 영웅이네요. 조조는 이미 미화가 될만큼 되었다는거죠. 저는 조조가 알려진 것 이상으로 나쁜놈이었을거라 봅니다. KARA님// 아무리 그래도 대의명분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중후반에는 모르겠지만 아주 초창기에는 관우와 장비가 대의 명분을 위해 유비를 받들고 사람들을 끌어모았을거라 봅니다. (후에 공명등이 받들기에도 아주 좋은 대의명분을 갖고 있죠) 유비가 황족이라는 것이 윗사람들에게는 굳이 메리트가 없을지 몰라도, 국민들에게는 아주 큰 메리트죠. 게다가, 황제까지 황숙으로 칭했으니 유비는 황족덕을 아주 많이 봤다고 봐야합니다. 조조하에 있을때 황숙으로 칭받지 못했다면, 조조가 이미 죽였을거라 봅니다. 다시 말해 황족이라는 위치가 실질적으로 가치가 없었을지 몰라도, 유비는 분명히 황족덕에 많은 것을 얻었죠.
10/11/23 11:09
진짜 암것도 없는데 스티브 잡스나 강덕수와 같이 된 사람을 비교하자면 공손찬입니다.
이 사람이 초기에 멸문당해 부각을 못받아서 그렇지 계속 있었다면 유비 역사도 없이 그냥 공손찬 밑에 멋진 책사였다로 끝이었을겁니다. 이 아지써가 원소한테 멸망 (삼성이 잘나가는 STX집어먹은거지요) 당해서 유비가 자립할 계기가 생긴겁니다. 현대인이 가장 닮아야할 사람은 오히려 공손찬일꺼 같은데요. 홀어머니, 가난한 집안, 보잘것 없는 벼슬...진짜 자기 힘만으로 북방의 제왕이 된 사람이지요. 이에 비하면 조조나 유비는 충분히 행복했던 사람입니다만 조조 집안이 좋다고 하기엔 원소, 양표, 채옹, 왕윤의 집안하고는 비교도 하기 힘든 아랫것이였지요. 하물며 지역 기반이라도 있는 마등 유언만도 못하다고 봅니다.
10/11/23 11:42
오늘날 조조가 악인이고, 유비가 성군이고, 제갈량은 문신이고, 관우는 무신이고, 조운과 장비가 충성스러움의 롤모델이 되는 이유에 대해 흥미로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선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위나라를 계승한 국가다 라는 점이 가장 큰데, 위의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를 이어 사마염대에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됩니다. 그리고 진나라 때부터 수백년동안 중국의 역사에 이민족이 들어와 왕국을 건설하는, 당시 중국인들에게는 정말 기가 막힐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한거죠. 흉노, 여진, 거란, 몽골 등 한(漢)족이 아닌 이민족에게 통치를 받는, 혹은 한족이 아닌 이민족들끼리 영토를 다투는 모습에 중국인들은 어디서부터 문제였는지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름대로 내린 답이 바로 한족의 시초였던 한나라를 멸망시킨 위나라와 조조였습니다. 그리고는 나아가 생각한 것이,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이 한나라를 계승했다면 어땠을까?' 였습니다. 한나라의 재건을 위해 평생을 바친 유비 삼형제와 그러한 유비의 뜻을 계승한 제갈량을 미화시키기 시작한 것이죠. 창천항로에 나오는 유비의 대사 중에 "유씨성은 유씨성! 그것을 내세우면 한 제국을 계승할 명분이 된다. 천자가 천자인 이유는 혈연일 뿐이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유비가 왕위에 오를 때 굳이 촉왕이라 하지 않고 한중왕(漢中王)이라 칭한 것도, 국호를 촉한(蜀漢)이라고 칭한 것도 유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한(漢) 이라는 단어가 의미했던 것은 단순히 국호가 아니었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쓰면 반역이고 역적이지만,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과 천자를 칭했기 때문에 당시의 여론으로서는 '유비가 한나라를 계승한다' 라고 해석될 수 있었을겁니다. 유비는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10/11/23 11:44
조조를 까는대 있어서 최강의 무기인 서주대학살이군요 이걸 실드칠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요
다른면에서 조조의 잔혹함을 까보자면 조조의 둔전제 역시 백성입장에선 까여야 마땅한 병크짓이죠 앞서 창천항로가 나와서 말인대 창천항로에선 둔전제가 가난한 백성에게 농토를 나눠줘서 수확의 일부를 걷고 나머지는 농민에게 주는것으로 되어있죠.어찌보면 참좋고 훌륭한일이긴한대 일단 기록을 보죠 "《삼국지 원환전》이 당시에 둔전을 개설하고 새로히 백성을 모집하니,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으며, 도망가는 자가 많았다." 자 이좋은 제도를 왜 당시 사람들은 피해서 도망을 쳤을까요 이유는 간단해요 둔전제는 강제참가였거든요....ㅜㅜ 유랑민들을 잡아다가 채워놨어요 유랑민이라고 해서 배고픈 기아상태 생각하실태지만 말그대로 전쟁터지니까 딴주로 이동해서 살던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거기에 조세는60% 이동의 자유도없으며 결혼도 나라에서 강제로 정해주고요 옷같은 기호품도 배급제였어요 한마디로 전쟁피해서 딴주로이동해서 평화롭게 농사짓고사는대 조조님하가 군사풀어 싹잡아들이고 강제노동착취........... 갑자기 노예로 신분급하락 그전까진 둔전제는 군둔밖에없었습니다 군대로 농사지었는대 조조입장에선 군대를 농사일에 투입할여력이있을리가 민간인 채워놓고 민둔제를 처음개시 덕분에 부국강병이되긴했다만 당하는입장에선................
10/11/23 11:51
제가 유비,제갈량빠가 된것은 삼국지를 좀더깊이 판후였죠 그전까진 조조빠 그런대 알면알수록 조조에대한 반감이 고개를 쳐들더군요
뭔사람을 이리죽여대는지 유비는 사서에 백성을 상대로 약탈을 한기록이없는 유일한군주고 장판파에서도 백성을 안버렸죠 조조야 여기서도 백성살육.........제갈량은 그렇게 북벌을했는대도 백성들한테 갈량느님 칭송이자자하고 국고는튼실 진이 오를친 자금도 촉에서나왔죠 그런대 백성을 착취도 안해서 제갈량이 죽자 백성들이 유선이 사당안세우니 스스로 사당세워고 승상님 하는거보면서 허참
10/11/23 12:57
서주대학살이 워낙 임팩트가 커서 그런지
관도대전 이후 조조가 원소군 포로 7~8만명을 생매장 시킨 건 (정사 무제기-배송지 주) 언급도 잘 안되더라구요.
10/11/23 13:48
아유 님// 매우 잘못 해석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법은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 중 가장 최악의 해석법이죠.
이정도 문장이면 비판이라 아니라 비난같은데요... 밑에 체벌관련 게시물에서도 그렇고 지나치게 남을 깍아내리는 표현을 자주 쓰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느쪽의 편도 아니고 논쟁글을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워듣는 방관자/시청자의 입장인데, 저번 글도 그렇고 이번 글도 그렇고 보면서 눈살이 찌푸려지네요. 의견이 오고가야 하는 법인데 아유님은 지나치게 '내말이맞다' 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유님 정도의 지식과 나이 정도면 충분히 완곡하게 표현이 가능하실 것 같은데 조금만 살살 얘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0/11/23 14:46
뭐 정사 안에서도 이래저래 상충되는 게 많고 ( 여기 관련된 가장 재밌는 떡밥은 역시 적벽대전이 아닐까 싶지만요 ) 생각해 볼 문제도 많죠.
도겸의 경우 연의에서 벗어나려다가 너무 멀리 가 버린 케이스겠죠. 착한 줄 알았던 놈이 알고 보니 나쁜 짓도 했더라. -> 어라 그래? 이 놈도 별 다를 바 없네 이런 식으로요. 착한 이미지였던 사람이 평범한 군웅이고 나쁜 짓 했다는 게 나오면 애초에 나쁜 놈 이미지였던 사람보다 더 까이기 마련이죠. 여기에 조조 재평가와 함께 더 까였을 거구요. -_-a 뭐 얘기하자니 길어지네요. 그리고 아유님은 그런 단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든 없든 일단 교차검증을 해서 한 건데 그에 대한 반박만 하면 될 것이지 최악의 해석이라니요. 확실한 게 그거 하나면 학계에서든 일반인이든 그렇게 딱 확실한 것만 연구하고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말까요? 조금이라도 깊이 들어가면 다른 사료나 주장이랑 부딪힐 수 밖에 없는 게 역사인데요? 그럴 거면 왜 학계에서 니가 맞니 내가 맞니 무슨 사관이니 무슨 사관이니 누구의 주장이니 어째서 그러니 이렇게 말이 많을까요? 논문이든 역사서든 '확실한 건 이거 하나니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로 하면 될 건데요. 아니 그러고도 '그게 확실한 지 니가 어떻게 아냐'고 반박이 얼마든지 가능한 게 역사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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