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45분 .
"으으으으으" 괴로운 신음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어젯밤 과음으로 쓰린 위장과 어지로움이 구토를 유발 했다.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다.
젖 먹던 힘을 짜내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젠장, 바닥이 차갑다.’
절약정신이 강한 내가 이제 막 겨울로 접어들 시점에 난방을 할 리가 없다.
차가운 바닥에 맞서 몸서리치는 열개의 발가락이 나를 잘 묘사해준다.
게다가 우리집은 아파트 1층이라 앞의 아파트에 가려 지금시간에 햇빛이 안 들어온다.
고통스럽다. 당시의 상황을 고통 이라는 단어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고(苦) : 쓰다, 괴롭다.
통(痛) : 아프다.
그렇다. 쓰리고 괴롭고 아픈 것이다.
‘휘청’
고난을 씹어 먹은 듯 한 표정으로 무릎과 허리를 적절히 굽히고,
한손으로 옆에 있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나머지 한손은 위장에 갖다 대었다.
어디선가 많이 보아 왔던 자세이다. 그렇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대뷔 15년차 배우가 연기한 완벽한 숙취형상(形象)을 내가 보여주고 있다.
나는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더구나 관심도 없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숙취형상을 취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것은 바로 본능인 것이다.
이 자세를 취함으로서 지친 육신을 조금이나마 위로 할 수 있었고,
한손으로 옆의 물건을 잡아 지탱함으로서 두발보행에 필요한 많은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분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살이가 세상에 나오고 하루 만에 짝짓기를 배우고 2세를 만든다.
세상에는 하루살이를 가르치기 위한 짝짓기 학원 같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하루살이는 단 몇시간 만에 완벽히 2세를 만들어낸다. 이것 또한 본능일 것이라...
어쨌든 어둡고 차가운 부엌으로, 숙취형상을 한 채 몸을 옮겨갔다.
나의 육체와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요가 아니라 필수였다. 본능에 의한 필수.
찬장의 위층 오른쪽 둘째 문을 열면 라면이 있다.
이것을 맛있게 끓여 파송송 계란탁! 냠냠 맛있게 끓여 먹었다.
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분명 라면은 좋은 음식이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육수와 얼큰함 그리고 적절한 짠맛은 온몸을 전율 시킨다.
게다가 800원이라는 가격으로 한 끼를 해결했다는 사실은 마음마저 따뜻해지고 저절로 미소를 띠게 한다.
분명 몸과 마음을 데워 줄 음식은 라면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어젯밤 오랜 시간 과음을 하면서 알콜을 분해하기위해 나의 소중한 간이 열심히 일을 했다.
어젯밤부터 시작해서 오늘아침 까지, 그리고 지금도 나의 간은 일을 하고 있다.
여기에 라면을 먹는다면 라면에 들어간 화학조미료를 간이 해독하기 위해 또 일을 해야 한다.
이는 마라톤을 마치고 돌아온 이봉주 선수에게 쌀 한가마니를 주고서는 뛰어서 집에 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시점의 나로서, 라면은 유독물질 인 것이다. 유독물질을 먹을 수는 없다.
혹자는 말한다. 술 먹고 다음날 숙취해소에 라면만한 것이 없다. 나는 여기에 이의를 달지 않겠다.
하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 하겠다.
어느 스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육체이니라.”
나의 마음에서 이미 라면은 유독물질이라 믿고 있다.
이런 마음으로 라면을 먹는다면, 진짜로 유독물질을 먹은듯한 효과가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물질을 섭취한다면 결과는 처참하다. 다음과 같이.....
문답무용 위장파괴!
kbs스페셜 중 ‘마음으로 병을 고친다.’ 를 본 기억이 난다.
한 의사가 대장암에 걸렸는데 좋은 마음을 가지고 요양을 하니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다. 다만, 나는 마음으로 병을 만들 뿐이다.
초등학교때 추석연휴가 끝나고 학교가기 싫은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온몸에 집중하여 나노급의 사소한 통증만이라도 감지했다면, 그때부터 암시를 시작한다.
“나는 아플것이다. 나는 아파진다. 점점...나는 아프다. 열이난다. 콜록콜록 기침이난다...으으으...”
이렇게 하면 정말로 몸이 아파져서 학교를 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튼, 나는 라면을 먹으면 안 되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밥솥을 열어 보니 밥이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하지만 15년된 냉장고는 붉은 조명과 함께 퀴퀴한 냄새만이 나의 코를 찌른다.
‘이런, 낭패다. 요리를 하자.’
평소 요리를 즐겨하고, 잘 하는 나 이기에 그러한 용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쓰러져 가는 육체를 최고의 음식으로 달래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몸이 썩을 것만 같았기에 요리를 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땅한 재료가 없다. 무엇을 만들까? 으으으....
찬장 하단에 밀가루? ok
냉장고 문, 봉지에 쌓여있는 마른멸치들? ok
냉장고 바닦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마르고 푸른 야채 찌꺼기?ok
파? 고추? ok ok
칼국수가 머릿속을 날카롭게 스쳐간다. 그렇다 칼국수다!
아주 신나게 표현했지만, 사실 이때는 이러한 생각의 절차를 거칠만한 에너지가 없었다.
0.1초의 찰나에 번뜩이는 생각의 조각일 뿐이다.
앞서 표현하지 않았던 것이 있는데,
어제 아침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뇌 속까지 알콜로 물들어있었고, 온통 흐린 세상과, 흐린 기억만이 존재 할뿐이다.
나는 지금, 당시 말초신경에 남아 있는 느낌의 조각을 필사적으로 긁어모아 글을 쓰고 있다.
어쨌든, 요리를 시작하자.
멸치와 물을 냄비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가루를 바가지에 풀어 물과 함께 반죽을 시작했다.
순백의 밀가루 아가씨와 차가운 물의 도시 남자가 서로 만나 흥얼흥얼 뭉치고 반죽이 참 잘되는 걸?
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과학을 모르는 자의 감정어린 표현일 뿐이다.
밀가루는 수분이 없는 상태에서 점성이 전혀 없는, 어린이의 숨결에도 날아가는 바람둥이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물은 어떤가. 극성분자로 이루어져 응집력을 가진다. 저희들끼리만 좋아하고 겉으로 내색 않는 새침때기 아가씨 아닌가!
이 둘이 쉽사리 만날 리가 없다.
나는 당시 생각보다 술이 좀 더 취해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오른손은 그들을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밀가루와 물을 죽이겠다.
푸덕푸덕.
무아지경.
어느새 시간을 보니 오전 10시이다.
멸치육수를 끓이기 시작한지 10분이 지났다 라는 의미이다.
“아차!”
나는 눈을 번뜩였다.
오늘은 일요일, 일요일 오전10시이다. 이것은 멸치육수를 끓이기 시작한지 10분이 지났다 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세상의 모든 한달 미만의 신혼부부가 아침 일을 치르는 시간대인 것이다!
일요일아침 늦잠 자는 새신랑과, 아침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행복감에 싸인 새댁!
햇살에 살며시 눈을 떠 보니 어느새 10시. 둘은 눈을 마주친다.
곧, 몸도 마주할 것이다.....
이는 하는님이 만드신 일요일과 한달 미만의 신혼부부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뭔가?
나의 오른손을 보았다. 거칠게 붙어 있는 밀가루와 물의 조각들. 내가 그대들을 이렇게 다루었나.
나는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회하고 참회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따뜻한 물에 손을 씻었다. 다시시작 하자.
손끝에서 따스하게 묻어나오는 열기로 그대 둘을 감싸 안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반죽이 끝나고, 반죽을 방망이로 곱게 편 다음. 밀가루를 바르고 정성껏 잘랐다.
그 다음, 칼국수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진행했다.
돌아가신 선친께서 전수하신 양념장 조리법으로 양념장 조리에 들어갔다.
조선간장과 진간장을 일대일 비율로 섞고, 마늘과 다진 고추, 다진 파를 곱게 넣는다.
고춧가루를 넣고, 깨소금을 손으로 으깨 넣고, 참기름으로 마무리를 한다.
됐다.
이제 면을 삶자.
면을 삶는 내내 냄비에서 나오는 김 때문에 시야가 너무 흐리다.
정신이 흐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증기가 몽환적으로 앞을 가리니 도저히 이때 상황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어느새 냄비와 양념장을 들고 마루에 앉아 먹는 내가 기억난다.
젓가락으로 면을 잡고 들어 올렸다.
포근하게 솟아오르는 김과 함께 아름다운 모습이 연출된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이때 상황을 묘사 할 수 없다. 빈 냄비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때 이후로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나는 글을 쓰기위해 말초신경에 남아있는 감정의 조각들을 모으려 애썼다.
‘아!!!’
이것은 충격이었다. 내가 칼국수를 먹으면서 느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베르베르는 오르가즘을 뇌가 느끼는 감정중 최고로 칭하며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오르가즘보다 격한 감정을 베르나르베르베르도 표현하지 못했다. 아니 표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존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필시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세상에 하나뿐인 감정일 것이다.
진하게 끓여낸 육수와 경건한 마음을 담은 아름다운 반죽, 선친의 숨결이 남아있는 양념장.
예쁘게 익은 투명한 면발과 밀가루가 살짝 풀어진 포근한 국물.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나의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녹이고 나를 천국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오르가즘보다 위대한 것일 게다.
나는 바로 그것을 느꼈던 것이다!
오로지 따뜻한 마음과 믿음으로 위대한 감정을 느꼈다!
온기가 채 식지 않은 빈 냄비가 나를 보고 미소짓고 있다.
어느새 102동에 가려진 햇살도 고개를 내밀고 웃는다.
눈이 부셔 찡그리는 순간...... 귓가에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린다.
“스님, 그렇다면 몸이란 무엇입니까?”
“몸 이란 눈에 보이는 마음이니라.”
*굿바이~스타2
https://pgr21.co.kr/zboard4/zboard.php?id=freedom&page=4&sn1=&divpage=5&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6146
를 적고 댓글반응이 괜찮아서 다른주제로 한번 올려 봅니다.
사실 웃기려고 쓴게 아닌데, 재밌다고 하셔서 놀랐습니다.크크
제 일상의 단편을 남기고 공유해보자는 의미에서 한번 더 올립니다.
이번 글은 소설가 흉내를 내어 별로 재미는 없군요.
산뜻한 표현도 안떠오르고...
어쨋든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