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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02 05:05
1. 장영실이 세종에 의해 발탁된 이유가 저지대의 물을 끌어올리는 장치를 만든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그걸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농업 기술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 쓰고 있을 때 박지원은 아 조선엔 수레가 없어 엉엉 했다는 것만 봐도 상업 인프라가 안습이었고 고종 떄까지 보부상 길드가 있었는데 전혀 좋은 경제상황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임란 전에 포천 현감을 지낸 이지함은 우리 고을은 아침 아니면 저녁에 죽을 환자라고 말했는데 경기도의 상황이 이랬습니다.
2. 사실 조선군의 주력함은 거북선이 아니라 명종 때 맹선을 대체한 판옥선이고, 왜군 배에 비하면 배틀크루저급 스펙이라 이것만 봐도 충분히 자랑할만 하다고 봅니다. 거북선은 그냥 아이콘격이죠. 3. 기축옥사 한 방에 죽은 사람만 1000명인데 5.18 민주화운동 떄 죽은 사람이 200명이 안됩니다. 당쟁의 결과 수많은 기획역모단 사건으로 서북 차별, 호남 차별, 영남 차별 등등 반역향이 아닌 곳을 찾는 게 더 쉬울 지경이었고, 김성일은 통신사로 다녀와서 당분간 침입은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한 인물이니 항전을 칭찬해줄 일은 아니고 그나마 정말 최소한의 식자노릇은 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죠. 청나라는 전통적으로 항복국에게 관대한 편이었고 (그렇다고 해도 명나라 항장을 받아들이기까지 한 조선에 대한 스탠스는 명나라 리즈시절보다도 관대했으니 의아하기까지 한 면이 있지만요) 명나라에 대한 조공무역도 세종 때 말을 바치는 것을 그만두고, 효종 이후에는 공녀도 바치지 않는 등 시대에 따라 적절한 조정이 있었을 뿐이지 조공 목록을 보고 있자면 우리 땅에서 저런 게 난다고? 싶은 것이 꽤나 있더군요.
10/11/02 08:20
아래 있는 글은 대체 무슨 말인제 포인트를 전혀 못잡았는데, 이 글은 그래도 좀 낫네요.
역사를 한쪽면만 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고 그렇기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고구려 역사에 대한 시각은 개인적으로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신라와 조선. 특히 조선은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 그것도 일본에 망한 왕조라 그런지 너무나 정 반대로 단점만 보려는 경향이 있지요. 개인적으로도 14~16세기 사이의 조선보다 백성들이 살기 좋은 국가를 당시 지구상에서 꼽는다? 생각보다 그다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조선의 과학이나 문화, 정치 시스템이 절대 부족하지도 않았구요. 또 사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굉장히 큰데, 사실 지금 대한민국도 미래의 역사관으로 보면 아마 미국에 사대를 하고 있다고 느낄겁니다. 또한 미국과 중국등의 눈치를 보며 외교를 해야하는 것이 약소국의 어쩔 수 없는 특징이지요. 그런데 명, 청이라는 상대적으로 지금의 미국보다 더 강력했을지 모를 중국과 국경을 접한 조선이 그들을 상대로 사대를 안 하는 게 국가적으로 정말 가능했을까...하는 궁금증이 들고요.
10/11/02 10:53
조공외교에 대해 약간 덧붙여보자면,
청의 주변국중에서 조공-책봉 관계를 벗어났던 국가는 없었죠. 정말 강력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 조공-책봉관계는 청의 기본적인 대외노선이죠. 청은 영국의 아머스트 사절단 등에게도 조공사절단이라 칭하고 그들이 가져온 짐과 수레에 모두 '조공품'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삼궤구구례를 강요할 정도로 오만하고 강한 나라였습니다(물론 다음의 매카트니 사절단은 그렇지 않았지만). 본문중에 중국이 대국의 자존심으로 퍼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고려이후로부터의 전통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좀 틀린 부분같습니다. 조-청관계를 예로 들어보자면, 당시 무조건적으로 청의 대외노선을 따라야했을 조선이 조공-책봉관계를 맺었고 과연 조공국인 조선에 대국인 명-청이 손해보는 하사품을 과연 증정했을까요? 조공품과 하사품을 비교해보면 조공품쪽이 훨씬 더 손해를 보는 쪽입니다. 그러니 이를 '전통'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10/11/02 11:30
500년간 다스린 것이 나라를 잘 이끈 것인지 차라리 멸망 후 새 왕조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나은지 알 수는 없지만
조선에 대한 불만은 대외관계가 너무 부족해서 고립되었다는 겁니다. 워낙 중국이 강대하고 지정학적 위치가 좋지 않기에 이해는 갑니다만 명에서 청으로 넘어간 다음부터는 중국도 세계관이 조금 바뀌었는데 조선은 계속 정체되어 있었죠. 고려시대까지야 세계사적으로도 변화가 크지 않았고 중국의 문화가 우수하니 상관없었겠지만(한족-북방민족에게만 침략받았다면) 조선시대에는 그냥 멍하니 있다가 새롭게 일본, 유럽 국가들에게 유린당한 느낌입니다. 일제시대정도의 지배도 이전엔 받지 않았고. 조선은 바로 전시대 국가다보니 자료도 많고 자료가 많으니 욕할꺼리도 많지만 그래도 조상인데 부족한 점을 비난하기보단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죠. 사실 한국은 섬나라나 다름없을정도로 고립되어있고 주위에 강국이 많은데 조선의 실책이 요즘에도 가끔 보입니다.
10/11/02 14:12
그런데 조선사람들은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조선말의 세수대야 같은 밥그릇은 그렇다 치더라도 중기인 임진왜란만 하더라도 일본군보다 3배는 더 많이 먹는다는 기록이 있지요. 조선 후기에는 단순히 많이 먹는다 수준이 아니라 고바야시처럼 먹고요. 변변한 반찬도 없이 쌀만 계속 먹죠. 조선 후기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나태함, 게으름, 불결, 착취, 가난 등과 어울려져 조선말의 미개함을 상징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10/11/02 14:24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군인, 상인, 사신, 밀정들의 눈에 조선땅은 별천지로 보였다고 합니다.
화폐가 전혀 통용되지 않는 자급자족 원시사회의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태고의 땅. 당시 명나라는 병사들에게 은자로 월급을 지급했는데, 도저히 월급을 사용할 수 없어서 명나라 군대가 약탈이라도 해야될 판. 때문에 요동의 명나라 상인들을 불러왔다고 하죠.
10/11/02 14:25
일본 사신단의 기록을 봐도 그렇지만 굳이 후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초중기만 해도,
중국은 물론 일본보다도 삶의 질이나 경제적은 수준은 뒤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10/11/02 14:59
정말 조선을 이 나라에서 엄청 무시하죠. 식민사학은 물론이고, 재야사학이라는 자들도 무시하니까요.
조선이 당쟁때문에 망했다는 것도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런 이야기를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너무나 당연시 쓰고 있다는 점이겠죠. 조선의 학문이 고착화 현상을 보인 시기는 숙종의 환국정치 이후죠. 지나치게 정파들을 다스리다보니 어쩔 수 없는 고착화가 되었죠. 탕평책도 실제적으로는 왕권 중심의 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에 상당히 폐쇄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구요. 그렇게 열심히 강조하던 정조의 탕평책도 결국엔 정조 측근 정치로 변질됨에 따라 약점으로 자리잡히게 되었고 정조의 대표적 측근인 김조순은 이후 순조의 장인이 되어서 폐쇄적인 세도정치를 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로 인해 노론 내부와 소론, 남인 등에서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게 북학사상입니다. 조선 말기를 이끄는 흥선대원군, 민씨일문 모두 북학사상의 중심인물인 박제가에게 수학한 추사 김정희의 문인들입니다. 즉 조선은 절대 노론때문에 망했다. 그런게 안 통하는게 흥선대원군이나 민씨일문 모두 유력 노론세력이고 역시 유력 노론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문인들이기 때문에 그런게 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론이 결국엔 조선 말기의 정계도 이끌게 되는데 어째서 조선이 그들에 의해 망했답니까? 조선은 일제의 침략야욕때문에 망한 것이지요. 우리 역사에서 정말 잘못된 것이 바로 유교망국론, 노론망국론이라고 봅니다.
10/11/02 18:47
조선 자체는 생각으로는 몇 백년을 앞서간
소위 간달프의 나라죠 근데 문제가 딱 하나 있었는데 너무너무너무 무시무시무시하게 가난했다는 거 아닌가요? 무악재에 주막이 딱 하나 있는데 마루에 2명도 못 앉고 맨땅에 밥을 먹었다고 하더라구요. 주모는 5명이 오면 음식 장만을 못 했다 하고 왕릉을 만드는데 장정들 도시락을 못 챙겨줘서 풀썩풀썩 쓰러지니깐 내놓은 대책이 점심을 먹여라. 그리고 이자쳐서 받아라 후덜덜덜덜덜 일은 일대로 하고 빚쟁이가 되어 도망치고... 세종대왕 때조차도 예산이 없어 덜덜거렸는데 꽉 막힌 사회는 이래서 안된다는 걸 조선이 몸소 보여줬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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