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 국제정치는 흔히 1648년 유럽의 30년 전쟁이 종결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면서부터라고 알려져있습니다. 30년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고, 서로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시켜준 전쟁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태동한 베스트팔렌 체제란, 대국이나 소국이나 모두 같은 '주권'을 소유하며, 모든 외교적 의전이 동등하며, 또 서로 상대방의 국내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체제를 의미합니다.
2. 이러한 체제가 국가간의 전쟁을 막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쓸데없는 명분을 제거하는 데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종교전쟁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못박은 체제였기 때문이죠. 이말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꿔말하면 상대방이 무슨 체제이든 간에, 국내적으로 무엇(가톨릭이든, 신교든)을 믿든지 간에 내 알 바 아니고, 우리는 오직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공인'한다라는 것입니다.
3. 나폴레옹은 이러한 체제를 전복하고 전유럽에 이른바 "민주주의"를 전파한다는 이념으로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일부 저서들은 이를 십자군과 같은 열정을 불러일으켰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결국 나폴레옹은 패배하고 유럽은 다시 종래의 관계로 복귀합니다. 이 과정을 매끈하게 이끈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 (키신저의 우상이기도 하죠) 였습니다.
4. 1815년. 메테르니히는 비엔나에서 '유럽협조체제'라는 것을 구축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유럽 주요 강대국들이 상시적으로 만나 주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장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19세기 버젼 G7이라고 이해하면 편합니다. 여기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 체제의 주인공으로 프랑스도 포함시켰다는 것. 프랑스가 비록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메테르니히는 프랑스를 모욕하지 않았고 오히려 같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파트너로 치켜세웠습니다.
요컨대 근대 국제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주권국가 간의 형식적 평등", "패전국도 쉽게 복귀할 수 있는 환경", "내정간섭 금지" 등입니다.
5. 북한문제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1) 북한의 주권국가로서의 형식적 평등을 인정해야 줘야 한다는 것
(2) 북한이 국제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
(3) 북한의 내정문제를 우리가 바꿀 수 없는데, 불필요하게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것
-물론 시민사회는 계속 문제제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국가적으로 이를 조건으로 내세울 필요는 없죠.
6.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과의 모든 협상이, 말 그대로 "협상"이지,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강제하는 '항복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패전국을 다루듯이 다루면 결코 안 되고, 비즈니스 상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죠. 최근 북한이 땡깡부리는 지점도 잘 보면, 동그라미 안에 북한이 아니라 그 어느나라를 갖다놓아도 똑같은 부분이 많습니다.
상대방의 행동을 분석할 때에 역지사지하는 것은 기본적인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기본적인 절차를 생략할 때가 많은 거 같습니다. 미국처럼 세계유일무이의 초강대국이면 모를까.... 우리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안 될 때가 많은 거 같아서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