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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17 10:21
그래서 자본주의 맹아론의 거두인 이태진 교수조차 포기하고 요즘 고종을 재조명하기 시작합니다(....)
논리구조도 문제고 근거도 없거든요.
13/10/17 10:26
저는 한낱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사실(fact)을 사실로서 직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에는 다양한 시각으로 다양한 해석을 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해석은 일단 사실을 명징하게 파악한 후에 2차적으로 해야 할 일이지요. 적어도 사실 그 자체에는 어떤 감정이나 주관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이 사실인가 아닌가? 에 대해서는 각종 자료를 통해 역사적인 사실을 판단하는 것 외에 답은 없습니다. 여기에 대고 민족적 감정이나 호불호 등의 주관적 감정이 개입되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가치판단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예컨대 엄밀한 연구를 통해 일제시대에 자본주의의 성장이 나타난 것이 확인되었다고 합시다.(요즘 연구 결과라지요?)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저는 애당초 그게 이해가 안 갑니다. 사실 자체를 부정할 게 아니라, 일단 사실은 사실로서 인정하고 그 이후에 해석이 들어가야 하는 게 맞는 거죠. '~~~는 사실이다. 다만 ~~~하기 때문에 ~~라는 문제와 한계가 있었다.'이런 식으로요.
13/10/17 10:34
글곰님의 의견에 동의하는게, 말씀해주신 내용이 원래 식근론의 취지가 사실의 발견 및 검증에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일제 치하에서 발달된 것을 경제사적인 연구를 통해 검증해냈다면 전 사실로 받아들여야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일제 치하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이 정착/발달되었다는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한들, 그게 꼭 '일제가 우리나라 역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다'는 주장과 합치하지는 않거든요(사실도 아니지만 한민족이 일제 치하에 경제적 측면에서 설사 혜택을 입었다 치더라도, 일제가 우리 사회에 남긴 폐해는 그걸 뛰어넘고도 남죠). 그러한 의미에서 적어도 이영훈 교수의 일제 강점기 시절의 경제사적 연구방법론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맹아론같은 대체역사소설 급의 가정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마르크스적 역사발전론에 왜 한국사를 끼워맞춰서 해석하는지도 의문이고, 한국의 서구식 근대화에 대한 자생적인 기원을 가지는 것의 의의조차 찾기가 어렵습니다. 시장경제 및 서구적 기술 발전이 조선 후기에 자주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근거가 전부 가정에 입각하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제대로 검증이 된 사학으로 볼 수 있을까 전 많은 의구심이 듭니다.
13/10/17 10:37
자본주의맹아론(이하 중국에선 제국주의 비판론)은 대체로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를 겪었던 국가에서 근대화론에 대항하기 위해 활발히 연구되던 내용이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논리자체가 말씀하신대로 식민지 근대화론과 전제조건이 동일해지는 치명적인 논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는 모르겠지만 중국쪽에선 오히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서양학자들의 데이터 제시에 좀 밀리는 감도 없지 않았구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맹아론을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평가하고 싶진 않는게, 그 덕분에 연구자체는 활발히 이루어져서 데이터는 참 많이 나왔습니다. 그 덕분에 요새 유의미한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구요. 딱 이정도의 평가가 자본주의 맹아론에게 가장 합당한 평가가 아닌가싶습니다.
13/10/17 11:08
제 이야기는 중국쪽 학계 연구결과긴 한데, 맹아론이 가진 최대 컴플렉스, 즉 '왜 우리 지역에선 맹아만 하고 자본주의가 꽃피지 않았느냐!'라는 전제자체가 점점 무의미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참 길어서 댓글로 다 달긴 어렵습니다만, 맹아론에 근거한 자료는 사실 서양도 동양도 다 관심있어서 계속 연구는 이루어지고, 책도 간간히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제가 보기에 가장 유의미한 변화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기준으로 삼았던 서양의 산업혁명 발생원인이 점점 흔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과거의 산업혁명 발생원인으로 거론되던 이론들이 별로 맞아떨어지지않고있습니다.) 이 덕분에 굳이 맹아의 흔적이라 주장할만한건 도처에 널리고 널렸지만 사실상 서양의 공업화라는 현상이 일어난 장소는 오직 영국뿐이었다라는 결론에 이르러 점점 영국의 산업혁명은 보편적 행위가 아닌 우연이 만들어낸 유일하고 예외 현상이라는 결과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이 변화한게 중요한 까닭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리에서 최대 무기가 '정체'라는 부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구조는 한 사회를 정체된 사회로 몰고가기 딱 좋기 때문인데, 사실 보편적 산물이 아니었다면 식민지 삶을 겪었던 동양이 정체되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식민지 생활덕분에 정체된 사회가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기보단, 식민지 과정을 거쳐 경제 체질이 자본주의로 '전환'됐다라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구체적인 자료를 원하시면 캘리포니아 학파쪽의 논문을 찾아보시는게 좋습니다. 이미 정리 및 번역된 내용도 dbpia에 올라와있으니깐요. 아니면 국내에 번역된 이백중씨(중국 학자) 책을 보셔도 좋을듯 싶습니다.
13/10/17 11:11
영국만 가능했던게 아마 인건비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영국 상품의 수요는 큰데 인건비가 비쌌기에 기계화가 필요했거든요.
특히 이게 심하게 일어났던 시대가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남자들은 전쟁터 나가고 전쟁 물품에 대한 수요가 컸는데 이시기 상당수 공장 기계화가 이루어지죠. 물론 실증적인 증거는 찾아 봐야 하겠지만요.
13/10/17 11:23
요정 칼괴기님이 언급하신 부분도 실제로 이야기가 나오고있습니다. 물론 실증적 자료로 제기됐다고 보긴 어렵고, 정확히는 원시공업화(농촌에서 비롯된 산업화의 뿌리)의 비판 주장으로 언급되는 경향이 더 크긴 합니다. 요 근래 산업화의 가장 주된 근거로 삼은건 석탄 덕분이었다라는 거긴 한데, 요새는 또 말이 너무 많고 저도 공부 안한지 좀 되서 정확히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3/10/17 11:42
비슷한 얘기를 제프리 삭스가 했던거 같네요. 여튼 말씀 감사합니다.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말씀하신 요지가 대충 감은 잡히는 것 같네요.
13/10/17 10:38
역사적인 관점에서 무엇이 우월하고 무엇이 우월하지 않은지를 따지는것보다 어리석은것도 많지 않죠.
애초에 주관이 지나치게 개입된것이래서 폐기되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지 않을까요.. 데이타를 기준으로 해석을 해야하는데, 해석을 먼저 하고 데이타를 수집하는 방식이니까요.
13/10/17 10:41
공과가 있으면 공과 과 각각에 대해 다른 관점을 취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죠. 본인이나 국가가 마음에 드는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고 다른 면은 깡그리 무시하는 거죠. 그냥 일본에 의해 경제구조가 선진화 되었다는 주장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싫으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 다 가져다 붙여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니 그 덕에 저렇게 자기모순에 빠지는 거라고 봅니다.
13/10/17 10:42
중국에서 먼저 나왔죠. 사실 세나라 다 논지가 비슷합니다. 우리는 (서양 니들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논리요. 시작이야 다 그렇듯 일본이구요
낙성대 학파로 대표되는 현재 한국의 식근론은 오히려 저 자맹론을 재반박하면서 나왔죠
13/10/17 10:46
자본주의 맹아론이 가진 문제점이 학계에서도 비판 받고 있고, 논의 중이기는 하지만 일본적인 학설이라는 점은 비약이 너무 심한듯하네요.
자본주의 맹아론류의 학설은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 국가에서 흔히 나타납니다. 중국, 한국도 마찬가지구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 나타난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의회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상징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전 시대에 비해 발전된 시대로 여겨진 근대가 서구 열강의 힘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었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근대로 나아갈수 없었다는 것은 제국주의 논리를 옹호하는 논리로 발전하기 쉽죠. 따라서 중국, 한국 등에서는 제국주의의 압력이 아니었더라도 우리 스스로 발전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것이 자본주의 맹아론입니다. 이 이론은 중국은 물론 우리 학계에서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죠. 앞서 말 했듯이 여기에서 말하는 근대 개념이 서구적 개념이고, 서구 사회도 근대라는 개념으로 설명되는 발달단계를 거친 국가는 소수여서 근대라는 개념을 필연적 발달단계로 보는 관점 자체가 비판 받고 있기도 합니다.
13/10/17 10:50
그 대응 과정 논리가 일본이 말한 근대화 논리 과정에서 그대로 주어만 변경되어서 쓰이니 그렇게 말한겁니다.
사실 이런 사례와 유사한게 오리엔탈리즘이죠. 오리엔탈리즘에 반발한 피지배국가들이 이 오리엔탈리즘의 논리, 상징 구조에 그대로 주어만 바꾸어서 안티 오리엔탈리즘 논리를 만들었으니 말이죠.
13/10/17 11:21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보다는, 그냥 두 이론 모두 격렬한 투쟁을 벌였지만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둘 다 동일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역사를 정체와 발전, 이 두개념으로 이해하는데서 온 촌극이라고 생각합니다.
13/10/17 10:49
이미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마냥 안 되는 이론 가지고 억지로 붙들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19세기 조선은 인구도 줄고 있었고, 시장은 해체되어 가고 있었으며, 실물경기는 침체되어 갔고, 복지의 일환으로서의, 그리고 국가 행정력의 증거로서의 환곡 제도도 박살나고 있었죠. 특히 경제사에서 근대화와 산업/공업 발전의 최소한의 요건으로 꼽는 게 농업 생산성의 향상인데 19세기의 조선에서는 농업 생산성도 하락하고 있었고요. 이런저런 민란이나 동학 농민 운동 같은 것이 괜히 일어난 게 아니란 거죠. 다시 말해 근대적 발전은 커녕 퇴행해가고 있던,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던 사회가 19세기 조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개항 이후에나 조선 경제의 성장이 보이게 되는데, 조선의 개항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내발론(맹아론)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워지죠.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자생적인 근대화 과정을 밟은 건 영국 밖에 없다는 점에서 if 이야기를 할 건덕지가 없다고 보고요. 저는 역사학에서 가정법이 무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역사적 사건과 인물과 대상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이승만이 왜 나쁜 놈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아닌 다른 인물이 한국의 정체를 끌고 나갔을 경우에 그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공산이 크다는 개연성이 있어야합니다. 만약 이승만 이상의 대안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승만 이외의 다른 인물들은 이승만보다도 더 개막장 테크를 밟았을 것이라고 합당하게 추측할 수 있다면,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물론 어디까지나 예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9세기 조선의 내재적 발전 가능성은 이런 가정법의 대상이 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죠.
13/10/17 11:03
자본주의나 근대화 개념 자체가 서양사상입니다. 그런 사상을 동양은 받아들인 것일 뿐이고, 이것을 직접적인 정치 개혁으로 실행했던 것이 일본(메이지유신)이었던 것이죠. 단순하게 우리나라 선조 중에 누군가가 서양처럼 자본주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자본주의는 한반도에서 스스로 성장했다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논리 비약이죠. 따라서 자본주의 맹아론은, 국사를 이용해서, 국가나 민족의 자존감 확립을 위해서였지, 실체는 물론 그 과정 또한 실증이나 고증과는 거리가 멀죠.
13/10/17 11:27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게 어떤 내용인가요?
외부의 영향없이 저절로 다른 나라만큼의 자본주의화가 저절로 진행되었을 거라는 건가요? 맹아론이란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인지를 모르겠더군요.
13/10/17 12:39
고등학교 때 배웠던 내용을 떠 올려보자면 일제의 식민사관 (타율성/사대/당파/정체성) 중 조선의 역사는 정체되어 있다는 정체성론에 대응하기 위해 나타난 논리로 (같은 이유로 고려는 중세로 규정하고 서양의 중세적인 면이 어느정도 있음을 이야기하고) 조선의 경우엔 근세로 규정하고 조선후기에는 근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여러가지 조짐들이 있었다라는 것으로 정체성론을 타파하고 있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측면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자본주의 맹아론입니다. 대강 조선후기에 영농법의 발달로 농업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광작이 가능해지면서(1인당 경작할 수 있는 땅의 넓이가 넓어짐) 부익부 빈익빈이 나타나 부농과 임노동자가 생겨났다는 것과 상업쪽으로는 대동법의 영향으로 공인이 등장해서 (모든 걸 쌀로 받았으니 반대로 쌀로 물건을 사야하는 상인이 생김) 물품을 구매하다보니 상업이 발달하고, 이렇게 물건 수요가 늘어나자 수공업도 발달해서 공장제 수공업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농업에서 밀려난 임노동자들이 상업, 공업의 노동력이 되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화폐도 발달하고, 부농이나 공인같이 부르주아 계급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등 자본주의 형태들이 곳곳에 보였다는게 자본주의 맹아론입니다.
즉, 일제가 너네 조선의 역사는 정체되어있어, 중세도 없고 스스로 근대사회로 제대로 이행이나 했겠냐 라고 하자 고려가 중세적인데? 조선도 근대는 아니지만 스스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는데? 라고 하는 거지요. 하지만 앞서 정치/경제/사회/문화 중 정치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세도정치로 퇴보하여 다른부분에서의 발달도 시망하게 만들어서 (삼정의 문란이라던가 삼정의 문란이라던가) 조선은 으앙 쥬금 ㅠㅠ 했다는게 대강의 이야기입니다. 뭐 제가 배울 때는 선생님이 식민사관에 대응하는 논리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셔서 (사실이라기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셨음) 식근론에 대해 크게 거부감은 없는데 그걸 일제강점을 긍정하는 논리로 쉽게 이어진다는 게 쩝..
13/10/17 12:51
맹아론을 부정한다는 건 그런 맹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실제로 맹아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게 얼마나 빨리, 얼마나 순조롭게 자본주의로 이행될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맹아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긴 어렵지 싶은데.
13/10/17 13:22
위에서도 한 이야기인데, 19세기 조선 사회는 경제적/산업적으로 볼 때 퇴보하고 있었습니다. 농업 생산력은 하락했고, 전국단위로 통합되어 가는 듯 했던 시장은 지역별로 해체되었으며, 실물경제는 침체되었고, 치안력과 행정력은 땅에 떨어졌고, 임금이 떨어졌습니다. 민란이 잦아졌던 것도 이런 맥락이죠. 맹아를 이야기하려면 농업 생산력도 증가하고 장시도 활성화되고 임노동자의 임금 수준도 올라가고 자본도 축적되고 금융업도 발달해야하는데, 그런 것들이 전혀 발견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
이로 미루어볼 때 조선사회가 외부와 단절된 상태로 이어졌다면 자본주의로 이행했을 가능성보다는 장기적 침체 국면이 유지되었을 공산이 크며, 자칫 왕조가 패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당장 동학 농민 운동만 해도 그렇고..
13/10/17 13:45
의외로 그것도 아닙니다. 19세기 조선이 그 전보다 퇴보한 건 붕당 정치 시스템이 깨졌다는 것 정도지 그외 대부분은 영정조때와 비교해 부족함이 없거나 오히려 나은 부분도 많습니다.
세도기가 시작했으니 모든 건 퇴보하고 암흑 시대가 되는 느낌이지만 백성들의 삶이 진짜 고단해진 건 오히려 서구세력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부터죠. 그리고 민란이 잦았다는 것도 조심히 접근해야하는 게 어떤 목적으로 봉기를 했느냐를 더 중요히 봐야합니다. 이게 먹고 살기 힘들어 일어난 건지 그냥 개인이나 단체의 욕심으로 일어난 건지 기존의 상황이 부당하다는 걸 인지하고 더 나아지는 상황을 위해 일어난 건지... 그냥 민란이 일어났다고 당대 상황이 최악이었구나 하기엔 대한민국 7월 항쟁은 한국 최고 호황기에 일어난 민중운동이었죠.
13/10/17 14:06
말씀대로 그냥 민란이 일어났다고 당대 상황이 최악인 건 아니죠. 그런데 수십 년의 장기적인 국면을 놓고 볼 때 인구가 줄어들고, 농업 생산력이 하락하고, 시장이 해체되고 있으며, 임노동자의 출현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의, 다시 말해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국가의 통제력이 하락하는 상황에서의 민란은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죠. 제가 <이런 맥락>이라는 문구를 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요.
13/10/17 14:51
인구가 줄고 생산성이 하락하고 있다는 건 19세기 위기론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거 정설 아닙니다. 19세기 위기론이 과장되었다거나 없다고 하는 학자들도 많고(사회제도적 측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런 것 때문에 위기가 있었다- 인데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제법 많단 말이죠.), 반박도 많이 되고 있죠. 가장 근본적인 부분부터 논란이 많은 것을 사실인양 주장하는 건 안될 말입니다. 그리고 인구감소와 생산성 하락이 심각하게 과장된 것이라면 '경제 상황의 약화와 통제력의 하락'도 기초가 무너지는 셈이고, 민란이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다는 말도 사라지게 되죠. 아래의 맹아론 반박과 마찬가지로 오리지날, 뿌리, 기초라 할 부분부터 논쟁의 여지가 많다는 말입니다.
13/10/17 15:29
혹시 그와 관련된 레퍼런스를 제시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박희진/차명수「조선후기와 일제시대의 인구변동」(2003)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cdb91df60ca3e43affe0bdc3ef48d419
과 차명수 (2006)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제13장 경제성장∙소득분배∙구조변화 http://yu.ac.kr/~mscha/papers/kgrowth.pdf 이영훈/박이택(2002) 18~19세기 米穀市場의 統合과 分裂 : 靈巖의 米價變動에 대한 生産衝擊의 影響分析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ea25efedd394d194ffe0bdc3ef48d419 등을 참고했습니다. 찾아본 지가 좀 됩니다만 그 사이 맹아론이나 내발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줄어들어서 딱히 반론이 나왔을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13/10/17 15:47
배항섭,「19세기 위기론과 조선사회 - 19세기를 바라보는 시각」,『역사비평』101(역사비평사, 2012).
허수열 저,『일제초기 조선의 농업』(한길사, 2011)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00953 손병규 저,『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역사비평사, 2008)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593808 그리고, 19세기 위기론의 반대향을 맹아론이나 내발론으로 잡고 계신 듯하나, 그건 상당히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보여집니다. 저 저서 및 논문들에서 맹아론이나 내발론으로 보아야 할 것까지는 잡지 못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13/10/17 13:36
맹아론 자체가 사실이라기보다 해석에 가까워서요. 반대로 식근론은 사실에 가깝죠. 어쨌거나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근대화된 건 맞으니까요.
맹아가 존재한다 라기보다 맹아론식으로 그 당시의 현상을 바라보면 이러이러한 것은 맹아라 할 수 있다라서. 더불어 있다한들 스스로 근대사회로 이행해 나갔을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라서.. 맹아론은 결국 식민사관-정체성론을 타파하기 위함이라서 내재적 발전의 근거로 제시하거든요. 맹아가 있다는 것만으로 정체성론을 타파하긴 힘들죠. 그를 통해 스스로 근대사회로 이행이 가능했다 까지가 하고 싶은 주장이니까요. 그리고 맹아 자체에 대한 비판은 저도 잘 몰라서 엔하위키를 참조할게요. 양반의 사역농장해체 → 소농사회진전 → 소농의 빈농/부농 양극분해 이 이론은 마르크스의 영국농민층 삼분화설에 기초하여 그 현상을 조선후기 농업변동에 대입을 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용섭이 말하는 경영형부농은 영국의 요먼(Yeoman)농가에서 착안한 개념이다. 즉, 선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사회와 같은 논업변동이 조선후기에도 있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정체성론에 대한 반박으로 제기되었는데, 여기서는 조선사회는 정체하지 않았고 도리어 선발산업국가인 영국과 같은 궤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1980년대 초 분재기나 양안 등을 통해 농업경작현황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이영훈의 연구성과에 의해서 통렬히 반박당하게 된다. 즉, 소농사회의 진전은 있었으나, 농민층의 부농/빈농의 양극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영훈은 박사학위 논문으로 그 의견을 피력한 다음 통감부 시기에 작성된 민적통계표 등을 근거로 20세기 초에도 상업, 수공업 및 광업 인구는 실질적으로 크게 높지 않았(1 ~ 2%)으며, 광작으로 탄생한 대농장주나 노임을 받고 일하는 임노동자와 같은, 기존 설의 근거가 되는 근대적인 요소가 실재로는 부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영형부농의 등장으로 인한 양극분해현상이 동시대 프랑스, 더 나아가 일본, 중국을 비롯한 전세계 농업변동양상에서 극히 드문 사례라는 점, 그리고 경영형부농이 대두하였던 영국사회조차 1870년대 이후로 소농사회화가 진전된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더불어 자본주의 맹아론의 원래 모델인 영국에서 양극분해현상으로 인하여 대량의 산업예비군이 축적되지 않았다는 신경제사학의 새로운 연구성과가 제출됨에 따라 자본주의 맹아론 및 경영형부농론의 토대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있다. 한 마디로 오리지널이 흔들린다는 뜻이다. http://mirror.enha.kr/wiki/%EC%9E%90%EB%B3%B8%EC%A3%BC%EC%9D%98%20%EB%A7%B9%EC%95%84%EB%A1%A0 요건 해당 링크입니다.
13/10/17 13:44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의 저역시도 자본주의 맹아론은 힘을 잃었다고생각합니다. 그러나..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것은 인정하기가어렵내요..최근 허수열교수와 이영훈교수의 논쟁을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저는 식근론자들이 방법부터 틀렸다고봅니다.
13/10/17 15:21
1. 자본주의 맹아론의 전제는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3단계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사회경제사 분야-조선 후기에 그러한 '근대'의 맹아가 나타났다는 것이죠. 결국 이것을 부정하는 논리는 마르크스의 이론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일 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 역사인식이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탈근대'를 지향하니까요. '근대'라는 개념이 유일한 역사발전 단계가 아니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조선후기에 구지 미약했던 상품화폐경제 발전을 그리 크게 써놓을 이유는 없겠죠.
2. 마찬가지 맥락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근본부터 부정할 수 있는 이론 역시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일 것입니다. '근대화'하는 개념이 반드시 필요한 역사 발전의 경로로써 인정받지 못한다면, 식근론을 가지고 그리 싸울 필요도 없겠죠. 하지만 P.M.이론은 아직 그 이론이 명확하게 정립된 것도 아니며 주류로 인정받지도못했기 때문에 명확한 대안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 이론 역시 얼마 안 가서 다른 이론에 밀릴지도 모르는 일이죠. 3.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낙성대학파나 일부경제 학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통계와수치들로만 말할 뿐 역사적 관점에서의 '근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적'근대'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성립되어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인민 평등이 나타나야하며 경재적우로눈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가진자들의 논리라도 기본적인 요소는 갖추어야죠. 그런데 식근론자들은 주로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근대를 주장하며 다른 부분들은 상대적으로 등한시합니다. 게다가 그 경제적인 '근대' 또한 극소수의 자본가들만이 혜택을 보았고, 절대다수의 민중들은 '수탈론'에 들어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서양 근대를 만든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부르주아 계층 조차도 만들어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론을 부르짖는 것은 스스로 그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은 학술적으로 그 의미를 가지기 부족합니다. 또한 학술적으로 식근론이 이겼다는 주장에는 전혀 근거를찾지 못하겠습니다.
13/10/17 15:46
관련성이 있을 것 같아 링크를 해봅니다.
http://blog.aladin.co.kr/booktopia/4712056 이영훈 = (중략)...처음에는 산업혁명으로 표현하려 했어요. 그러나 <지나치게 경제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근대화혁명으로 했습니다. 윤 선생님도 주장하듯이 <근대화란 게 상당히 억압적입니다. 근대화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측면도 있지만, 수많은 갈등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그 말 속에 모든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자꾸 근대화를 미화했다고 그러시는데…. 윤해동= 식민지근대화나 근대화혁명 보다, 오히려 식민지산업화, 산업화혁명이라고 개념을 좁히면 오해를 덜 받지 않을까 합니다. 이영훈= 굉장히 억압적인 와중에도 사회 경제적으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고심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만들어낸 말입니다. 윤해동= 근대화혁명이라 해버리면 개념 자체에서 많은 오해가 생겨버립니다. 이영훈= 대안이 없더라구요. 산업혁명은 너무 역사화된 말이 되어서…. 당시에 있었던 사회경제적 변화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혁명적 변화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통합하는 정치 기제가 작동한 점 등을 포함해 근대화의 명과 암을 골고루 썼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성장 잠재력이 그 시기에 폭발한 것은 사실이죠. 그런 고뇌에서 나온 산물입니다.
13/10/17 15:5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072124145&code=96020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0086702 일단 소농사회론을 수용해야 하는가 마는가, 그것을 수용한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부터 논쟁이 많은 판국입니다. 그런데 이영훈 교수의 주장이 인터넷 상에서는 경전처럼 받들여지는 경향이 있어 상당히 꺼림찍할 따름입니다. 조선후기사회만큼 현재 한국사에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없는데 인터넷 상에서는 이를 함부로 말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13/10/17 16:13
해당 인터뷰를 링크한 건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경전시하려는 건 아니었고, 식근론자들이 <근대화>란 어휘와 개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면서도 근대라는 것 자체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라는 측면을 잘 지적한 듯 하여 링크해봤습니다. 특히 '근대화란 게 상당히 억압적입니다. 근대화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측면도 있지만, 수많은 갈등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그 말 속에 모든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라는 주장은 정파와 학파를 막론하고 그 자체로는 다들 공감할만한 이야기(뒤집어 말하자면 너무 당연해서 진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수탈과 근대화가 모순된다거나 경제적 측면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는 식의 의견들은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보고요.
13/10/17 17:24
'근대'라는 단어의 의미가 폭력과 업압 등의 부정적인 면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지만, 식근론에서 이교수님이나 안교수님의 논리는 (경제)발전 측면에서의 '근대'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다른 말씀을 하셔도 본인들의 연구결과는 결국 그쪽을 향하고 있으니 말은 공허해 질 수 밖에 없죠. 차라리 식민지산업화론이라고 했으면 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정말로 위와 같은 입장이셨다면 더더욱 근대라는 용어를 써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분들이 주창하는 ' 근대'의 혜택을 본 것은 결국 극소수의 자본가나 지주계충이었으니까요.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식근론과 뉴라이트 세력이 연결되어 기괴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안교수님이나 이교수님은 그럴 의도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졸지에 식민지 시대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논리로 나타났으니까요. 교학사 교과서는 그 귀결일 것입니다.
13/10/17 17:32
이건 의도 이전에 기본적인 학적 입장에서 나오는 문제로 이해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밑에도 코멘트를 달았습니다만, 식민지 근대화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제사적 연구나 제도주의적 연구 자체가 경제를 사회의 근간으로 놓고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근대화의 전부는 아니지만 코어에 해당한다고 보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라고 봅니다.
13/10/17 18:21
네, 사실 요즘에는 안교수님이나 이교수님의 주장이 나름대로의 학문적 입장에서 기인한 결과라는 것을 어느정도 받아들였습니다. 사회경제사가 아직 역사학에서 중심의 위치에 있다는 것도 그 근거가 되겎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적인 비판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을 분리하기가 쉽지 않은가봅니다...
13/10/17 16:17
뭐 애초에 모순된 게 아닌 이상 이상할 게 없잖나 싶어요. 원래 근대라는 게 총칼과 피땀과 폭력과 억압으로 점철된 극단의 시대니까요.
덧붙여 "원래 근대는 피를 먹고 자라는 거니 일부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식의 주장은 정치적으로 틀려먹었지만, 딱 그만치로 "근대화 프레임으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고 발전과 저발전을 구분짓는 거 자체가 폭력이라능! 근대 담론을 초극해야 한다능!"이라는 식의 의견은 실없다고 생각합니다. 듣는 입장에서는 그래서 뭐 어떻게 했어야 했다는 거야...라고 밖에 할 말이 없으니까요.
13/10/17 15:50
참고로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공공론 < 식민지 근대성론 < 식민지 수탈론(자본주의 맹아론) 수탈성격의 배제 정도로 대충 순서가 이렇습니다.
13/10/17 17:01
식민지 근대화와 식민지 근대성은 완전히 다릅니다.
식민지 근대성은 '식민지적'근대성, 즉 '식민지적'에 방점이 찍힌 단어라서여. 우리나라의 경우 식근론에 충격을 받은 수탈론자들 중 일부가 식근론도 받아들일건 받아들여야 된다면서 식민지 근대성을 들고 나왔져. 즉 수탈론적 입장에서 식근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것이 식민지 근대성입니다.
13/10/17 15:59
식민지 근대성에 관한 책으로는 일단 가톨릭대 정연태 교수의 책을 읽어보시기 권합니다.
식민지 근대성이라는 단어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와 뭐가 다르냐는 오해가 많던데. 정연태 교수는 국정원 시국선언도 하고, 교학사 교과서 비판 인터뷰도 했던 진보성향의 학자입니다.
13/10/17 16:12
여담이지만 그리고 근대화란 단어가 가지는 폭이랄까. 그런게 굉장히 넓져.
근대화의 두가지 큰 축이 대중시민과 산업화인데. 보통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국가들이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서술은 후자에 기인하는 면이 크져. 민주화의 요소를 중시한다면. 독일, 프랑스, 영국 등도 근대화의 시기가 상당히 늦춰집니다. 참정권 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진게 1차세계대전 이후이니 말입니다.
13/10/17 16:21
아무래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롯한 경제사적 연구나 제도주의적 연구 자체가 경제를 사회의 근간으로 놓고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근대화의 전부는 아니지만 코어에 해당한다고 보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겠죠. 이전의 유물사관이나 마르크스주의와의 연속성도 있을 테고요.
13/10/17 16:31
뭐 러시아 같은 경우에는 농노해방령 전까진 뭘로 봐도 전근대국가죠. 솔직히 사회적 근대화로 따지면 러일전쟁 기준으로 러시아가 일본보다 '근대적'인지는 의외로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13/10/17 16:46
첨언하자면 modernity(근대성)와 modernization(근대화)의 차이를 두는게 식민지 근대성인데.
더 많이 쓰이는 용어는 '식민지적'근대성. 여기서 모더니티는 긍정적 의미가 아닙니다. ‘식민지적’ 에 방점이 찍힌 단어죠. 근데 이영훈이 말하고자 하는바는 '근대화'란 단어 역시 절대 긍정적 의미가 아니라는 점에서 '근대성'과 뭔 차이가 있겠냐는 거겠지여. 즉 이영훈 입장에서는 근대화나 근대성이나 똑같다는 거겠져. 둘 다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라는거니까.
13/10/17 17:43
분명히 국사 시간에 배웠던 단어인데..
눈시BB님 글도 재밌게 봤고, 역사 서적도 교양 수준에서는 꽤 읽은 줄 알았는데.. 그냥 '전.. 들은적 없습니다..' 하고 싶어질 정도로 리플의 위엄들이 돋네요.. 다만, 예전에 식근론 논쟁을 찾아보면서 공감이 가는 부분은 이런 내용이었어요. 식민지배를 통해 근대화(라는 용어가 적합하냐 혹은 실제로 존재하였나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가 이루어진게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문제는 그 역사를 접근하는 방식은 통계나 사실 검증이 아닌 해석의 문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그게 정당하냐 혹은 인정해야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김구나 윤봉길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사람과 독립 투사라고 부르는 사람의 대립을 사실이냐 아니냐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무튼 리플로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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