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공세가 이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 났을 수도 있었던 상황, 기적처럼 나타난 웰링턴과 픽턴의 고참병들은 전황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공세를 이어가던 프랑스군은 예기치 못했던 부대가 출현하자 흠칫 놀란듯 전진을 멈추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레이유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웰링턴의 매복 작전 등에 당한 적이 있었던 인물이다. 때문에 극도로 주의했기 때문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는 한 뛰어난 군사 지휘관의 명성 만으로 적의 기선을 빼앗아 온 사례가 된다. 여하간 프랑스군은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창기병들은 본대에서 갈라나와 계속 공격을가했다. 이에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더스 연대는 방진을 구성하여 적 기병을 쫒아내는데 성공한다. 그 사이에 영연합군의 브라운슈바이크 군단 등이 카트르 브라의 서쪽에 무사히 도착하여 수비군의 전력은 더욱더 강력해졌다.
잠깐의 틈을 이용해서 웰링턴은 직접 부대를 재빨리 정렬하기 시작했다. 지원군 등장 이전까지 잘 정돈된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공격을 받은 영국군은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던 데다 많은 병사들이 숲으로 피신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수습하고 장기말처럼 배치하고 있는 동안, 네이의 포병들은 다시 공세에 나서기 시작한다.
장 바티스트 바케트 드 그리보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듭하며 승전을 거듭한 대육군의 가장 유명한 부대는 다름아닌 '포병' 일 것이다. 나폴레옹의 포병들은 세계를 정복했고, 나폴레옹이 이를 활용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포병의 힘은 결코 그 한 사람의 영향력으로 탄생한것이 아니다. 세계 최강의 포병대를 만든것은 그 전대로부터 이루어진 성과였다.
루이 15세 시절의 장관이었던 쇼아죌 백작은 그리보발 장군에게 새로운 대포의 개량을 일임했다. 키 크고 성품이 느긋했던 이 장군은 7년 전쟁에 복무하면서 18세기의 포격술에 대한 여러 지식을 흡수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관련 지식을 훔쳐 베우는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보발의 12파운드 야포는 일종의 전설로 남았고, 그 유럽 최고의 전설은 1825년이 될 무렵까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프랑스 포병이 진실로 세계 최고였던것은 단순히 대포의 연사 속도가 더 빠르고 성능이 좋아서가 아니다. 향상될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 역시 탄탄하게 갖추어지고 있었다. 영국과 벌어진 7년 전쟁에서의 굴욕적인 패배는 프랑스군에 있어 오히려 일종의 자극제를 주었고, 이로 인해 새로운 방식의 싸움, 전술 영역에 대한 논의는 풍부하게 토론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1778년 뒤 테유(Jean du Teil)는 『전투에서 신형 포의 사용』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다. 여기서는 포병과 보병을 효율적으로 결합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무엇보다 결정적인 시점에서 대포를 집중적으로 대량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방안이 있었고, 이러한 의견들은 전문가들의 공감대를 형성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호레이쇼 넬슨이 단순히 '개인' 의 유능함을 떠나 지난 수세기 동안 내려온 영국 해군의 선진적 시스템과 뛰어난 기량의 정점에 있던 '인프라에서 나온 인물' 이라면, 다른 부분은 제끼더라도 포병에 대한 나폴레옹의 신화적 이야기들 역시 '막강한 인프라' 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등장한 신화적 인물로 인한 부대의 힘은 그 기반이 허약하여 부서지기 쉽다. 하지만 견고한 기반 위에 탄생한 부대는 결코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상대가 좋지 않았다.
지휘관의 개성이라는 면에 있어서 웰링턴 만큼 뚜렷한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지형, 지리를 이용하는데 도가 튼 웰링턴은 프랑스군의 포격 움직임이 보이자 즉시 길가의 배수구나 음푹 들어간 지점에 병사들을 엎드리게 지시했고, 음푹 꺼진 도로와 그 근처의 울창한 잡목숨은 귀중한 방어망이 되었다. 영연합군은 안전하게 은신한 채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연합군이 움츠러든 모습을 본 네이는 자신만만하게 직접 공격 종대를 편성하기 시작한다. 그는 각각의 여단으로 4개 공격종대를 조직했으며, 이 정도의 응집력이라면 픽턴이 이끄는 영국 우익의 얆은 전열을 돌파해서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믿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이전 유럽을 휩쓴 것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구사했던 횡대전술이었다. 자국의 군인 중 많은 숫자가 용병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를 통제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횡대전술을 구사했는데, 횡대대형에는 적의 집중 화력으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이점에 '화력집중' 의 강점이 있었다. 7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가 '로이텐' 과 '로스바흐' 에서 보여준 무훈은 실로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이에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횡대대형을 연구, 발전 시키는데 집중하였다.
따라서 혁명 이후 전유럽을 상대하게 된 프랑스에 있어서는 이 '횡대' 를 깨뜨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프랑스가 내놓은 해답은 '오더 믹스(Order Mixte)' 였다.
이 전투 대형 역시 결코 하루아침에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영웅적인 창조자를 바랄 뿐이지만, 하나의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 앞을 깔아주는 무수한 선학(先學)과 바탕을 지탱하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은 묵묵한 공헌이 있다. 아직 7년 전쟁의 굴욕적인 패배가 잊혀지지 않았던 1770년대, 프랑스의 귀베르는 패배를 초래한 당대의 정치가와 장군들을 비난하고,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며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들 중에서……위대한 천재가 나오게 할 것이다! 아니,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공동체의 지식에 관여할 것이고, 정치체제를 창조하거나 완성시킬 것이며, 그 체제의 꼭대기에 올라 원동력 역할을 할 것이다……" 이 말에 의하자면 나폴레옹과 같은 인물의 등장은 '필연' 이었고, 그의 기반이 되는 힘은 피눈물을 흘리던 앞선 세대의 절규나 다름 없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탈리아 원정 당시 나폴레옹은 귀베르의 서적을 가지고 다녔다.
패배의 굴욕에서 벗어나려는 프랑스군 내에서는 종대 편성과 횡대 편성의 장점에 대한 토론이 대단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핵심은 '보병은 총검에 의존하는 대량 공격력인가' 아니면 '화력' 그 자체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7년 전쟁 이후 초기 프랑스군은 숙적 프로이센의 교련과 전술을 그대로 베껴 쓰고 있었지만, 미국 독립 전쟁을 주시한 귀베르는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라 횡대나 종대를 유연하게 조합하는 혼합편성" 이라는 핵심에 다다르게 된다.
횡대의 힘이란 '화력' 이다. 보다 넒게 배치된 보병들이 퍼붓는 총탄의 세례는 결코 간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종대의 힘이란 '충격력' 이다. 횡대의 진형은 옆으로 늘어져 있다는 점 때문에 필연적으로 충격에 약할 수 밖에 없지만, 위아래도 길게 이어진 종대는 적의 진형을 꿰뚫어버리는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두가지는 결코 조화될 수 없어 보였기에 대부분의 국가는 횡대를 선택했지만, 이제 프랑스의 오더 믹스는 그 두 가지 장점을 한꺼번에 조합한 것이었다.
이 대형의 간략한 이론은 다음과 같다. 교전에 들어설때, 선두의 산병들은 산개 진형을 취하여 적을 교란하고 본대의 기동을 돕는다. 그때 중앙의 횡대 진형은 적에게 사격을 가하고, 횡대와 후방의 포병들이 퍼붓는 막강한 화력 공세에 적이 틈을 노출하면 그 즉시 측면의 종대 진형은 착검을 하고 들어가 충격력으로 적을 완전히 흐뜨러버리는 것이다.
그 기본적인 움직임은 이렇지만, 프랑스 대육군의 강점이란 종합적으로 말해 횡대와 종대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술적 '유연성' 은 대단한 힘이 되었고, 이에 비해 오스트리아 등의 상대국은 엄격한 횡대 전술만을 고집하여 유연성이 둔해져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프랑스 대육군의 기반이 '국민' 이라는 점에서 나오게 된다. 애국심을 위해 싸우는 병사는 돈을 위해 싸우는 용병에 비해 대열 이탈의 걱정 등이 덜했던 것이다.
횡대대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영연합군 역시 다른 구제국들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웰링턴은 픽턴을 시켜 얆고 긴 횡대 진형을 취하고 네이의 공격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은 종대 진형으로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승리를 위해!" "적에게 총검 맛을 보여주자!" "황제를 위하여!" 라고 소리치는 프랑스군의 기세란 대단한 것이었다.
대규모의 병력을 한 곳에 밀집시킨 공격종대의 병사들은 주위에 있는 막대한 동료들을 보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안정감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그리고 출발의 노래(Le Chant du Depart)를 부르며 천지를 요동치게 하면 프랑스의 적들은 겁을 먹고 벌벌 떨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며 머뭇거린다면, 그들의 연약한 횡대 대형은 종대의 충격력에 유린되어버리고 말 것이리라.
그러나 이 1815년의 카트르 브라에서 영국군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공격종대는 이제 머스킷 총의 유효사거리 안에 들어오지만, 아직도 영국군은 사격을 가하지 않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프랑스군은 앞에 있는 가는 붉은 색 줄 - 썬 레드 라인(Thin Red Line)에서 들려오는 "조준!" 이라는 외침을 듣게 되었다. 영국의 머스킷병들은 일제히 사격 자세를 취하고, 프랑스군 종대의 선두를 정확히 겨냥한다. 왼쪽 끝에서부터의 전장의 오른쪽 끝까지, 모든 적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고, 종대의 선두에 선 프랑스 병사들은 곧 끔찍한 위험이 닥쳐오리라 생각하고 있지만 달아날 수는 없다.
영국군의 머스킷이 불을 뿜고, 방금전까지만 해도 빛나는 푸른색 군복을 입었던 프랑스군의 보병 종대 선두는 혼란에 빠진 부상자와 전사자가 되었다. 땅에 쓰러진 자와 불구가 된 자들의 입에서는 고통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머스킷 시대의 전투에 있어, 첫번째 사격은 대단히 중요하다. 후대에 이르러 밀리터리 매니아들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연사 속도 등은, 기본적으로 전장의 상황을 훈련장과 동일시 여기는 실수를 범하는 편이다. 크리스토퍼 더피(Christoper Duffy)의 말에 따르면, '이상적인 상황에서의 발사 속도는 실제로 병사들이 60개의 탄약대와 식량, 야영 물품 일부분을 등에 인 상태에서 보일 수 있는 발사 속도를 추측하는데 오해를 불러왔다.' 또한 급박한 전장의 상황에서는 불발, 오발도 적지 않으며 '일제사격' 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만큼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다.
그런면에서 볼때 전투의 첫발이야말로 중요한 일격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첫번째 총알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여유있게 무기가 깔끔한 상태에서 날이 선 부싯돌로 장전했기 때문이다. 근거리에서 이러한 총을을 일제사격으로 발사하였을 떄 높은 살상력을 보였다.
첫번째 사격이 끝난 후, 전우의 시체를 넘어 진격하던 프랑스군은 경악할 만한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눈 앞에 있던 영국군은 대륙의 어느 부대보다도 빠르고 부드러운 교대끝에 또다시 사격을 가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국군이라 해도 머스킷 시대의 난잡한 혼란상에서 아주 벗어나는 수준의 부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월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실탄 연습을 계속한 그들은 여타 다른 구제국의 군인들에 비해여 막강한 2열 횡대의 사격 실력을 보유했던 것이다.
선두는 이제 혼란에 빠진 채 멈춰버린다. 그들은 어떻게든 대응사격을 취하기 위하여 여 대형을 갖추려고 하지만, 뒤에서 오던 병사들은 선두의 혼란을 미처 알지 못찬 채 전진하여 피바다 속을 첨벙거리고 있는 앞의 병사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종대 진형의 혼란이 극에 달한 순간, 영연합군의 하이랜더스연대 병사들은 언덕 아래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프랑스군의 종대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들은 도주를 시작한다.
그러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익과는 달리, 좌익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제롬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브라운슈바이크의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웰링턴이 염려했던 벨기에 병사들은 대부분 후방으로 도주하면서 전열이 붕괴되었고, 기세를 타고 공격하는 제롬의 부대는 보쉬 숲을 휩쓰면서 적들을 손쉽게 제압하였다.
위기의 순간, 프리드리히 빌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직접 경기병을 인솔하여 반격에 나선다. 이들의 영웅적인 공격은 프랑스군에게 거의 타격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머스킷 사격으로 많은 희생자만을 내었으며, 제롬의 뒤에 주둔하던 피레의 기병에 의하여 완전히 격퇴당했다. 프랑스군은 패주하는 적 기병대를 추격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살해했다. 이 전역에 있어 첫번째로 전사한 주요 지휘관이었다.
이 좌익의 기병대가 한 공격은 '공격' 그 자체로는 심각한 타격만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경기병대가 목숨을 내놓고 적을 저지하는 동안 완전히 적에게 괴멸될 뻔한 좌익은 상황을 안정화시켰고, 보쉬 숲을 헤매며 후퇴하던 보병들은 서로 만나 전열을 추스릴 수 있었던 틈을 주었던 것이다.
1815년의 워털루 전역에서 처음으로 전사한 주요 인물, 프리드리히 빌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트르 브라의 프랑스군 사령관 미셀 네이는 초조하게 전역을 지켜본다. 우익의 공격은 저지당했고, 좌익의 공격은 선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이제 네이는 그를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 데를롱의 1군단을 기다리고 있다. 그 추가병력이 있으면 자신은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분명히 전날의 작전 계획에 의하면, 영국군을 상대하는게 오늘의 주요한 목표가 아니었던가? 그는 프로이센의 블뤼허가 군단을 앞으로 밀어넣었으며, 나폴레옹이 우선 주공을 프로이센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데를롱은 어디에 있는가?
네이가 고민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을때, 15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리니에서는 블뤼허가 절망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같은 날에 펼쳐진 양대 전선
블뤼허의 도발적인 움직임은 나폴레옹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호기로 삼았다. 프로이센군은 리니의 하천을 방어선으로 삼았는데, 하천은 크지는 않았지만 늪이 많아 다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건너기가 어려웠으며, 그 다리는 총 4개가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이 4개의 다리와 근처 촌락 10곳을 기점으로 삼아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 뒤편의 지형은 조금 높았기 때문에, 그들은 다가오는 나폴레옹의 군대에 대해서 유리함을 가질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완강해 보이는 진형에는 실은 큰 문제가 있었다. 정면의 공격을 전제한 프로이센군의 진형은 리니 하천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다보니 측면의 기동에는 상당히 허약했던 것이다. 또한 하천을 건너려면 다리를 건너야 하는 통에 부대를 앞으로 빠르게 진격시키기 어려웠고, 이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포병대의 공격에 허약하게 당할 수 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전술은 이러했다. 그는 기병대로 적의 좌익을 조금 흔드는 동시에, 정면공격을 퍼부으며 동시에 우익을 타격한다. 그 사이 프랑스군의 포병대는 적을 강타하고, 이후 카트르 브라에서 달려온 네이가 우익을 보충하며 적을 완전히 포위하고, 그 사이에 제국근위대가 정면에서 진격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단언했다.
"세 시간 뒤에는 결판이 나겠지. 네이가 명령을 충실히만 이행한다면, 프로이센군은 단 한명도 도주하지 못할 거야."
어려울 것은 없어보였다. 카트르 브라와 리니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귀를 기울이면 전장의 굉음 소리가 들릴만 하건만, 그 날 오전 나폴레옹은 카트르 브라 쪽에서는 단 한발의 총성도 듣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네이가 이미 카트르 브라를 손쉽게 점령했으며, 이제 우익을 향해 진격을 곧 시작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로서는 네이가 웰링턴이 도착할 때까지 머뭇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나폴레옹은 공격을 시작한다. 프로이센군의 예비 부대는 시작부터 포병의 집중 포격을 당하며 처참한 피해를 입었고, 곧 이어 달려든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은 포로를 남기는 자비를 베풀지 않은 채 끔찍하게 서로를 살육했다. 항복한 포로들은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마을은 불에 탔고, 백병전은 그 어느때보다 치열했다. 프랑스군의 공세가 다섯번째에 이르는 무렵에, 프랑스 병사들은 마을의 일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같은 시간, 네이는 똑같은 의문을 속에 담고 있었다. 예비대인 1군단의 데를롱은 어디에 있는가? 왜 자신을 도우러 오지 않는 것인가?
오후 2시 무렵에 네이는 참모총장 술트의 지시를 받는다. "폐하의 의도는 장군께서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해 그들을 완전히 후퇴시킨 후, 우리와 합류해 블뤼허의 군단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네이가 카트르 브라를 이미 장악한 후 움직이고 있다는 전제에서나 가능하다. 웰링턴의 군단과 치열하게 교전하고 있는한 이 명령은 수행 자체가 불가능했다. 십중팔구 짜증이 났을 그는 데를롱을 기다렸지만, 이윽고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다.
베도예르
리니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을때, 나폴레옹의 부관인 드 라 베도예르는 데를롱에게 리니의 전장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황제 참모의 권위를 사용해 황제의 사인도 없는 메모를 작성해 전달했고, 따라서 이 명령은 네이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네이는 데를롱 군단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은 카트르 브라에 가까워지기는 커녕 리니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면, 웰링턴은 네이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우익을 붕괴시키고 있었다. 자신에게 명령이 알려지지도 않은 채, 승리를 확실하게 거둘 수 있는 부대가 이동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붉은 머리의 원수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러시아 원정 이후 부쩍 충동적이 된 그는 거의 발작적인 명령을 내린다. 리니로 이동하고 있던 데를롱 군단에 대해 소환 명령을 내린 것이다.
데를롱 군단은 카트르 브라로 이동하다가 갑작스러운 지시로 리니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또 카트르 브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데이비드 챈들러 박사는 데를룽 군단이 카트르 브라와 리니에 결정적인 기여를 못한 것이 결정적인 상황이라고 말한다. 카트르 브라와 리니, 모두 대단한 격전이었기에, "어느 곳에서든……데를룽 군단이 개입했다면 전투를 결정지었을 것" 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조화가 되지 않는 지시를 받았던 데를룽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로써는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겠지만, 만일 그가 '넬슨의 보이지 않는 눈' 을 가졌다면 역사는 크게 소용돌이 쳤을 것이다. 이로써 경험 부족인 참모진, 발작적인 장군,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부하가 모두 모였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제 삐걱 거리는 듣기 싫은 불협화음을 연주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