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투 연재를 며칠 못했는데 잠깐 쉬어간다는 의미에서 나폴레옹이 아주 고생했던 다른 전투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본래 좀 다른곳에 쓴 글이라 쓸데없는 소리가 좀 껴있습니다.
"황제는 아일라우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듣기만 했다."
── 라스카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지난 2세기 동안 무수한 텍스트가 쓰여졌다. 따라서 지금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게중 어느것도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다. 탈레랑의 말에 따르자면 "최근 천년간 가장 비범한 인물" 이며, 메테르니히의 평가로는 "역사적 사건들의 지배자" 이자, 웰링턴의 시선에서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원칙" 인 인물. 또한 샤토브리앙의 언급으로는 "진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혼을 불어넣은 가장 강력한 숨결." 이다. 그러나 동시에 샤토브리앙은 이렇게 말한다. "지독한 이기주의만 있을 뿐 프랑스에 대한 감사와 관대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인물." 메테르니히의 회고에서의 한 언급에서 우리는 위대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정신 병적인 영광에 심취한 과대망상병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백만 명의 목숨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라파예트는 이렇게 아우성쳤다. "저 이집트의 사막과 과달키비르 강, 다흐 강의 강변, 비슬리 강 언저리, 그리고 모스크바의 빙원, 지난 10년동안 그곳에 묻힌 300만의 프랑스 국민……"
무엇이 맞을 것인가? 보는 시선에 따라 그는 영웅이자, 혁명가이며, 계몽자이자, 구원자다. 또한 학살자이며, 독재자, 과대망상증 환자에 세상의 재앙 그 자체다. 혹은 그 전부라거나. 그와 같은 인물을 '평가' 하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스스로 가진 사고의 영역에 투영해보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나폴레옹이 영웅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부정하기란 불가능하다. 독재자라고 생각하는가? 학살자라고 생각하는가? 이를 부정하는 것 역시 한없이 어려운 일이다.
나폴레옹이란 하나의 신화다.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이란 다양한 법이다. 여기서 신의 몰락이라는 부분은 그 신성(神性)을 훼손하기는 커녕 연대기적인 완벽함을 더했다. 아마도, 그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세인트헬레나라는 연대기의 끝에서 그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라기보단 잊혀지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박해를 당하거나 '순교하는 것' 이 오히려 낫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식민장관 베더스트 경이나 허드슨 로위를 비난했지만, 그 비난이란 야릇한 어조를 띠고 있다.
"500년 후 나폴레옹의 이름은 빛날 것이다. 허나 배서스트, 캐서슬리, 그리고 당신 허드슨 로위의 이름은 오로지 나에 대한 그대들 행실의 수치스러움과 부당함으로만 알려질 것이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 은 전설이 되기를 원했다. 전설의 전제조건이란, 잊혀지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서 끝없이 기억을 헤집어 회고록을 작성하게 했다. 워털루, 그렇다. 그 마지막의 끝에 있어서는, 결코 나폴레옹은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한 적이 없다. "그 전투에서 졌다는 것을 아직도 수긍할 수 없어." 어느 날이면 그는 자신을 수행하는 인원들에게 이렇게 입을 열었다. "자, 워털루를 공부하자." 그 머릿 속에서는 끊임없이 워털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술트를 좌익에 배치했어야 했는데……방담을 어째서 내가 기용했지?"
앤드루 로버츠의 말에 따르자면, 워털루 전투의 수 많은 가정들 - 황제의 건강, 원수들의 무능, 인사 조치의 아쉬움, 우연을 이야기하는것은 '나폴레옹 신화' 의 일부다. 그 가정의 전제 조건에서는 '나폴레옹은 결코 패할리 없다.' 는 인식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패할리 없는 인물이 졌다. 따라서 이유가 필요하다. 완전하게 싸우지 못한 이유……
워털루에 대한 나폴레옹의 집착은 바로 그런 것인가? 워털루에서 그는 패배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정치적 생애는 1815년 6월 18일에 종결되었다. 그러나 완패를 인정한다면 신화는 타격을 받는다. 워털루보다도 확실하게 그를 끝장낸 러시아 원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러시아에 대해서 회고를 할때면 그는 눈물을 짓곤 했다. "말을 할 수가 없구나. 내가 저지른 그 잘못된 일들이 너무나 떠올라……" 워털루는 달랐다. 그는 백번에 이르는 워털루의 회고에서 자신의 실수를 차라리 주위 사람들에게 전가시켰으며, 심지어 승자인 웰링턴의 실수를 꼬집는 일을 즐겼다.
그러나 이 폐위된 황제, 역사를 되풀이해 전설로 만드는 일을 말년의 취미로 삼은 인물조차도, 거의 입에 담지 않았던 전투가 있다.
아일라우.
눈보라와 살육의 잔치.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것. 쏟아지는 눈발. 북풍에 날려 우리의 얼굴 위로 휘몰아친다. 눈을 뜰 수조차 없다."
── 프랑스 기병대 소속, 파르캥(Parguin). 아일라우에서.
1796년의 이탈리아 원정으로부터 워털루의 1815년. 방데미에르 반란의 1795년까지 포함하면 꼬박 20년이다. 한 사나이의 20년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는 유례없는 20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카스틸리오네가 있었고, 리볼리가 있었으며, 아르콜레 다리가 있었다. 피라미드 앞에서의 전투, 마렝고의 기적, 아우스터리츠의 영광, 프리틀란트의 승전, 바그람의 격전도 있었다. 영광의 순간이란 수 없이 많다. 캄포 포르미오, 아미앵은 어떨 것인가. 아무튼 그는 일찍부터 오스트리아 황제와 일대일로 협상했고, 유럽의 지도를 변경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운명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따라서 각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시기는 모두 달랐다. "제일 집정관 시절." 몽툴롱 부인의 말이다. "로마왕(나폴레옹의 아들)이 탄생하던 때입니다." 충직한 베르트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리 루이즈(나폴레옹의 두번째 부인)와의 결혼이지요." 구르고는 단언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한단 말인가?
"아마도 틸지트가 아닐까. 아일라우에서 고생을 하고 마음이 괴롭던 참이었지. 헌데 승리를 거두고 법령들을 반포했고, 황제들과 왕들을 내 발밑에 엎드리도록 했다."
나폴레옹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틸시트에서 러시아의 차르와 프로이센의 군주를 거느리며 협상을 벌였다. 그레고리 프리몬 - 반즈에 따르면 "프리틀란트의 승리는 나폴레옹의 승리를 통틀어서 가장 완벽한 승리였다." 그날 그는 베르티에의 앞에서 승마 채찍으로 발밑에 높이 솟은 폴들을 내리치며 소리치고 있었다. "베르티에, 오늘이 며칠인가!" "6월 14일 입니다." "마렝고의 날, 승리의 날이군!"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거의 4만명 가량 괴멸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말한 틸시트의 영광은, 아일라우의 고난 이후에 이어졌다는 부분에 있었다. 이것은 이례적인 언급이다. 그는 아일라우에 대해 언급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세인트헬레나에서 삶의 재미를 잃어버린 과묵한 중년을 수다스럽게 만드는것은 몇마디 말이면 충분했지만, 아일라우는 아니다. 그는 1807년 2월 8일에 대해서는 늘 애매하게 피해가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도저히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없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어떤 영광이라도 퇴색하는 법이야."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일라우에서.
1806년의 해가 지고 있을 때, 나폴레옹과 그 제국은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바로 지난 해인 1805년에 모라비아에서 두 명의 황제를 굴복시킨 남자에게 유례가 없다면 그것은 보통의 성공은 아닐 것이다. 예나에서 프랑스 대육군은 프로이센의 군기 30개를 탈취하고 그들을 굴복시켰다. 같은 시간, 아우어슈테트에서 다부는 블뤼허의 맹렬한, 그러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돌격을 수차례 막아내고 그 강인한 사내를 절망에 빠뜨리고 있었다. 대육군은 베를린에 입성했고 나폴레옹은 정복자로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 앞에 섰다. 뮈라와 란은 저항하는 블뤼허를 추격해 항복시켰다.
1806년이 지나기 전까지 폴란드 내 점령지와 동프로이센에 주둔한 수비대를 제외한 전프로이센군,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예들은 이 키 작은 사나이의 앞에 엎드려야 했다. 불온한 스페인은 프로이센의 전역을 눈을 치켜 뜬 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바라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건방진 영국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황제는 '베를린 조약' 으로 대륙봉쇄령을 암시했다. 유럽 대륙의 거의 전역이 대육군의 통제 범위에 들어왔고, 남은 것은 러시아 뿐이었다.
나폴레옹이 너무나 기민하게 움직인 탓도 있겠지만, 프로이센은 1814년에도 그러했듯 러시아를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움직이는 성급함을 저질렀다. 대가는 끔찍했고, 이제 저 너머에서는 패배한 동맹자들의 옆으로 동토의 제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러시아의 경제란 영국을 떼놓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러시아인들이 아는 일을 나폴레옹이라고 모를 일은 없었다. 그는 1806년의 11월 말부터 이미 1807년도에 대한 징병을 실시했고, 기병을 보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말을 끌어왔다. 이미 56만의 대육군에 작센군의 가세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 편제는 앞날에 대한 전조이기도 하다. 프랑스군은 이제 점차 프랑스인들만의 군대가 아닌 독일 인, 폴란드 인, 에스파냐 인, 네덜란드 인 등의 다국적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 나폴레옹의 이 거대한 군대는 바르샤바를 향해 진군해 나간다. 폴란드라는 이름은 어떤 역사의 울림을 느끼게 해주는 떨림이 있으며, 그 자체로 무언의 힘이 있다. 이제 그 땅에 두 군대의 말발굽이 찍히고 있다. 러시아군은 바르사뱌 근처까지 다가왔으며, 프랑스군 역시 시끌벅적한 해방자로서 입성하기 시작했다. 8만 군대를 이끄는 선두에는 뮈라가 있다. 천성이 타고난 광대인 뮈라는 폴란드 왕이라는 직위에 욕심을 내어 요란한 군복을 입고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11월 28일 바르샤바에 들어섰다. 그의 머릿 속에서는 벌써부터 이 영웅적인 민중들을 지도하게 될 생각이 가득한 듯하다.
폴란드 귀족들은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프로이센과 러시아로부터 독립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다. 누구를 내세울지는 그 당시에는 짐작을 할 수 없었겠지만…… 폴란드의 왕이 된 뮈라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긴 누가 1807년에 스웨덴의 군주가 된 베르나도트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뮈라는 포니아토프스키를 끌어들이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러한 움직임에 반감을 보였다. 뮈라와 왕위 ─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다. 뮈라에게는 왕관을 하나 던져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폴란드여서는 곤란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굴복시키려는 그에게 있어 그 가운데에 문제거리를 만들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황제는 폴란드라는 나라에 대해 ─ 그 늪같은 겨울을 제외하고는 ─ 어느정도 호감이 있어 보여 있었지만, 그것과 정치적 문제는 다른 일이다.
"폴란드가 진정으로 그들의 독립을 원하고, 독립을 지탱할 만하다고 생각될 때 그들의 독립을 선포할 것이다. 그들의 군대에 3만에서 4만의 잘 정비된 군사가 모이고 귀족 기사들이 그들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가 바로 그들이 진정으로 독립을 원하고 지탱할 만한 시기다. 수많은 폴란드 인들 구하는 데 내 위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희생할 준비 ─ 얼마나 많은 희생을 바쳐야만 이 '절대정신' 이 감복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뮈라의 미몽을 깨우치려는 듯 나폴레옹은 이렇게 충고했다. 뮈라에 뒤이어 바르사뱌에 들어선 나폴레옹은 마리 발레프스카라는 여자와 사랑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놀고 있을 시간은 없다. 11월 말 경에는 러시아군이 바르샤바 근처에서 물러나기 시작한다. 필시 부크스헤우텐의 2군을 기다리다가 대공세를 취할 계산이리라.
대육군은 움직여야만 한다. 부크스헤우덴이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군을 격파해야만 1월의 겨울에 군대를 쉬게 할 수 있다.
"러시아군은 흔들리지 않은 용맹성과 활력으로, 마지막에는 이겼습니다."
──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 아일라우 전투 이후 알렉산드르 1세에게.
러시아군을 이끄는 총사령관 카멘스키는 76세의 노령이고, 사실상 전쟁터에서는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용맹무쌍했던 워털루의 블뤼허조차 그보다는 4살이 적었다. 워털루 전투 이후 블뤼허는 4년 뒤에 사망했다. 그 아래에 베니히센이 지휘하는 제1군이 있고 부크스헤우덴이 지휘하는 2군이 있었다. 베니히센의 나이인 61세 역시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여전히 세계사에 영향을 끼칠만한 힘을 몸에 남겨놓고 있었다. 파울 1세의 비밀스러운 의문사에 그는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나폴레옹의 원수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베니히센은 바르샤바 북쪽의 푸투스크를 방어하기로 결심한다. '유능' 이라는 말을 태어날 때 부터 달아놓은 듯한 다부의 활약으로 대육군은 강을 건너는데 성공하고, 12월 26일 란은 2만이 안되는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지형에 가린 나머지 적의 전력이 4만 5,000명을 넘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병력을 우위를 바탕으로 러시아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이 투사같은 장군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기병들이 용맹하게 싸우고, 측면의 숲에서는 톨리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란을 압박하고 있었다. 4시간에 걸쳐 혈전이 이어지는 동안 다른곳에 있던 돌탄 장군은 4킬로미터를 진군하여 톨리의 측면을 찔러댄다. 톨리가 부대를 이끌고 물러나고, 다시 한번 러시아 기병들이 달려들지만 프랑스 군은 이를 막아냈다. 큰 전투 이후의 산발적인 전투 후에 다음날 베니히센은 후퇴를 시작하고, 병력의 3분의 1을 잃어버린 란은 이를 추격하지 못했다. 베니히센은 자신이 프랑스 군 6만과 나폴레옹을 패배시킨양 모스크바에 보고를 보내고, 이를 통해 자신의 휘하 병력은 물론이고 부크스헤우덴의 병력까지 모조리 손에 넣었다.
다부가 이끄는 군대는 중앙에서 승리를 거둔다. 징조는 좋아보이지만, 결정적이진 못하다. 무엇보다, 폴란드의 악천후와 진흙탕이 모든것을 망쳐놓는다. 나폴레옹은 화가 나서 파리의 장관인 캉바세레스에게 편지를 썻다.
"이곳은 아직도 10월의 기후다. 해빙과 습기 때문에 온통 지독한 진창길이 되었다. 주민들은 일찍이 본 적 없는 일이라고 투덜거린다……"
12월 중순이 넘자 폴란드의 기후는 갑자기 따뜻해졌다. 눈은 녹고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바르샤바 북쪽 평원의 늪지대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를 기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의 평야를 지나 퇴각하기 위해 평소보다 4배의 말을 사용해 포를 끌게 했고, 그마저도 용의치 않아 많은 수의 포를 땅바닥에 내던져버렸다. 프랑스군의 고생 역시 말할 나위 없었다. 진흙에 절뚝거리는 '절대정신'은 탄식했다. "신은 폴란드에 진흙이라는 다섯 번째 원소를 만들어 놓았구나."
"14일 동안 10년은 늙었다."
── 쿠아녜. 바르샤바에서부터 러시아군을 추격하며.
푸투스크의 전투는 란의 용맹을 증명하는 정도 외에는 별다른 의미 없이 죽어간 전사자들만을 배출했다. 대육군의 가장 위대한 고참 근위대조차도 이 나라의 날씨와 땅을 저주하기 시작했기에, 프랑스군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베니히센을 추격한다는것은 무리였다. 늪지와 진창 위로 또다시 추위의 겨울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대육군은 동면(冬眠) 준비에 나선다. 나폴레옹은 바르샤바의 동쪽에서 북쪽에 걸쳐 부채꼴로 병사를 분산했다. 기다리고 있으면 8만의 신병들이 도착할 것이다. 봄이 오면 공세로 전환해볼만 했다.
그러나 네이가 일을 망쳐놓는다. 그 이름도 저명한 에릭 홉스봄은 네이를 나폴레옹 휘하의 전형적인 장수로 평가했다. 용맹하면서도 어리석으며, 이를 바로잡아 줘야 하기에 결과적으로 수동적인 인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서사시에 매료된 밀리터리 매니아라면 다부가 아닌 네이를 기준으로 그런 말을 하는것을 따질 수도 있겠지만, 원수들의 '수동성' 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다.
어찌되었건 이 전형적인 원수는 훗날의 카트르 브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격적인 자세를 보인다. 그는 프로이센 왕이 숨어 있는 쾨니히스베르크 - 현재의 칼리닌그라드를 향해 북상한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남동쪽 50km까지 진군한다. 노회한 베니히센은 파울 1세를 향해 마수를 펼쳤을때처럼 이 순진한 전사를 향해 6만의 군세와 함께 달려든다. 1807년 1월 10일의 이 예기치 않은 전투로 겨울의 사투가 재개되었다.
베니히센의 공세와 나폴레옹의 진노에 비난받은 네이는 당황해서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한 가지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겨울의 눈보라 속으로 숨어버린 듯 했던 러시아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네이는 허겁지겁 서남쪽으로 후퇴하고, 베니히센은 이를 추격하고 있으며, 대육군은 숨 죽이고 이 늙은이를 폴란드의 겨울 속에 파묻어버릴 채비를 갖춘다. 추격전을 벌이던 베니히센은 본능에서 경계심을 느끼고 멈춰서며, 2월 1일 붙잡은 프랑스 군의 연락 장교를 통해 거대한 음모의 실체를 깨달았다. 이 불운한 장교는 베르나도트 원수에게 향하던 길이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한 탓에 겁없이 움직이다 잡혔고, 기밀 문서를 찢어버릴 셈도 없이 카자흐 기병의 먹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늙은 베니히센은 추격을 멈추고, 나폴레옹의 기대와는 반대로 후퇴를 시작한다. 물론 모스크바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병력을 한 곳으로 모을 요량이었던 것이다.
"러시아 놈들은 포로로 잡히지도 않는다. 기계처럼 죽는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12년 러시아 원정.
아우스터리츠의 전능자는 이제 의문에 사로잡힌다. 울룸 전역과 아우스터리츠에서 그는 전쟁의 신이자, 창조주이며, 피조물들을 오만하게 내려다 볼 뿐인 관조자인 동시에 손짓 한번으로 쓸어버리는 제우스였다. 모든 것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비범한 두뇌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늪과 진흙과 1월의 추위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나는 자연에게 패배했다." 황제의 그 말은 변명조의 느낌이지만 일단 틀린 말은 아니다. 황제가 병사들에게 내린 새로운 전쟁법, 즉 총을 든 손이 아닌 발로 하는 전쟁법은 이 설원의 늪지대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일단 적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적은 나폴레옹의 계획을 알지만, 나폴레옹은 적의 계획을 알지 못한다. 이것 역시 드물게 나오는 불길한 사태였다. 2월 2일에는 란이 쓰러졌다. 그는 중병 탓에 바르사뱌로 후송되었다. 이 불굴의 전사가, 다른 무렵도 아닌 이 시기에 전선을 비웠다. 그 자리에 사바리가 자리를 잡았지만 암운은 걷히지 않는다.
"아우래도 적은 굿슈테트에 집결하려는 모양이다. 아군이 호락호락하게 왼쪽 측면을 휘갈길 수 없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을테지." 전쟁의 신은 전례없이 불확실한 어조로 뮈라에게 편지를 보냈다. 곧 척후의 보고가 들어왔다. 적은 란츠베르크에 나타났다. 굿슈테트에서 란츠베르크는 60킬로미터나 북쪽에 있다. 뮈라와 술트는 눈 속을 뚫고 하염없이 그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란츠베르크는 아일라우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그곳에 베니그센이 있었다. 그는 8만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포를 500문을 갖추었다. 갖은 고생을 뚫고 온 프랑스군은 5만 4천여명에 포는 200문에 지나지 않는다. 극도의 피곤과 굶주림이 자신들을 습격하지만, 프랑스의 전사들은 2월 7일 아일라우의 시가지를 점령했다. 영웅적인 무훈이지만 그 아래에는 영광스럽지 못한 광경이 있었다. "연대의 반수가 사방으로 흩어져 집집마다 뛰어들어갔다. 집안 사람들을 두들겨 깨워서 식량을 약탈했다." 조미니의 말이다.
"러시아군은 특히 형세가 블리할 때 그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패배를 겪는다 해도, 다음날이면 마치 전투에서 승리를 하기라도 한것마냥 침착하고도 맹렬한 인간이 된다."
─ 조미니.
2월 8일의 아침이 밝을 무렵, 나폴레옹의 머릿 속에서 떠오르는것은 네이의 1만여 병력과 다부가 거느리는 5,000명의 군대였다. 그는 4만의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을 저지할 동안, 네이와 다부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유린하는 광경을 상상했다. 병력의 분할과 집중. 그가 가장 완벽하게 구사하는 방식이 아닌가? 다부는 옆에 있다. 그런데 네이는 어디에 있는가?
네이의 진로 따위는 나폴레옹도 알지 못했다.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기다릴 틈도 없이, 러시아군은 압도적인 공격을 가한다. 그들은 아일라우에 있는 병력이 술트의 1만 8천여 병력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맹공을 퍼부은 것이지만, 나폴레옹이 거기에 있고 프랑스군이 4만을 넘는다 해도 그들의 우위는 변함이 없었다. 100문이 넘는 포문이 불을 뿜었고, 그때마다 프랑스군 전선의 중앙은 초토화되었다. 프랑스군의 포병이 이에 맞서지만 그들은 상대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앞에서 닥쳐오는 폭설은 프랑스 포병대를 집요하게 방어한다. 또다. 나폴레옹이 네이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없듯이, 날씨의 흐름 역시 통제할 수 없었다.
황제는 술트를 진격시킨다. 프라첸 고지를 20분 만에 점령했던 그 술트가 적의 북쪽 측면을 찌르기 위해 출진한다. 그의 목표는 적에게 강력한 공세를 가하여, 곧 다부가 공격할 남쪽 방향의 전력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술트의 공세를 완벽하게 저지해낸다. 이 아우스터리츠의 맹장은 당황한듯 공격을 가하지만, 그때마다 러시아의 병사들은 빈틈없이 대응했다. 기력이 빠진 술트는 적을 괴롭히기는 커녕, 오히려 주전선의 안전지대까지 되밀리고 있다. 이번에도 나폴레옹의 수단이 막혔다.
술트가 생각만큼 적의 전력을 끌어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대로 다부의 첫 번째 사단이 전장에 투입된다. 러시아군의 기병대가 그들을 꺾어놓기 위해 진격한다. 프랑스군은 적의 맹렬한 진군을 두려워하며 밀집대형을 갖추었고, 견고함을 선택한 대신 예리한 일격은 그 기세가 죽었다.
이번에도 실패했다.
아일라우에서 그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나, 1812년에 이를 무렵이면 이 유럽의 지배자는 러시아라는 나라의 병사들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여러차례 표시했다. 그는 러시아 병사들이 포로로 되지 않고 죽는다고 투덜거렸고, 끔찍한 보로디노 전투 후에는 러시아 병사들이란 난공불락이라고 회고했다. 공포를 모르며, 죽음을 향해 진격하는 병사들. '가축과 같은 군대다.' 는 것은 분명히 경멸 조의 말이지만, 여기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그 윌터 M. 핀트너는 "러시아의 농노 제도는 오히려 군대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었다." 고 끔찍하게 말한다. 러시아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농노들은 평생(이후엔 25년간) 군대에 복무했고, 이는 까다로운 징병과 모병의 혼합군보다 더 안정적으로 '체념에 가까운 강골' 들을 제공했다.
나폴레옹이 이러한 적들을 두려워한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영국의 군사 사절관 로버트 윌슨은 자신이 본 부대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엄청난 체력을 타고났으며…… 전쟁에 적합한 냉정함이나 기질을 바탕으로 극단적인 기후와 역경, 밤낮으로 4시간 휴식에 6시간 전진으로 이뤄지는 행군에도 초연했고, 힘든 노역과 무거운 짐을 지는 데 익숙한 데다가 사나우면서도 절도 있는가 하면 고지식할 정도로 용감하며 열광적으로 고무되기 쉬웠고, 자신들의 군주와 상관, 조국에 헌신적이다. 신앙심이 두터운 그들은 미신에 빠져들지는 않았으며, 참을성과 온순함, 복종심 같은 야만인 특유의 강인한 성품에 문명이 접목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증언은 얼마든지 있다. 영국인 존 스펜서 스탠호프 역시 로버트 윌슨이 본 모습을 러시아군에게서 발견했다. 그는 차라리 경외에 가까운 어조로 말한다.
"내가 본 그들은 훌륭하고 고통 따위는 거의 신경 쓰지 않은 강인한 집단들이었다. 그들은 진정 강철 같은 사나이들이다…… 나는 군의관이 탄환을 제거하려고 살을 째고 후비는 동안에도 덤덤하게 파이프를 피워 물던 어느 병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숱하게 많은 부상자들의 참상을 목격했지만 단 한번도 신음소리를 내배튼 이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정말이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듯하다. 그들의 기골, 근육은 분명 그들의 정신만큼이나 강인했다……"
"고개를 들어라, 제군들! 저건 총알이지 똥이 아니다!"
─ 레픽 대령. 아일라우에서
이 강인하고 끈기 있으며, 자신들이 이름조차 없이 땅바닥에서 죽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포조차 느끼지 않는 맹목적인 병사들이 전진해오고 있다. 무명의 전사들이 다가올수록 압력은 더해진다. 나폴레옹은 오주로를 불렀다. 고집불통의 자코뱅 장군이지만 용맹한 그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적의 중앙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눈은 이제 미친듯이 휘몰아치고 있고, 60cm까지 쌓여 어디가 본래의 땅이고 어디까지가 눈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오주로는 어렵사리 군단을 진격시키지만, 최악의 환경 속에 군단은 진로를 잃었다. 힘을 잃은 공격은 적의 포격에 먹이가 되어 측면을 내준다. 최악의 상황으로 아군의 오인 포격마저 이어진다. 쏟아주는 눈 때문에 프랑스군의 포수들은 보이지도 않는 적을 향해 그 유명한 그리보발 12구경 대포를 쏟아붙고 있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또다시 실패했다.
베니히센은 재빨리 기병사단을 푼다. 포격으로 신음하며 눈밭을 헤매는 오주로의 군단은, 눈 속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러시아 기병들에게 반응조차 못하고 살육당한다. 그들이 간신히 정신을 차릴 양이면, 이제 초록색 외투를 걸친 2개 종대의 러시아 보병들이 다가오고 있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오주로의 부대는 미친듯이 뒤를 향해 도망친다. 달리려고 하지만 이러한 눈 속에서는 그것마저도 쉽지 않다. 달리다가 쓰러지고, 엉금거리면서까지 기어가다 기병들의 공격에 쓰러진다.
아일라우 주변에는 묘지들이 있다. 포격으로 묘지들은 뒤집어 지고, 이전에 죽어 말라붙은 뼈들과 살아서 죽어가는 현재가 공존하는 참극이 펼쳐진다. 앞 조차 보이지 않은 눈과 연기 사이로 부상자들은 비명을 질러대고, 더 큰 포격 소리에 곧 아우성마저 묻히고 만다.
용맹한 러시아 군인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병사들이라면, 선두에서 나폴레옹의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으리라. 그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 전사들은 아우스터리츠의 술트를 막아내었으며, 아우슈테트의 다부를 저지했다. 그리고 이제 막 카스틸리오네의 오주로를 완전히 궤멸시킨 참이었다. 이 눈을 뚫는다면, 이제 눈 앞에 있는것은 '절대정신' 뿐이다.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가면……
"그 날이 바로 황제의 생애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황제는 단지 참모부 장교 몇 명만 데리고 4, 5천을 헤아리는 러시아 군대가 맞부닥칠 뻔했으니까." 충실한 군인인 베르트랑은 그렇게 말했다. "정말 위태로웠는데, 황제는 미동도 안했다. 그를 둘러싼 작자들은 모두 바들바들 떠는데 말이다."
베트르랑은 그 말을 나폴레옹에게 그대로 말했지만, 나폴레옹은 이 회고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는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러시아 병사 4천여명의 앞에서, 나폴레옹은 거의 발작적으로 눈을 채찍으로 내려쳐댔다.
"뮈라는 어디 있는가?"
뮈라, 뮈라, 뮈라! 바로 그 뮈라는 어디있는가? "저 놈들이 그대로 설치도록 내버려둘 작정이냐?" 나폴레옹은 이 거한의 미남에게 소리쳤다. 뮈라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러시아군은 이제 지척에 있다. 그들의 역사적인 진군은 이제 아일라우의 교회 근처까지 이른다. 러시아인들은 이 기념비적인 건물을 1960년대에 공장으로 만들어버렸지만 말이다.
황제가 눈밭의 포로가 되어, 아일라우라는 이름의 카노사에 무릎을 꿇기 직전,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들이 앞으로 나선다. 제국 최고의 근위대는 황제를 지키기 위해 나서 사투를 벌였다.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이집트를 원정했으며,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한 그들보다 위대한 전사들은 이전에도 거의 없었고, 그 이후로는 아무도 없었다. 근위대는 절망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급변할때까지 적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내었다. 그리고,
뮈라가 왔다.
나폴레옹 전쟁의 전쟁화는 수없이 많지만 시몽 포르의 이 그림을 보았을때처럼 강렬하게 다가온 그림은 없었다. 80개 중대의 선두에 뮈라가 있다. 압도적이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 숫자의 기병들은 줄을 지어 진격하고, 진격을 위해 기다린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1만명이 넘는 병사들과 말이 만들어내는 굉음. 혼란스러운 고함소리. 대열을 서 기다리며 맞는 눈보라와 추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느껴지는 주위의 열기. 돌격을 앞둔 흥분과 공포. 고조되는 심장소리. 그 속에서 기도를 하고 있을 어떤 병사. 그리고 달려나가면서 외치는 괴성과, 눈 앞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두근거림.
그 선두에 뮈라가 있다. 여관 주인의 아들로, 제대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군인이 된 인물. 총탄을 맞고도 농담을 지껄이고, 러시아의 지옥에서도 여자에게 수작을 걸며,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어이가 없을 정도의 옷차림을 한 채 날뛰는 천성적 광대.
그러나 지금 그는 80개 중대의 선두에 섰다. 1만 7000명의 사람과 말의 선두에 선 그는 신화 시대에서 잘못 떨어진 아킬레우스와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예의 그 웃기지도 않을 정도로 현란한 차림을 한 채, 그는 돌격한다. 그 뒤를 이어, 신호를 기다리던 1만 7천명과 3만 4천여 마리의 존재들이 고대 영웅의 발자취를 따라 앞을 향해 나아간다. 정렬한 기병대, 천둥같은 고함소리, 굉음에 가까운 나팔, 얼어붙은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말발굽, 폭풍 속에서 불연듯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물결!
역사가 시작된 뒤로, 그러한 광경이 대체 몇번이나 있었겠는가? 지각이 굳어져 지금의 모습이 된 후로, 아일라우의 차가운 벌판에서 영겁의 세월동안 한번도 벌어지지 않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갑자기 땅을 타고 나아가는듯한 벼락은 놀라운 성과를 올리던 적군에게 압도적인 힘으로 쏟아부어진다. 『프랑스 대육군 공보』는 그 날의 돌격의 경과를 말하고 있다. 돌격한 뮈라와 80개 중대의 공격으로 적의 1선이 무너지고, 적의 2선이 흔들렸다고. 그것은 차라리 파도였다. 아무리 용맹한 전사라도, 나폴레옹의 말처럼 "자연에게는 패배하는" 법이다.
거센 파도에 휩쓸린 몇몇 생존자들은 그대로 누워 있다가, 파도가 지나가자 일어서서 등 뒤에 사격을 가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군은 포로를 잡는 것을 종종 거부했다. 그러나 일어선 그들은 또다시 밀려오는 파도의 물결에 저항조차 못하고 쓸려나간다. 러시아의 기병대가 경외할만한 적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오지만, 뮈라의 기병대는 고삐를 돌려 자신들이 헤집어 온 러시아군의 진영을 같은 기세로 다시 돌격해 가로지른다. 대육군 공보의 표현에 따르자면 '눈부시고 놀랍' 게도 말이다.
"황제의 거처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느라, 우리는 시체로 이루어진 두 개의 산 사이를 지나갔다. 조각난 사지, 팔, 머리, 맙소사! 우리 동료들의 시체들 사이로."
── 나폴레옹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포병장교들. 아일라우에서.
뮈라의 역사적인 - 혹은 신화적인 돌격이 전장의 분위기를 바꾼다. 나폴레옹은 이제 몰락에서 벗어났고, 다부의 공격은 활기를 찾는다. 이제 전장의 주도권은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넘어왔다. 러시아군의 좌익은 물러나기 시작한다. 아우슈테트의 전사들이 또다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폴레옹은 여전히 통제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기분에 사로잡힌다. 네이는? 네이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승리를 위해서는 그가, 그의 군대가 필요한데!
그가 나타나야 할 순간 튀어나온 것은 프로이센의 장군 레스토크였다. 치열한 전장에 밤이 접어들자 레스토크의 병력은 다부의 무방비 상태인 측면을 유린했다. 이 역시 나폴레옹이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다부는 완강하게 버텼지만 러시아군의 퇴로를 막는 길목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적인 승리를 눈 앞에서 놓친 러시아 군은 합당하지 않은 전멸만은 피할 수 있었다. 조국을 저 적수에게 유린당한 프로이센군은 이렇게나마 작은 복수를 감행했다.
레스토크를 추격해서 막아야 하는것은 네이의 임무였다. 네이는 며칠 동안 레스토크를 추격했다. 그러나 실상 그가 쫒던 것은 자신을 아일라우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미끼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네이를 불러들이려 했던 명령은 이미 중간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행군 도중, 우연히 들려온 전투 소리가 그를 움직였고, 마침내 네이는 오후 7시가 되서야 전장에 도착했다. 그는 공세에 나섰지만, 겨울의 7시라면 어둠이 얼마만큼 세상을 뒤덮었을지 알 수 있는 일이다. 네이는 휘하 병력의 소재마저 파악하기 힘들어지자 싸움을 중단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네이는 어둠속에 뒤덮힌 자신의 병사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역시 2월 8일의 이 격전의 마지막 결과에 대해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그의 예상 밖이었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이었다. 그는 승패를 알지 못한 채로 아일라우 근처의 작은 농가에서 잠을 취했다. 낙담한 듯한 모습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술트의 부관 생 샤망스가 자신을 깨워 흔드는 것을 알았다. 그는 러시아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승리라고 하면 승리지만, 지금껏 그에게 있어 이렇게 실감이 나지 않는 승리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것이 통제 불가능이었다. 적이 물러나는것도 두 눈으로 보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을 향해 나선다. 그의 군대에 사상자는 2만 5천여명에 이르고, 러시아군도 그와 비슷하리라. 그는 전장을 둘러본다. 입을 다물지 못할 광경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살육인가! 그러고도 얻은게 없다니!" 나폴레옹은 이렇게 덧붙인다. "평화에 대한 사랑, 전쟁의 공포를 제왕들에게 고취시키도록 잘 짜놓은 광경이로다."
찢겨진 팔다리들이 굴러다니고 있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그저 가만히 누워, 언뜻 보면 평온한 듯한 모습으로 겹겹히 죽어있는 병사들의 모습도 눈에 보인다. 황제를 수행하고 있던 베시에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치 양떼들처럼 늘어져 있군요."
나폴레옹은 바로잡는다.
"사자들처럼이라고 말하시오."
아일라우 전투에 대한 그림으로는 그로가 그린 그림만큼 유명한 것도 없다. 전투의 승리로 인한 군사적 성공, 그리고 은혜에 감복하는 러시아인들의 찬양하는 모습, 차마 황제의 성스러운 신체에 몸을 댈 수 없기에, 말에 기대는 남자. 그러나 여기에는 무엇인가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 위대한 나폴레옹의 옆에서 뮈라는 거의 그림에 한 가운데 위치하여, 전쟁의 참극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예의 그 복장을 하고 있다. 성스러운 황제의 바로 아래에 놓인 시체,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 단발마와 같이 손을 내미는 남자. 그리고 이 모든 찬양과 고통에서 엉거주춤 시선을 돌리는 듯한 황제의 모습.
꿈 보다 해몽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해석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대살육이 지난 며칠 동안, 그는 이례적인 행동을 한다. 『아일라우 전투 관계, 현장 목격자에 의한, 독일어 번역』. 충실하고 선량한 베르트랑은 펜을 잡고 황제의 말을 그 제목의 소책자에 적어놓는다. 신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다하던 베트르랑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칫거린다. 그는 자신이 적은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사망자. 1천 5백명. 부상자. 4천 3백명.
황제는 그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