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각을 죽이는 일을 모두 총괄했던 손준.
자는 자원子遠으로 손견의 동생인 손정의 증손자입니다. 항렬상으로는 황제 손량의 7촌 조카였지만, 손량보다는 24살이 많았습니다. 34살때 제갈각을 암살한 손준은 제갈각이 죽자 제갈각이 맡고 있던 대장군의 직위를 이어받습니다. 또한 주거가 대행하고 있던 승상의 자리 역시 손준이 맡게 되었고, 손준은 군권을 모두 장악하고 부춘후로 봉해집니다.
이 와중에 희대의 악녀 손노반은 또 악행을 저지릅니다. 손노육의 남편이었던 주거는 손홍의 거짓 조서로 인해 죽음을 당했지만, 주거의 아들인 주웅과 주손은 군을 통솔하고 있었습니다만 손노반은 주웅과 주손을 모함해서 이들을 죽여버리죠.
제갈각 암살 이후, 태상으로 있던 등윤은 사직할 뜻을 전합니다. 등윤은 제갈각과 사돈관계로, 제갈각의 3남 제갈송에게 딸을 시집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손준은 등윤의 사직을 반려하죠.
손준 : 곤과 우의 죄는 서로 미치지 않았는데 등후께서는 어찌 사직하려 하십니까?
등윤과 손준의 관계는 서로 소원한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서로 포용하는 척 했던 것이죠. 손준은 등윤을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에 등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직을 반려하고 작위를 고밀후로 승진시킵니다.
(이미지로만 보면 간신이나 히틀러 같지만 기록으로는 상당한 개념인이었고 유능하고 온화로운 행정관인 등윤입니다.)
손준이 등윤보다는 등윤의 명성때문에 그를 그대로 둔 것이었는데, 등윤은 장소와 함께 오의 조정 의례를 정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청렴하고 성품이 온화한 것으로 평가받아 20살에는 공주를 아내로 맞고 30살에는 단양태수가 된 이후 오군, 회계군 태수를 거치면서 직무에 충실하고 공명정대해 칭찬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러한 명성으로 인해 등윤은 이후 태상으로서 제갈각과 함께 손량의 탁고대신 중 한명이 되었고, 손량이 즉위하자 위장군의 직위가 더해집니다. 손량을 보좌하는 작위를 이었던 것이죠.
제갈각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제갈각이 독선과 오만에 빠져있을때 그를 말리는 조언을 합니다.
등윤 : 선제(손권)께서 세상을 떠나고 새 군주(손량)가 제위를 계승했을때, 제갈각 공은 이윤과 곽광과 같은 중임을 받아 조정으로 들어와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강한 적을 꺾어 해내에 명성을 떨쳤으므로 천해에서 떨지 않은 자가 없으며 모든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제갈공에게 의지해 편히 쉬기를 바라는 것이 있었소.(동흥 전투때 위군을 격파하고 한종을 잡아 죽이면서 그로 인해 인심을 얻은 것을 말함) 그런데 지금 갑자기 노역을 크게 일으키고 병사들을 징발해 싸우러 나가면 백성들은 피로하고 국력이 크게 소모될 것이고, 먼 곳의 군주(위나라)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오. 만일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지 못하고 평야에서 싸워 이득이 없다면 이는 전의 공로를 상실하고 책임을 지게 될 것이오. 그러니 병사들을 쉬게 하고 빈틈을 노려 움직이는 것이 합당하오. 전쟁은 중대한 일이고 사람들의 힘에 의지해야만 성공하고 이길수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으니 당신 혼자의 힘만으로 이길 수 있겠소이까?
제갈각 : 다른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안락함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오. 위주 조방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으며 위의 정치는 신하의 손(사마사)에 있으니 위의 신하와 백성들은 사마사에게 반대할 마음이 있을 것이오. 이 전쟁에서 국가의 재력에 의지하고 전승한 위세가 있는데 승리하지 못할 것 같소!
동료였던 등윤마저 이렇게 태클을 걸자 짜증이 솟구친 제갈각은 등윤을 도하독으로 임명해 국내의 일을 맡도록 합니다. 재상급이던 태상직에서 시장급인 도하독으로 좌천시켜버린 것이죠. 하지만 등윤을 불만을 표하면서 일을 내팽개치기는 커녕 낮에는 빈객을 접대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내외의 정보를 취합하고 밤에는 문서를 열람하면서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그리고 제갈각이 합비 신성에서 패전한 이후 제갈각이 손준의 초대에 응했다가 느낌이 이상해 퇴궐하려 하자 등윤은 제갈각이 출전했다가 돌아온 이후 황제를 만나지 않았고 연회를 베풀어 제갈각을 초대했는데 궁궐에까지 이르렀는데도 다시 돌아가면 비례라 말합니다. 만일 궁으로 되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손준의 암살계획이 어그러졌을 수도 있었는데, 등윤은 사정을 모르고 예의에 어긋나니 다시 되돌아가라고 말한 것 덕분에 제갈각 암살이 성공했던 것이죠.
간접적으로 제갈각 암살에 성공시킨 것도 있고, 오랜 지방관 생활로서 행한 선정으로 인해 쌓은 명성때문에 손준 입장에서는 등윤을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손준의 성격이 교만하고 음험해 좋은 명성이 없었고, 제갈각 암살 이후로도 사람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에 한때 제갈각에게 시달렸던 백성들은 손준의 횡포로 인해 손준을 원망합니다. 거기에 손준은 음심이 심해서 궁궐 내의 궁녀들을 간음하는 짓까지 저지르죠. 잘 아시겠지만 궁녀들은 궁궐의 주인인 황제의 후궁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여자들을 건드렸다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 없죠. 하지만 제갈각을 죽이면서 손준은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거기다 권력을 탐하던 손노반과는 서로 짝짝궁이 잘 맞았다가 실제로는 눈까지 맞아 서로 사통하는 관계가 됩니다.
겨우 1년만에 이런 폭정을 저지르자 손준을 제거하려는 음모자들이 속속 출현합니다.
253년 겨울 11월 춘신에 큰 새 다섯마리가 나타나자 손준은 다음해의 연호를 바꾸기로 합니다. 254년 이전의 연호 건흥에서 이해부터는 오봉五鳳으로 연호를 교체하죠. 하지만 다섯마리의 봉황이라는 연호와는 달리 원년부터 자연재해가 밀어닥칩니다. 254년 오봉 원년 여름에 오 전역에 대홍수가 발생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한 것이죠. 민심이 흉흉하던 와중인 그해 가을, 손준 암살 모의가 적발됩니다.
선태자 손등의 장남인 오후 손영이 손준 암살음모가 적발되면서 자살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력의 기록은 이와는 사뭇 다른 기록이 존재합니다. 사건의 시작은 폐태자 손화가 손준과 사통하던 손노반의 음모에 의해 죽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손화가 억울하게 죽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손준과 손노반에게 불만을 표시하죠. 이러한 백성들의 움직임을 알아낸 전사마 환려는 손준에게 불만을 가졌던 장수들과 관리들을 규합해 손준을 죽이고 손등의 차남 손영을 제위에 세우기로 뜻을 모읍니다. 하지만 거사를 실행하기 전 이 계획이 누설되어 주모자인 환려 뿐만 아니라 이 계획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이 붙잡혀 처형당하죠. 그리고 손량 대신 세워질 예정이었던 손영은 이유도 모른채 죽게 됩니다. 손영이 죽고 손영에게 내려졌던 오후의 작위와 그에 따른 봉읍은 모두 취소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손등의 대마저 끊겨버리게 되죠. 거기에 겨울인 11월 혜성이 출현하면서 민심도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이러던 와중 위오 국경이던 장강 북쪽의 북 양주 지역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위나라는 남동전선인 북 양주를 상당히 신경 썼습니다. 조상이 일으켰던 낙곡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253년 촉의 재상 비의가 곽순에게 죽기 전까지는 서부 전선은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그나마도 253년 봄, 강유가 남안을 공격하고 포위했지만 진태가 이에 맞서 낙문으로 나가면서 큰 전투 없이 전쟁이 완료되었지만, 이전까지는 주로 남동전선에서 전투가 빈발했고 동흥 전투는 위가 대패하면서 지휘관을 교체하는 강수까지 두었던 것이죠. 이후 제갈각이 합비 신성을 공격하는 등 위군은 각 전선에 대해서 수비적인 입장을 취하던 와중이었습니다. 이런 북 양주가 동요한 것은 바로 당시 제갈탄과 교체되어 남동전선의 총사령관이던 정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로 있던 관구검과 야전사령관으로 있던 전장군 문흠이 일으킨 반란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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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사람은 당시 사마사의 눈 밖에 난 것도 아니었고, 동흥 전투 이후 위의 가장 중요한 전선 중 하나였던 오와의 남동전선을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반란은 상당히 뜬금 없는 일인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손준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위치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