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교길, 따사로운 햇살과 살랑 살랑 불어오는 봄 바람에 슬쩍 얼굴을 내비치는 새싹들을 보니, 공연히 심통이 났다.
내가 꿈꾸고 있는 일상에서 동 떨어진, 동경만 하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Workerholic같은 생활에 心身이 지쳐서일까?
아니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보이는, 아니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보이는 연인들을 보고 스물 네 번째 맞이하는 봄에
괜시리 저주를 퍼부었다. "비나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난 눈을 매우 좋아한다. 연애는 해본적 없지만, 어느 순간 내 머리속에 각인된 낭만적 이미지가 너무
아름답다. 아주 어린 시절에도 눈과 함께 노는걸 좋아했던걸 떠올려 보면 미디어를 통해 세뇌된 이미지 탓만은 아닌것 같다.
그런데 눈과 더불어 '비' 또한 아주 좋아한다. 지금 살아온 인생의 반도 겪지 않았던, 아홉살 인생 즈음에도 비오는 날이 묘하게
좋았다. 더 어린 시절이야 우비와 장화로 무장한채 물웅덩이를 찾아내 물장구를 치면서 히죽히죽 거렸겠지만, 인생을 九년 살아온
남자는 더 이상 그런 철없는 소년이 아니다. 분명 지금은 잃어버린 형언할수 없는 당시 내가 가졌던 느낌이 있을것이다.
그 소중한 보물같은 감성은 사춘기를 앓고, '서정, 애상, 관조, 사색, sentimental' 따위의 고급스러운 감성의 분류 체계를 익히며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대신 이런 감성 덕분에 나는 다시 한번 '비'를 사랑할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사춘기가 끝나가고 한국
나이로, 더 이상 10대에 머무르지 못하게 된 어느날 나는 술을 배웠다. 스무살이 되고 음주에 대한 국가의 허가를 받은 순간 나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나에게 비오는 날은 공식적으로 소주 마시는 날이었다. 혹은 막걸리나, 구태여 '비'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마실테지만, '비'가 오는 아주 특별한 날은 10대 시기에 감성의 분류 체계를 숙달한 나에게 주어지는 첫 실전 기회였다. 만원 남짓한
돈을 들고 三三五五 모여 주점의 한 모퉁이를 구매하였다. 이 곳에서 우리는 나라의 정치를 비평하는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하였고,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또 때로는 서로의 음주가무를 자랑하였는데, 여기에 별 다른 재능이 없었던 나는
그저 내가 익힌 감성에 대한 이야기만을 내뱉었다. 물론 난 이론만 이야기 하였고 실전(연애)을 행한건 다른 친구들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국가는 나에게 충성을 증명할것을 요구하였다. 애국심이 투철한 열혈 청년은 아니었지만, 국가에 부름에 대해 거부 할
능력도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대략 2년이라는 시간을 국가에게 투자하였다. 이 시기 '비'에 대한 생각은 참 好不好가 극명히 갈리
는데, 훈련병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외가 없었기 때문에 난생 처음 비를 원망하였다. "비오면 전쟁안하냐?" 라는 D.I의 일침을 들을
때마다 비에 대한 내 마음속 증오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 증오라는 괴물이 너무 커져버려서 날 잠식하기 전,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
다. 「 실무부대는 '비'가 오는날 웬만한 작업은 모두 중단한다. 」工兵출신이었던 나에게 '비'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였으며, 중세의 Dark a
ge를 한 줄기 빛이되어 걷어낸 계몽 사상같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인생사 塞翁之馬라고 했던가, 장마철 지나치게 많이 내린 '비'는 이내 배수로를 무너트렸고, 배수로가 무너진 순간 국가에게 하사 받은 나의 신성한 수면권은 훼손 당하고 부정되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 중가장 身을 많이 사용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배운 고급 감성을 사용하여 '비'를 바라볼 心적 여유가 없던 시기였던것 같다.
로맨스 영화를 보는것을 참 좋아한다. 비오는날 둘이서 우산 하나를 나눠쓰기 위해, 우산 없는척 연극을 행하고 가끔 있는 다툼에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슬픔을 토로하고, 참 낭만적이다. 하교길 주륵주륵 쏟아지는 비를 혼자서, 우산 하나 떡 하니 차지한채 집을 향한 발걸음을 옮기는데, 우산 하나를 나누어 쓰고, 사랑도 나누는 연인들이 내 눈에 비친다. 내 우산 위로 들려오는 뚝뚝뚝뚝 소리를 들으며 이내 마음을 추스리고 중대한 결정을 하였다.
앞으로 남은 1년간 훌륭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슬슬 준비해야겠다.
Ps. 내 마음 속 비는 언제 그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