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명왕성은 너무 멀어서 어둡다. 그리고 춥다. 그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사느냐고 말을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 곳에서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객관적인 생각은(어불성설이지만 최대한 감정을 빼고 얘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사람이 좋다’는 말로 대변할 수 있다.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사람을 좋아했다. 내가 아버지를 닮은 것은 외향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런 섬세한 성격과 자상함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 나는 우리 집의 비극과, 아버지의 비극은 아버지의 이러한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작은 사업을 하셨다. 사업이라 적어서 위에서는 ‘도산’이라는 표현을 썼다만 어렴풋이 알기로는 ‘그릇 도매상’ 일을 하셨던 것 같다. 컨테이너 하나를 개조해서 어느 부지에 갖다 놓고 그릇 도매상을 하셨던 것 같은데 예전에 어머니 말씀으로는 ‘진짜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팔렸다’고 하시니 그렇게 알 수밖에 없다. 보증을 서고서 이내 사업을 말아먹고는 아버지는 늘 술독에 빠져 사셨다.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싫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헤어지기로 결심을 한 것은 아버지가 사업을 실패해서가 아니었다. ‘다시 일어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기에 헤어졌다고 한다. 물론 그것 외에도 좀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아버지는 확실히 ‘재기’에 대한 노력이 미비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아버지의 성향에 있다고 본다. 섬세하고 자상했던 만큼 누구보다도 여리고 약한 분이셨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아마 아버지는 자신의 실수로 사업이 망하고 가족들이 힘들게 살아야만 했던 것에 대한 자책감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한 자신이 너무 싫어서 현실을 도외시하고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을 해본다. 나에겐 이 추측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이 있다. 그만큼 아버지는 여린 분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가족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아쉬운 것은 ‘왜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정말로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의지가 절실하지 않았기에 무언가를 시도하고서는 이내 관두기 일쑤인 게 문제이긴 했다만. 이는 아마 지난날의, 첫 사업에 대한 영광을 계속해서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튼 아버지는 술에 빠져 몸을 망가뜨리게 되었고 갖은 성인병과 합병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술도 모자라 노름에 까지 손을 대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이 과정에서 정말로 죽고 싶었다고 진술을 하실 정도니 그 실상이 어떠했을지 섣불리 상상이 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아버지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고 그 마음이 정말 간절했었을 것이라는 정도다. 어렸을 때 나는 그런 아버지의 자상함이 좋아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좋아했다. 형은 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더 좋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니 닮은 사람은 닮은 사람끼리 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잠깐 가정이 화목했을 때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온 날이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타박을 주곤 하셨다는 데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를 감싸 안으며 ‘아버지 혼내지 말아요’라고 어머니에게 따졌다나 뭐라나.
지독할 정도로 몸이 망가진 상태라서 내가 고등학교 진학을 한 이후에는 고모가 ‘너네 아버지 언제 돌아가셔도 안 이상한 상태니까 그래 알아 둬’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몸을 스스로 망가뜨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어머니와 형은 따로 다른 집에서 살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고모 댁에 살게 되었다. 앞서 말했지만 부모님은 이혼을 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다른 일을 하기에는 몸이 너무 안 좋아 고모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고모는 작지 않은 독서실을 운영하고 계셨기에 나와 아버질 받아주셨고 아버지는 독서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서 이전과는 달리 열심히 공부를 했다. 어느 정도는 아버지도 나를 보면서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셨겠지만 이미 한 가지 일에 정진을 하기에는 술에 심하게 중독되어 있었다. 물론 안 마시려고 노력도 많이 하셨지만 노름을 하면서 만난 인간들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또 ‘사기’를 당해 울분이 터져 다시 종종 마시러 다니게 되었고 고모도 아버지를 보며 많이 힘들어 했다. 역시 그 때의 나는 여전히 철이 들지 않은 상태였던지라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도 싫었고 미웠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누가 아빠더러 이것저것 해 달래요? 딴 거 말고 그냥 독서실에서 얌전히 좀 있어요. 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제발 다른데 가서 술 마시고 오지 말고 여기에 좀 있어요!’라며 크게 따졌는데 아버지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실 뿐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독서실 방 한 칸을 개조해서 아버지와 내가 쓰게끔 만들고서 아버지는 그 작은 방에서 나의 모든 것을 챙겨주셨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는 어머니를 대신해 나를 키우셨다. 아침에 날 잔소리로 깨우고 꼭 밥을 먹게 했다. 가끔 가다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얘기를 하면 아버지는 무척이나 신나하며 내가 먹고 싶다는 것을 꼭 해주셨다. 그 때만 해도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을 줄만 알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아버지와 함께 고등학교 근처의 월세방에서 살게 되었다. 독서실 운영이 어려워져 고모가 독서실을 포기하자고 하셨기에 나와 아버지는 그 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고3이라는 민감한 시기를 나는 참 역동적으로 보냈던 것 같다. 독서실에서 나왔으니 뭐라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아버지는 의욕을 냈지만 나는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역시나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밤에, 집에 계시지 않게 되었고 몇날 며칠을 연락 한 번 하지 않다가 어쩌다 들어오면 술에 만취해있는 상태였다. 사우나에서 쓰러져있다는 아버지를 데려가기 위해 몇 번을 새벽에 일어나야 했고, 거지 소굴보다도 더 심각한 집에서 펑펑 울었다. 주말에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 다 치워가며 청소를 마쳐도 며칠이 지나면 집이 다시 만신창이가 되어있다. ‘술을 마셔도 곱게 마시지 왜 집안을 이렇게 만드는 거냐’며 부던히도 혼자서 울어보았지만 그럴 때면 이미 아버지는 집에 계시질 않았다.
대학교 합격이 발표 되고 나서 나는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돌아갔다. 합격 소식을 알리고자 아버지를 찾아가 차갑게 말을 걸었다. 그 날도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고 나는 아버지에게 대학 합격 소식을 알렸다. 아버지는 소식을 듣고는 주사를 부리며 ‘야이 자식아, 그게 다 이 아빠 때문이야, 어? 네가 알아? 어? 아빠가 어? 널 임마, 널 진짜 임마.. 널 임마.. 널 공부시키려고 임마! 다 이러는 건데 왜.. 대체 왜..’라고 흐느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 그 소식만 알리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버렸다.
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나서 서울에 살면서 아버지의 소식은 간간히 형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고모 댁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가버리게 되어서 옆에서 챙겨줄 사람이 없는 관계로 고모가 다시 아버지를 거두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아버지의 증상은 더욱 악화되어 혈액투석을 하게 되었고 많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가끔씩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면 아버지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곤 하셨는데 여전히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믿고 싶은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와서는 학교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자주 찾아가지 않았고 가끔 가게 되어도 약속 핑계를 대며 짧은 시간만을 투자할 뿐이었다. 그 잠깐의 만남이라도 아버지에게는 힘이 되었나 보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나 보다. 아버지는 내가 오면 정말로 기뻐하셨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예전의 악감정을 모두 떨쳐낼 수 있었다.
군대를 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를 뵙지 않았다. 전화로 말씀을 드렸는데 말씀으로는 괜찮다고 해도 내가 찾아가지 않아 서운함을 느끼는 아버지의 기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끝내 찾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 괴로워질 것 같아서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입대하는 날 나는 무척이나 불안했다. 입대에 대한 불안감은 절대 아니었다. 웃으면서 어머니에게 다녀오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 때의 불안감이란 어쩐지 아버지의 신상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쓸 데 없는 생각이라며 입대 직전에 그 순간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리지 않고 가버렸다. 군대에서의 생활은 누구나가 힘들었겠지만 나는 휴가를 제 때 나갈 수가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상병이 되기 전까지 휴가 일수를 합쳐도 10일이 안 되었으니 그 상황을 알만하다. 군대에서 아버지에게 간간히 전화를 하면 아버지는 반갑게 내 전화를 받아주셨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언제 면회를 가겠다며 얘기를 하셨지만 부대 사정을 핑계로 오지 말아달라고 말을 했다. 결코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무리해서 오시는 고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오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기에 나는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 상병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정을 잡았다. 나는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그 면회 때 아버지와 최대한 있을 만큼 옆에 있어주지 않은 것을. 그리고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지 않았던 것을. 면회를 와서 아버지와 식사를 하고, 당시에 쓰던 안경이 부러져 아버지가 나에게 새 안경을 맞춰주셨다. 그 때만 해도 이 안경이 아버지의 유품이 될 줄 알았겠는가. 안경을 받고 나는 아버지에게 더 있어봐야 할 것도 없는데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재촉을 했다. 몇 시간의 여유가 더 있었지만 더 늦어서 집으로 돌아가면 어두워질 것 같아 밤길에 익숙지 않은 아버지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아니다,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아버지를 대하기가 어려워서, 그 상황이 어색해서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많이 섭섭해 했지만 이내 나를 웃으며 부대 안으로 들였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이때를 후회하는 것은 살아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업무를 하고 있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컴퓨터를 상대로 씨름을 해가면서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중대장이 급하게 나를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저.. 그러니까 ○○아, 그.. 놀라지 말고 들어라. 집에서 너희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는데, 그.. 너희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하네.’
‘....네’
‘아버지 돌아가셨으니 상을 치러야 하잖니, 빨리 군장 싸. 아니다, 군장은 애들 시킬 테니 너 빨리 전투복 갈아입어라. 바로 집에 갈 준비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 날은 아침이 맛있어서 요즘 군대 짬밥 먹을 만하다며 후임들에게 농담을 건넸고, 저녁에 동기들과 냉동식품으로 조촐한 파티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날 하루는 그냥 무난한 날이었는데, 그냥 전역을 향해 나아가는 하루에 불과했는데, 뭔가 어긋나 버린 느낌이었다. 전투복을 갈아입으면서도 머리 속에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넋이 나간 인간처럼 시키는대로 할 뿐이었다.
부리나케 북대구역에 도착을 하니 미리 와 있던 어머니와 형의 모습이 보였다. 자세한 상황을 들을 새도 없이 차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란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어머니가 천천히 입을 여셨다.
‘...안 그래도 이틀 전에 병원에 입원은 했다고 들었는데 늘 있는 일이었잖아. 근데 갑자기 그런 거야.’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비로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형에게 따졌다. 왜 돌아가시고서야 전화를 했냐고, 아버지 입원했을 때는 내버려 두었다가 왜 돌아가시니까 전화를 하냐고. 상태가 심각했다면서, 이번에는 특별히 아파했다면서 왜 이제야 연락을 줬냐며 나는 형에게 따졌고 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형한테 너무 그러지 말아라. 네 형 딴에는 네 신경써준다고, 괜한 사실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다. 이렇게 가버릴 줄 알았으면 미리 말 안 했겠냐. 네 형도 지금 당황스러워한다, ○○아 그러지 마라 제발.’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식장에 들어서니 초점 없는 아버지의 눈빛을 영정 사진에서 볼 수 있었다. 아아, 진짜로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이제는 내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구나. 이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구나.
하관식이 끝나고 묘를 다 다듬고서 나와 형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울면서 아버지에게 잘 해드리지 못했던 것을, 잘못했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와 형과 나는 셋 다 울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후 5년을 가까이 전화한 번 하지 않았던 어머니도, 두 분이 싸울 때면 꼭 어머니 편만 들던 형도, 아버지에게 불효막심한 일만 저지르던 나도 모두 울었다. 울면서 다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잘해야겠다고, 이제는 정말로 열심히 해야겠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나는 비로소 철이 들 수 있었다. 남은 가족에게 만이라도 잘 해야겠다고 그 날 몇 백번을 다짐했다.
5. 태양 아래 밝아 있는 금성과 화성. 화성의 아이가 명왕성을 그리워하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오히려 아무 일 없는 듯이 모두들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약골이신 어머니는 형과 나의 권유를 받아 열심히 체력 단련과 직장 생활을 병행하고 계시며, 형은 늘 하기 싫고 힘들다며 울상을 지으면서도 열심히 직장을 다니고 있다. 나는 그 후로 부대에 별 일없이 잘 복귀해서 전역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2010년, 지겨웠던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드디어 사회로 나왔다. 사실 아직도 적응을 못한 부분이 많다. 느낌은 ‘제일 어리던 + 새내기 대접만을 받던 1학년’을 갓 지난 2학년이 된 기분인데 현실은 20대 중반이라는 무게감과 더불어 쏟아지는 과제와 학과 공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징징거릴 수밖에 없는 게 아버질 닮아 외로움을 잘 타고 사람 좋아하는 내가 이번 학기에 들어서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제일 문제이기 때문이랄까. 내가 정말로 소중히 생각하는 친구들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서 쉽게 만날 수가 없는 상태이고, 학과 생활에 충실히 하면서 동아리 없이 지내다 보니 동기만이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전부였는데 그들은 지금 졸업반이라는 타이틀과 군대라는 현실에 역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다. 외롭고 쓸쓸하다. 사람이 그립다. 정겹게 사람을 만나서 별 생각 없이 신나게 수다를 떨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기분이 풀린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마냥 예전처럼 놀 수만은 없으며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역시 나를 늘 도서관에 자리 잡게 만든다. 적응을 못했다는 것은 비단 이런 부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생각 없이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다가 점원이 가격을 말했는데 다시 얘기를 해달라고 ‘잘못 들었습니다?’라고 반문 했던 내 자신을 떠올리자니 쪽이 팔리다 못해 죽을 지경이다. 후배라고는 구경 한 번 하지 못하다가 느닷없이 세 학번을 내리 후배로 알게 되었으니 어안이 벙벙하다. 그리고 어딜 가도 결코 ‘2학년’으로 대접받지 못하며 ‘07학번’의 어떤 선배로만 사람들은 인식한다. 아무래도 좋다, 이런 건 굴곡 많았던 가정사에 비하면 웃으면서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소소한 고민에 불과하다. 어머니는 나에게 어머니이자 동시에 제일 좋은 친구다. 어머니가 자주 ‘나랑 얘기하고 놀 수 있는 딸내미 한 명 있으면 참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셔서 그런지 내가 그 딸 역할을 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기운이 빠지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께 전화를 건다.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늘 하루도 힘을 낸다. 우리 가족은 열심히 살고 있다. 다소 무심하리만큼 아버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미안한 부분이지만, 가끔이라도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나는 상념에 잠긴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떠나시면서 우리 가족이 서로를 챙기며 살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가족들을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주었다고나 할까. 집에서 나 하나 잘 되기만을 바라고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어머니와 형을 생각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고민이나 상황 역시도 사치일 뿐이다. 이런 소소한 고민 따위 실컷 즐기면서 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개인의 가정사를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인문학 글쓰기의 학우들이 있으니까 앞으로 더 좋은 인연과 만남을 이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혼자만의 기대를 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