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편에서 김방경이 처음 받은 병력이 60명이랬는데 동사강목에는 6천이라 돼 있네요 -_-a 흐음... 왠지 60명 쪽이 맞아 보입니다.
임유무가 죽은 후에도 고려와 몽고 사이의 긴장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습니다. 수십년 동안 항전했던 고려가 언제 또 등을 돌릴 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요. 최탄의 반란을 이용해 동녕부를 설치했을 때, 몽고 내부에서도 여러 논의가 있었습니다.
마형은 "고려는 한과 진에서 모두 군현으로 삼았다. (한사군 -_-a) 지금 조회하고는 있지만 속마음은 모른다. 그러니 일본에 쳐들어간다는 명분으로 길을 빌리면서 점령해 우리의 군현으로 삼아야 한다."
... 가도정일인가요. 다만 그는 지금은 때가 아니니 고려가 말 잘 들으면 봐 주고, 남송을 완전히 평정한 후에 고려가 다른 마음을 품으면 정벌하자고 주장합니다.
반면 마희기는 이렇게 말 합니다.
"지금의 고려는 옛날의 신라ㆍ백제ㆍ고구려 세 나라를 통합한 나라입니다. 대체로 번진은 권한이 분산되면 제어하기가 쉽고, 제후가 강성하면 신하로 삼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니 저들 주와 성의 군사의 많고 적음을 조사한 다음 이들을 분리시켜 둘이 되게 하여 나라를 나누어서 다스리게 하되, 두 나라의 권력과 세력이 서로 엇비슷하게 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 뒤에 서서히 고려를 도모할 계책을 의논한다면, 쉽사리 조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를 둘로 나누자는 거였죠. 이는 나라를 쪼갠 건 아니었지만 후에 요동에 심양왕을 만들면서 현실화 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견제가 뒤따릅니다. 고려는 늦게 항복했으니 제왕(諸王)보다 아래라면서 무시했고, 여러 다루가치를 파견해서 고려의 상황을 엿보았으며, 세자 왕심을 공주와 결혼하게 해 달라는 청에도 거부했죠. 서경은 인질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서경을 돌려받고 싶으면 제대로 하라는 거였죠. 고려로서는 쌍성총관부라면 모를까 동녕부를 그대로 둘 수 없었구요.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이 남의 땅에 있으면 정통성에 어마어마한 타격이 가해지는 거니까요. 거기다 강화도에 남아 있던 백성들 역시 개경이 아닌 서경, 동녕부로 옮기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는 쿠빌라이 칸이 명령한 일본 정벌 준비를 빨리 해야 했습니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 삼별초의 난이 터진 것이죠.
원종이 세자 왕심을 보내 삼별초의 난을 알리고 동녕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던 8월, 삼별초는 진도에 안착합니다.
진도의 위치는 정말 좋았습니다. 우선 서해와 남해의 경계에 있어서 어느 쪽으로든 손을 쓸 수 있었고, 이런 서남해안의 섬에는 최씨 정권의 사유 농장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크게 어렵지 않게 삼별초에게 접수되죠. 거기다 남부지방의 조운은 무조건 진도를 거쳐야 했습니다. 삼별초가 닻을 내린 곳은 벽파진, 명량해전이 벌어진 바로 그 곳입니다. 이는 곧 중앙 정부로 가는 세금길을 끊는 것이었죠.
벽파진 자체의 위치도 좋아서, 그 포구 한 곳을 빼면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삼별초는 이 산을 따라 용정산성을 짓고 그 안에 궁전을 지어 우주방어 체제를 완료하죠. 해전에 있어서 고려에서 그들보다 나은 이들은 없었을 것이고, 진도 앞바다는 그 유명한 울돌목이었구요.
그들은 진도에 웅거한 후 남부지방 곳곳을 공격합니다. 이 때 전라도 안찰사에게 황제의 명령이라 하고 곡식을 진도로 옮기게 하는데, 이게 먹혀들었죠. -_-; 아직 삼별초의 난이 알려지지 않은 건 아니었을 것이고, 진도에 들어간 게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삼별초 내에는 몽고어를 잘 아는 신의군이 있었으니 "황제의 명령"이라는 어마어마한 말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 어쩄든, 덕분에 군량이 모였습니다. 경상도에서도 혼란이 퍼져서 김주(김해)수(守) 이주가 도망가 버릴 정도였죠.
고려의 첫 반격은 장군 양동무와 고여림이었습니다. 고여림은 바로 그 삼별초 출신의 장수로, 김준을 죽일 때 활약했던 장수였습니다. 그는 이제 옛 전우를 토벌해야 했죠.
하지만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고, 삼별초는 역공을 펼쳐 (관군이 전멸했다고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패했을 걸로 보입니다. 혹은 관군은 바다를 건너지도 않았고 삼별초가 선공을 걸었을지도요) 관군 20명을 죽이고, 도령 윤만장을 사로잡았으며, 약탈을 학 돌아갔죠.
이어서 토벌을 명령 받고 갔던 전라적토사 신사전은 적을 공격하기는커녕 삼별초가 나주로 온다는 말을 듣고 달아납니다. 전주 부사 이빈도 같이 달아났으며, 이 때문에 잘립니다. -_-; 참고로 그가 삼별초를 칠 준비도 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물으니 이렇게 답 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적을 격토하여 성공한들 다시 무엇이 되겠는가?"
... 아 예.
삼별초는 이 틈을 노려 전라도 각 지역을 공격합니다. 여러 지역이 점령됐거나 항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그냥 약탈만 하고 돌아갔거나요. 전라도 내의 병력을 모았을 걸로 보이는 토벌군은 이미 와해됐고, 전라도는 어렵지 않게 점령될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나주였죠.
이 두 사람의 로맨스는 고려 내내 참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네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나주 토박이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냥 생각해 보면 수령은 싸우자는 쪽일 거고, 향리들은 항복하자고 했겠죠. 헌데 나주에서는 정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나주부사 박부가 어찌할 지 결단을 못 하자, 향리 정지려는 이렇게 꾸짖습니다.
"성에 올라 굳게 지키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산골짜기로 군사를 피할 것이지 무슨 면목으로 수리(장관)로서 나라를 저버리고 적을 좇으시오?"
그래도 박부가 제대로 나서지 않자 사록(정 8품) 김응덕이 사람들을 모아 금성산(나주 진산)으로 향합니다. 그는 가시나무를 꽂아 방책을 만들었고, 군졸들을 격려해 삼별초에 맞서 싸우죠. 전투 중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맞서 싸웠고, 무려 일주일을 버팁니다. 이어 적이 물러나자 배를 타고 진격해 1척을 노획했다고 합니다.
장화왕후의 고향, 왕건이 왕이 아닐 때부터 그를 따랐던 어향御鄕 나주, 이 곳이 근왕을 외치며 버팀으로써 쓰나미처럼 기세등등했던 삼별초의 활동에 큰 제약이 걸립니다. 다만, 그들이 이렇게 버티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죠.
나주를 포위하던 삼별초는 병력을 쪼개 북진해 전주까지 공격합니다. 버티다 못 한 나주 사람들이 전주에 사람을 보내 항복할까를 의논하니 전주에서도 망설였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김방경은 휘하 병력도 버리고 쏜살같이 내려가 전주에 직접 쓴 편지를 보냅니다.
"아무날까지 1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에 들어갈 것이니, 곧 군량을 준비하고 기다리라"
이 말을 들은 전주는 항복 대신 항전을 택했고, 이 편지를 나주에 보내니 나주에서도 끝까지 싸웠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된 삼별초는 후퇴합니다. 이렇게 삼별초는 세력 확장의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이후에도 그들은 바다의 섬들을 점령했지만 섬이었을 뿐, 육지로 나갈 시도를 못 하게 되죠. 이 때 남해도에 있던 유존혁의 병력이 김해를 쳤지만 역시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제 남은 건 버티기 뿐이었죠.
반면 고려에서도 이들을 토벌할 준비가 미처 되지 않았습니다. 초반에 보냈던 병력이 와해됐고, 김방경과 같이 온 몽고 장수 아해와 합친 병력이 1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아해는 고려가 어떻게 나오는지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장수로 휘하 병력도 1500에 불과했죠. 이런 상황을 보면 김방경이 데리고 온 병력은 거의 몽고군으로 계획적으로 온 것이라기보단 기존의 토벌군이 맥을 못 추고 삼별초가 전라도를 치자 급히 온 것으로 보입니다.
전라도가 먹히느냐 아니냐의 아슬아슬한 싸움은 끝납니다. 이제 고려+몽고군과 삼별초 간의 명량 해협을 사이에 둔 일전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