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고려의 방어선은 안북대도호부 휘하의 안수진, 안융진 등, 즉 현재의 안주와 개천을 중심으로 한 청천강 방어선이었습니다. 예~전에 병자호란에서 했던 얘기가 기억나실 지 모르겠네요. 해안가의 남로와 내륙의 북로, 편하게 오는 길은 이거밖에 없었죠. 거란이 선택한 건 북로였습니다.
이 때 거란이 자처한 병력은 무려 80만, 하지만 -_-; 전후 사정을 보면 뻥이죠 (...) 어쨌든 이들에게 봉상군, 후에 귀주(귀성)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급사중 윤서안이 이끄는 선봉이 패하고 그도 사로잡힙니다. 이 때 성종은 직접 안주까지 나와서 작전을 보고 있었죠. 일단 패배 소식을 들은 성종은 서경으로 귀환합니다. 왕 잡히면 안 되니까요. 고려도 보통 일이 아니다는 걸 확실히 느끼게 됐습니다. 이런 가운데 소손녕의 사자가 도착합니다.
"대조(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 하였다. 또 글을 보내 말하기를, “대조가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은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어익후 말은 좋군요. 이에 화친의 가능성을 성종에게 알린 장수가 있으니...
서희입니다. 이 말은 들은 성종은 이몽진을 거란의 진영으로 보내 화친을 청합니다. 여기에 대한 소손녕의 답은 항복하라는 거였죠.
"80만의 군사가 다다르리라. 만약 강(대동강)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모두 멸할 것이니, 군신이 빨리 진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휘유 -_-; 무시무시하죠? 고려 조정은 더 무서워 했습니다. 여러 가지 방안이 나오죠.
- 일단 개성으로 돌아가서 정식으로 항복하자
- 평양 이북 땅 떼 주고 황주를 국경으로 하자
한 마디로 고려의 상황은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_-; 아예 서경이라 하던 평양 자체를 떼 줄 생각이었나 봐요. 성종도 그 쪽으로 기울어서 아예 평양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가져가게 하고, 남은 건 그냥 대동강에 버리려 했습니다. 이 때 나선 사람이 있었죠.
서희요.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싸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승부는 군사의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요, 다만 능히 틈을 보아 움직이는 데 있을 뿐인데 어찌 대번에 쌀을 버리도록 하십니까. 하물며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이니, 차라리 적군에게 이용되었으면 되었지 헛되이 강물 속에 버리는 것은 또한 하늘의 뜻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이어 그는 말 합니다.
- 거란의 동경부터 우리나라 안북부 수백리 땅은 여진에게 점령돼 있는 우리 땅이다. 거란의 목표는 여기 뺏는 거다. 고구려 옛 땅? 지... 아니 그냥 놀고 자빠진 얘기다.
- 지금 쟤네가 힘 세다고 땅 떼 주면, 남은 땅은 어쩔 건데? 삼각산 이북(그러니까 현 서울 이북)도 다 고구려 옛 땅인데 달라면 다 줄라고?
이어 민관어사 이지백이 그 삼국지의 유선 -_- 에 빗대 이 할지론을 비판합니다. 결국 성종은 마음을 고쳐 먹죠. 한편, 좋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기다리다 지친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하는데 중랑장 대도수가 막아낸 것이죠. 성에서 볼 수 있듯 귀순한 발해인입니다. 거란에서도 항복한 발해 출신이 잔뜩 있었다 하니 -_-; 거 참 기분이 복잡했겠네요. 아무튼 이걸로 거란군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제 남은 건 역공이죠. 병력은 필요 없었습니다. 성종은 사람 한 명만 보냈죠.
서희요. (우려먹기 orz)
이렇게 한국사에 참 보기 드문 키배, 아니 외교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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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 직접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보낸 서희, 그는 거란의 진영에 가자마자 신경전을 시작합니다. 그냥 대등하게 행동한 서희를 보고 소손녕은 이렇게 말 했죠.
"동작 그만! 감히 대국의 귀(貴)인에게 예절 안 차리냐?"
서희는 재치 있게 답 합니다.
"니가 왕이라도 되냐? 나도 신하고 너도 신하면 동등한 거지 어따 대고 눈을 시프렇게 뜨고 그라냐이? 난 그냥 돌아가 불련다. 쫄리면 다이하시든가."
그렇게 아예 돌아가 버린 서희 -_-; 결국 먼저 gg 친 쪽은 소손녕이었죠. 다시 회담이 시작됩니다.
소손녕 : 느덜은 신라에서 일어났지 않았는가? 근디 감히 고구려 옛 땅을 치는 것이여? 거기다 우덜이랑 국경 맞대믄서 감히 송을 섬긴다고라? 나가 열 안 받게 생겼는가?"
... 에 왜 계속 사투리가...; 아니다 싶은 부분 있으면 조언해 주세요 (...) 아무튼 서희는 이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따 대고 약을 팔어? 고구려의 후계는 바로 우덜이여. 나라 이름을 왜 고려라 했고 평양이 수도인데 이게 고구려 후예 아니면 또 뭐당가? 따지고 보면 느이 동경도 우리 땅이랑께."
... 명분 싸움 승리 _-)v 실제 고려의 입장에서 거란은 옛 고구려의 땅을 강점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발해는 당연히 우리 땅인 고구려의 땅을 강점한 괴뢰 정권"이고 (현재의 북한처럼요 (...)) 글안(혹은 계단이라고 썼습니다. 글안이라... 왠지 경상도 사투리 같네요. -_-; 하긴 신라어가 꽤 큰 영향 미쳤겠죠)은 그 발해도 없애고 역시 땅을 강점한 적일 뿐이었죠.
어버버거리는 소손녕에게 서희는 다른 얘기를 시작합니다. 명분에 가려진 본론이었죠.
"솔까말 우리끼리 싸울 이유가 어디 있음둥? 다 여진 놈들이 나쁜 거지비. 우리 둘 사이를 막고 있는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 옛 땅 돌려줘서 두 나라가 연결되면 우리가 조빙(외교)하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음둥?
이에 소손녕은 요 성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철수합니다. 서희는 7일간 거란 진영에서 환대를 받고 돌아오고, 성종은 시중 박양유를 거란에 사신으로 보내며 이 일을 마무리 짓죠.
이 때 서희가 돌아와서 성종에게 보고한 내용이 좀 특이합니다.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즉 서희는 압록강 이북까지 탈환할 명분을 얻었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성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요나라가 꽤나 넓었지만, 유목민의 특성상 대부분의 땅은 간접 지배로 만족해야 했고, 특히 이 때 만주부터 한반도 북부를 할거하던 여진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을 몰아내고 영토로 삼는 것에 대해 고려에 우선권을 준다는 것은 확실히 합의된 사항입니다. 문제는 어디까지냐는 것이죠. 서희는 이를 동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압록강 북쪽까지도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성종은 거부했죠.
따지고 보면 이건 합의를 넘어 "공식화"에 가깝습니다. 이미 요와 고려는 부지런히 발해 부흥 세력과 여진족을 흡수하거나 내쫓으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고, 곳곳에 성을 쌓아가면서 그걸 공고히 하고 있었죠. 결국 이 문제는 불분명한 두 나라의 국경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요가 압록강 부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서희의 주장은 타당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종이 너무 약하게 나간 것이죠.
다만 이후 여요전쟁의 전개와, 지금 당장은 모르더라도 거란이 계속 보여준 압록강 유역에 대한 집착을 본다면 설령 서희의 계획이 됐더라도 그 후까지도 제대로 지배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강은 좋은 방어선이고, 무작정 뻗어서 거란을 자극하는 것보단 최대한 안전하게 얻을 수 있는 것만 확보하는 게 맞긴 하니까요. 당시 거란은 고려의 북진에 맞서 압록강 이북에 계속 성을 쌓고 있었으니까요.
어느 쪽이든 이 1차 침공의 결과는 요나라에서 영토를 할양받은 게 아닙니다. 압록강 남쪽에 대한 고려의 지배를 요에 인정 받은 것이죠. 그리고, 서북쪽의 국경이 압록강이 된 것은 이 때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 보면, 거란은 고려의 확장을 압록강 이남으로 제한한 것을 오히려 성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최선의 결과야 고려 전체의 항복이겠지만요. 하지만, 그 후에 이게 크나큰 실수라는 것을 알게 되죠.
이렇게 고려는 거란에 이 지역의 지배를 보장받았고, 실질적인 지배를 위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994년)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장흥진ㆍ귀화진 두 진과 곽주(정주)ㆍ귀주(귀성) 두 주에 성을 쌓았다.
(995년) 이해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ㆍ흥화진 두 진에 성을 쌓게 하였다.
(996년) 이해에 서희가 선주(선천)ㆍ맹주(맹산) 두 주에 성을 쌓았다.
이 강동 6주는 이후 거란의 공격을 막는 최고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이건 조선까지도 이어지죠. 거란도 고려가 이렇게 빨리 완성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한 사람은 서희였습니다. 아마 여요전쟁 최고의 영웅을 꼽으라면 바로 서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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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대략 이 쯤 됩니다. =_=a 참고로 병자호란 얘기에서 넣은 서북의 모습입니다.
음... 흥화진과 용주는 좀 서쪽으로 가야겠네요. -_-; 아무튼 이 강동 6주가 거의 그대로 이어진 걸 볼 수 있죠. 강동 6주는 고려가 이 지역에 새로 세운, 상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개발을 해서 완전히 우주방어를 이루죠.
문제는 대몽항쟁 때나 호란 때는 제대로 활용을 못 했다는 거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