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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0/24 01:25:37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4) 위화도 회군
안녕하세요. 첫 글 쓰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구요 (__) 첫 글인데 너무 길고 어려운 거 같아도 재밌게 봐 주세요.
... 는 개뿔. ( - -)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버전의 ver이 아니라 노래 몇 절 할 때 verse의 ver이예요! 기회를 놓치긴 싫은데 바꾸기는 또 싫어서 요렇게 ( - -);;;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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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 자이언츠라는 말로 시작하는 모든 분들, (꼴런트 빼고-_-) 올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__) SK와 삼성 멋진 한국시리즈 기대할게요.
아 이게 아니고 -_-;
1. 정도전과 이성계
... 왜 또 나오셨지 -_-;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재밌는 게, 마냥 까려고 만든 말일 수도 있는 게 현대에 들어와서는 뽀대 나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이 말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방원이 그가 불충하고 방자했다는 근거로 만든 말일 수도 있는데, 그가 조선의 시스템을 만든 건 사실이고 언제나 선두에 서 있던 것도 사실이죠.
그 역시 이색 문하에서 배운 신진사대부의 하나였습니다. 이인임이 정권을 잡은 후 북원과 다시 화친하려 하자 반대했고, 원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라는 말에 반발해 "죽이든가 명나라로 보낼 것이다"고 맞섰습니다. 당연히 귀양 가죠. 이인임 등이 그를 달래려고 유배를 풀려고 하자 "나나 경 시중(경복흥)이나 나라 위하는 마음은 같다. 한 번 명령이 나온 걸 어찌 취소하겠느냐"면서 자기 발로 유배지로 갑니다. 그냥은 안 가네요. -_-;
그가 남긴 충격 덕분인지 신진사대부들은 거세게 저항했고, 이인임의 목을 베라는 말까지 나오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습니다. 이후엔 비교적 조용했죠.
흔히 정도전의 민본주의를 얘기할 때 이 시기에 많이 주목합니다. 그가 백성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생활상을 알게 되었다는 거죠. 일단 죄를 용서받긴 했는데, 그 대신 개성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정치행동이 금지된 거죠. 하지만 그는 굳건히 맞섭니다.
대신 그가 했던 것이 학당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제자를 키우면서 그의 사상을 널리 퍼뜨리려 한 거죠. 하지만 그걸 가만 두고 보겠어요. -_-; 자리를 잡을 때마다 권문세가들이 사람을 시켜서 깨뜨리고 쫓아버립니다. 세 번을 이사했다고 하죠.
어느덧 나이는 사십줄에 들어선 그. 결단을 하게 됩니다. 역사를 바꿀 결단이었죠.
정도전이 일찍이 태조를 따라가 군사의 대오가 정비된 것을 보고 나아가 은밀히 말하기를,
“장합니다. 이 군사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도전이 말을 돌려 말하기를,
“왜놈을 쳐서 동남을 평정한다는 말입니다.” 하였다."
때는 1383년. 그렇게 그는 역사를 직접 움직이려 했습니다.
+) 앞으로 언급할 타이밍이 없을 것 같아서 일화 하나. 그는 다른 신발을 짝짝이로 신어도 "왼쪽 사람은 왼쪽 발만 볼 거고 오른 쪽 사람은 오른 쪽 발만 볼 거니 괜찮다"고 했다고 합니다. 귀차니스트인지 대인배인지 -_-a
+) 한편 정몽주는 크게 저항하지 않고 관직에 계속 있는데, 역시 미움을 받긴 해서 어려운 일을 많이 맡게 됩니다. 근데 다 성공하죠. 정도전이 관직에 다시 나서게 된 것도 84년에 정몽주가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픽업했을 때였죠. 9년동안 백수로 살았네요. 아무튼... 그 둘의 차이는 이 때부터 크게 드러났죠.
2. 요동 정벌
다시 원래 하던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최영과 이성계라는 투톱 체제. 우왕은 최영을 최대한 자기 편으로 두기 위해서 그의 서녀를 비로 달라고 요구합니다. 최영은 반대하지만 결국 이루어지죠. 늙긴 했지만 최영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문제는... 명나라였죠. 그 동안 홍무제 주원장은 조선에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쓰면서 협박합니다. 이건 조선 건국 후에도 계속되죠. 계속 들어주던 고려, 하지만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 공민왕 때 탈환했던 철령 이북의 지역을 요구한 거죠. 원래 명나라의 땅이었다는 이유였습니다.
+) 간단히 함경도 남쪽 지방이라 생각하심 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는 그냥 명과 화친하자는 게 주를 이루었죠. 고려사에서는 이 때문에 우왕이 최영과 "비밀리에" 정벌을 의논했다고 합니다.
명은 직접 행동에 나섭니다. 압록강을 건너서 아예 "여기 우리땅"이라고 말뚝을 꽂고 간 거죠. 이어 군사 1000여명으로 역참까지 70개나 만들고 갔다고 하죠. 이 때 우왕은 "다 요동 정벌 안 된다고 하더니 이 지경이 됐다"고 탄식했다고 하고, 최영은 더 강경하게 나갔습니다.
명의 사신이 와서 직접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고 간 후, 최영은 철령위에 남아 있던 자들을 몰아내니, 죽인 자만 21명이었습니다. 슬슬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기 시작한 거죠.
황해도 봉산에 머물러 있던 1388년 4월 1일, 최영은 정식으로 요동 정벌을 주장합니다. 반대에도 무릎쓰고 강경하게 밀어붙였는데, 최영이 가장 믿었던 이성계 역시 반대하죠. 그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입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 (以小逆大)
(농번기인) 여름에 출병하는 것 (夏月發兵)
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허를 노릴 염려가 있는 것 (擧國遠征, 倭乘其虛)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이 때 최영의 모습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려사에서는 이 때 우왕이 이성계의 말을 그럴듯 하다고 여겼다고 하는데, 곧바로 최영이 와서 이렇게 설득했다고 하죠.
"원컨대 다른 말을 받아들이지 마소서"
다음 날 우왕은 이성계의 반대를 물리쳤고, 이성계는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가 아니라 나중으로 미루자고 하죠. 양식이 넉넉한 가을에 해야지 장마가 오는 지금 하면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우왕은 끝내 반대했고, 이성계는 부하들에게 울면서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화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부터 이 문제를 둘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최영의 태도
최영이 이성계를 설득했다는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뺄 필요가 없는데도 아예 없는 게 이상하죠. 그가 직접 출정할 생각이었으니 힘으로 누르면 된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성계가 내민 첫번째 문제 때문에 많이 까이지만,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었습니다. 왜구의 침략은 계속되고 있었고, 최영도 직접 여러 차례 출진해서 개경까지 올라오는 걸 막기도 했습니다. 회군 직후인 7월에도 광주까지 뺏기기도 했죠. 거기다 장마철에다 한창 농사 지어야 되는 여름, 뭘 할 수 있을 때가 아니었죠. 그의 명분 역시 적절했습니다.
명나라가 바로 쳐들어올 것도 아니었고, 명도 철령 이북에 깃발만 꽂아 놨지 행정력을 쓸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다. 너무 서두르는 모습만 보였죠. 수십년간 계속해서 왜구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5만이나 되는 병력을 북쪽으로 뺀다는 것, 글쎄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순 있습니다. 원나라에 뺏긴 땅을 이제 막 되찾은 상황에서 명의 말을 용인할 순 없었다는 쪽으로요. 이후에도 명나라는 계속 함경도 지방을 가져가려 했습니다. 고려 땅이 아니라 여진족들이 살던 곳, 원나라가 지배하던 곳이라는 이유로요. 정도전이 하려 한 요동정벌 역시 (그 자신이 타겟이 된 것도 있지만) 이런 배경에서 나온 거였고, 태종은 악착같이 함경도를 지키려 했고, 세종대왕 때 4군 6진을 설치하면서 마무리 됐죠.
+) 그리고 이걸 보면 이인임이나 최영이 친원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이해 되긴 합니다. -_-;
최영은 정치력은 없다고 봐도 될 정도의 골수 군인, (그래서 이성계도 명령에 복종할 거라 여겼을지도요) 더 이상 힘 없이 뺏길 순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서둘렀고, 시기도 안 좋았습니다. 백성들이 힘들어 했다, 원성이 많았다는 말은 그냥 과장이 아닌 걸로 보입니다. 그 전에도 그는 왜구에 맞서기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과 인력을 많이 거둔다고 원성을 듣기도 했거든요.
요동을 정벌하는 것 역시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긴 합니다. 명나라 역시 만주는 직접 지배하지 않았고, 산해관부터 선양에 이르기까지 사무소(...)만 차려놓고 관리만 했죠. 이전에 이성계가 요동성을 점령했을 때도 군량 부족 등으로 근처 고려인만 데리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명나라에 충격을 줄 순 있었겠지만, 계속 점령해 둘 수도 없고 오히려 명나라의 거센 반격을 각오해야 되는 상황이었죠.
최영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연려실기술에서는 이성계가 친명파니까 명나라에 죄를 짓게 해서 숙청하려 했다... 이런 해석도 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그의 세력을 줄이려 했다는 거죠.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죠.
둘이 정말 친했다는 말과 좀 다르게, 최영이 이성계를 견제했다는 말도 고려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의문이 들죠. 최영은 이성계가 명령에 그저 복종할 거라고 여겼던 걸까요?
2) 우연인가 계획인가
반면 이성계의 행동 역시 궁금하죠. 어쨌든 맞는 말을 했던 그, 그리고 정말 절묘하게 장마가 왔고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편지까지 보내서 계속 반대했던 그지만 우왕과 최영은 무시했고, 결국 일을 벌였다는 거죠. 참 절묘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렇게 죽을 바에야 갈아 엎자(완전 우연)"부터 "이것들이 아주 제대로 명분을 주네(생각은 있었지만 상황 자체는 우연)"라는 생각까지 해 볼 수 있습니다. 위화도 회군 자체는 어쩔 수 없이 한 거라는 거죠. 가도 죽고 그냥 돌아가도 죽을테니 먼저 죽이자는 쪽으로요.
그는 일단 하중도인 위화도까지 갔고, 장마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건너려다 수백 명을 잃었다고 하죠. 이런 면에서 보면 우연일 가능성도 높긴 합니다.
문제는...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한 말이죠. 5년 전부터 그 둘은 결탁하고 있었고 정도전의 목적은 역성혁명이었습니다. 회군 이후에는 정말 빠르게 정권을 잡죠.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게 조민수입니다. 그 둘은 각각 좌우군을 이끈 대등한 위치였죠. 그의 동의가 있어야 병력을 돌릴 수 있고, 그의 힘이 이성계와 동등할 정도라면 우연 설에 무게가 갑니다. 실제 그가 돌아온 후 이색과 손을 잡고 창왕을 세워 한 방 먹이긴 하죠. 고려사나 실록에서는 이성계가 함경도로 돌아가려 한다는 말 듣고 울면서 말리다가 이성계 말을 따르는 쪽으로 나왔지만, 이걸 그대로 믿을 순 없죠.
그에 대한 반론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말만 동등하지 실세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구 이인임 파, 나름대로 살아남고 이런저런 활약도 펼쳤지만 이성계 정도의 네임드가 될 순 없죠. 후에 창왕을 옹립하긴 하지만, 단 1년만에 밀려버립니다. 그가 유배된 이유는 토지 개혁을 반대한 거였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권문세족처럼 남의 땅을 빼앗고 어쩌고 했다는 거였죠. 회군 직후 이성계파가 되었다는 조준의 상소 한 방에 그는 물론 이색까지도 날아가 버렸습니다. -_-;
이전에도 권문세족들이 이렇게 물갈이 된 적은 있지만, 1~2년만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잔당은 여전히 남아 있었죠. 거기다 신진사대부들의 스승 이색까지 같은 편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밀렸다는 것. (따지고보면 제자들이 스승을 몰아낸 겁니다. (...)) 이런 점에서 조민수의 힘이 그리 크지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딱 맞게 장마가 온 건 운이 좋았던 거죠. 이성계에게는 군사를 돌릴 최고의 핑계거리가 된 거거든요. 그런데... 따지고보면 그 때는 장마철이었어요. -_-; 비가 안 오는 날이 몇 일이나 될까요. 이성계가 위화도로 간 시간은 19일이었습니다. 위화도에서 머문 날도 14일이었죠. 한창 장마철에 비가 안 올 때가 얼마나 있을까요. 오히려 비가 오는 날을 노리기 위해 일부러 늦췄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수백 명이 빠져 죽었다는 건 과장으로 보는 거구요.
문제는... 이 명분을 준 게 최영이라는 거죠. 정말 몰랐을까요? 이성계를 견제했다면 충분히 경계해야 될 텐데 말이죠. 정말 그를 믿은 거라면... 휴 모르겠습니다. -_-;
사불가론과 그 후 신진사대부들이 급속히 정계에 진출한 것을 보면 이성계와 그들이 미리 결탁하고 계획한 것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최영이 서두른 것도 이런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 머리가 더 복잡해지지만... 어떻게 보든 그의 적에게 명분을 확실히 주었다고 봐야죠. 이성계는 조금만 과장해 주면 되는 거구요. 그가 징징거릴수록 명분은 더 확고해집니다. 자기는 할 만큼 했다는 거죠.
조민수도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자, 그 역시 친명파까진 아니더라도 명과 적대할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거기다 어쨌든 장마철 -_-; 이성계의 말 들으면 자기에게도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죠. 그걸 생각하면 조민수가 동의한 것 역시 크게 무리는 없습니다.
이 정도가 위화도 회군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3. 위화도로
전국의 가용 병력을 모두 소집한 상황, 전투병력은 3만 8천 8백 30이었고, 심부름꾼, 비전투병력이 1만 1천 6백이었습니다. 총 오만, 자칭 십만의 대군이 요동으로 향했습니다. 기울대로 기운 나라에서 그야말로 온 힘을 다 쏟은 것이죠. 헌데 문제가 생겼으니...
"경이 가면 누구와 함께 정사를 하겠는가"
우왕이 아직 어렸던 걸까요. 이해는 갑니다. 그의 말대로 공민왕이 죽었을 하필 최영이 제주도에 가 있었으니까요. 최영이 그 때 갔다면 또 역사는 달라졌겠죠. 하지만 최영도 왕의 눈물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 남았고, 이성계와 조민수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동안 장마가 시작되었고, 전염병도 돌기 시작했으며, 도강이 힘들 정도로 물이 불었고 병사들은 지쳐갔죠.
이성계의 말에 따르면요. -_-a 그는 계속 회군을 허락해 달라고 하지만 거부됩니다.
5월 11일. 대동강 물이 붉어졌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예언한 걸까요.
마침 중부지역에 왜구가 나타났는데 "지키는 숫자가 적어 사람 없는 데를 밟는 듯 했다"고 하죠. 남은 병력을 보내 막고 한양에 있던 비들을 개경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합니다. 이것도 불운일까요. 아니면 필연이었을까요.
5월 22일, 조민수는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그를 찾아갑니다. 자기 혼자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울었다고 하죠. 이성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상국의 지경을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생민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다. 내가 순과 역으로써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영이 또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진달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히 하지 않으랴"
왕 옆의 악한 사람. 평생을 같이 해 온 전우이자 최고의 동지였던 이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조민수 등 모든 장수들은 이성계의 말을 따랐고, 오만의 병력은 칼 끝을 돌립니다. 그들이 향한 곳은 개경.
이성계는 백성들을 놀라게 하면 안 된다면서 사냥을 하며 천천히 갔다고 하는데... 그들이 개경에 도착한 건 불과 9일 후, 6월 1일이었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군 선봉이 한양에 도착한 건 6일 후, 청군은 순수 기마병이었고 이성계의 병력은 말이 2만필 있었다 하지만 보병이 많았습니다. 한양과 개성 사이의 거리 차이를 생각해도 너무나도 빨랐죠. 거기다 인질 느낌으로 잡혀 있던 그의 가족들은 그 때 몰래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이성계의 야망이 역사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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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_-;
말을 많이 했으니 여담만 하나 하고 끝내자면...
이후 명은 별 반응 없이 철령위를 압록강 북쪽으로 옮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올라가서 청 초기 수도였던 심양까지 올라가죠. 이후에도 여러 차례 협박을 하지만, 확실히 자기 땅으로 두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 언젠가 나왔던, 명이 뺏으려 했던 철령위가 압록강 북쪽에 있다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겁니다. 철령위가 함경도에 있으면 왜 요동을 쳤겠냐는 건데... 말뚝만 꽂고 갔지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지도 않았고 얼마 없던 병력은 정벌 전에 다 쫓아냈었거든요. -_-; 거 참.
주원장이 머리는 정말 좋았던 거죠. 만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 했던 그들이 함경도까지 힘을 쓸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바란 건 이거겠죠. 고려, 조선이 확실히 입장을 정하게 하는 것. 짜증날 정도로 머리를 잘 쓰긴 했습니다. -_-; 북원이 여전한 상황에서 (마치 병자호란 때 청이 그랬듯) 자기에게 고개 숙이길 바란 거겠지만요. 그래도 여러 나라가 대립해 있었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이렇게 명이라는 초강대국과 국경을 접한 상태로 건국했고, 끝없는 견제를 받으면서도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이게 지나친 대명 사대에 대한 한 가지 답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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