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장민제
생년월일 : 1990년 3월 19일
출신지 : 광주광역시
소속 : 무등중 - 광주제일고 - 한화 이글스(2009년 2차 3라운드) No. 36
포지션 : 투수
투타 : 우투우타
중학 시절부터 팀의 에이스로 위력적인 공을 뿌렸던 장민제는 사람들의 주목 속에 야구의 명문 광주일고로 진학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1학년임에도 140 이상의 공을 던지는 매력적인 강속구 투수. 거기에 중학 시절부터 많은 경기를 뛰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출중한 경기 운영 능력까지 갖추었던, 그야말로 천재였습니다. 아무도 09드래프트에 기아 타이거즈 스카우트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불릴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너무 무리했던 것일까요? 그의 구속은 더이상 오르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선동렬의 재림이니, 한기주급 투수니 평해지던 장민제가 3학년을 마치고 드래프트장에 섰을 때, 그의 스카우팅 리포트에 적힌 최고 구속은 142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1학년 때 140 이상의 직구를 뿌렸는데도 말입니다. 어린 나이부터 강속구 투수로 주목받았던 그에게 갑작스런 구속의 정체는 굉장한 충격이었을 겁니다. 프로에서도 정상을 달리던 강속구 투수가 그 강속구를 잃었을 때 다시 일어서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이제 막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장민제는 어땠을까요.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강속구를 잃었지만 체득한 경기 운영 능력이 녹슨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속구가 없다면 변화구와 제구력으로 승부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수준급이었던 커브에 슬라이더를 더한 장민제는 2학년 때의 부진을 떨치고 3학년 때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황금사자기 4강 서울고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 9이닝 동안 2피안타 5탈삼진 1실점(비자책)으로 틀어막았고(이 대회 4경기 등판 15이닝 5피안타) 봉황대기 16강 화순고와의 경기에서는 7.2이닝 4피안타 11탈삼진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리고 맞이한 2009년 드래프트. 장민제는 인터뷰에서 줄곧 연고지의 명문 팀인 기아 타이거즈에 입단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광주일고엔 3학년 때 두각을 나타낸 동기 정성철이 있었습니다. 투수로 처음 출전한 전국대회인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9이닝 동안 10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정성철은 그 대회 최우수선수상까지 거머쥐며 일약 스타로 발돋움합니다. 1학년 때부터 많은 공을 던졌던 장민제. 구속은 3년째 제자리이고 변화구와 제구력으로 고교무대를 넘어온 투수. 반면에 상대방은 이제 겨우 1년 동안 공을 뿌린, 그야말로 갓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싱싱한 어깨를 가진 투수. 여러분이라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기아 타이거즈의 선택은 정성철이었습니다. 그리고 2차 1라운드에 기아 타이거즈의 옷을 입은 선수 역시 장민제는 아니었습니다(2차 1라운드 지명은 현재 기아의 보물인 안치홍입니다). 2라운드 정용운, 3라운드 손정훈. 고등학교 1학년 때만 해도 드래프트장에 나가면 모든 팀에서 군침을 흘릴 거라 평가받던 투수였지만 기아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한화 이글스 3라운드(계약금 8천만 원), 전체 22픽의 순위로 프로의 세계로 들어옵니다.
프로에 입단한 장민제는 2009년을 통째로 2군에서 보내게 됩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릅니다. 제구력과 변화구가 좋았다지만 그건 고등학교의 이야기고(프로 스카우트들은 3학년 이후 제구력조차 불안하다는 평을 했다고 하네요) 최고구속이 고작 140초반인 투수가 첫 해부터 1군에서 뛸 정도로 만만한 곳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시범경기에는 나왔었는데, 1.2이닝 2피안타 3사사구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합니다. 2군 성적 역시 18경기 42이닝 38피안타 3피홈런 19사구 28탈삼진 방어율8.12 로 그저 그런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너무 이른 시기에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한계라는 이름의 악독한 벽. 장민제는 2군에서 강판당한 후 고함을 지르며 그라운드를 달렸습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도 있었겠지만 이대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긴 고함이었을 겁니다. 자신의 기대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순위에 지명됐음에도 포기하지 않던 장민제는 2010년 기어코 1군 무대를 밟습니다. 어쩌면 한화 이글스라는 최약체 팀이었기에 가능했던 등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부서질 것 같은 동아줄을 잡고 올라온 것은 장민제 본인의 노력이었습니다.
2010년 시즌 마지막 경기인 홈 경기. 이전 등판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였던 장민제는 이 경기에서 처음으로, 프로 데뷔 후 약 2년 만에 선발로서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미 시즌은 끝났고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고 하지만, 상대는 고산룡 SK 와이번스. 더군다나 김광현의 단독 다승왕이 걸린 경기였습니다. 장민제는 이 경기에서 5이닝 동안 1피안타 3볼넷 1실점으로 SK 타선을 틀어막고 마운드를 넘깁니다. 아쉽게도 장민제가 물러난 후 타선이 폭발하여 승리를 챙길 수는 없었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투구였습니다.
그리고 2011년.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장민제가 기대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스프링캠프에서 기대되지 않는 투수가 있을까요? 여전히 그의 구속은 늘지 않았습니다.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지요. 구속만 조금 더 나와준다면 결코 쉽게 맞을 투수가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송창식 등 다른 경쟁자의 호투와 함께 장민제는 시즌을 2군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시즌 개막 후 최XX가 화끈하게 불을 지르고 2군으로 내려가자 장민제가 올라오는데 이 때 유명한 406대첩(아마 방사능대첩이라고 하면 많이들 기억하실 겁니다)이 일어납니다. 송창식이 조기 강판되고 3이닝을 틀어막은 장민제는 김선빈 - 이범호 - 최희섭을 3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좋은 모습을 남깁니다.
이후 선발 로테를 꾸준히 지키며 호투하지만 정작 승을 챙기지 못 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역시 구속의 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민제는 공도 꽤 묵직한 편이고 제구도 좋으며 포크볼도 잘 떨어뜨리지만 역시 구속이 느려서인지 맞추는 능력이 좋은 타자에게 커트를 잘 당합니다(이러다가 포크볼이 하나 안 떨어지고 쾅!). 자연히 투구수가 늘고 소화하는 이닝도 적어지니 승리와 연이 닿지 않는 것이지요. 거기에 야수들이 이상하게 장민제 등판 시에 침묵하는 악재까지 겹칩니다. 그 경기를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장민제가 강판되면 다시 맞히기 시작하지요(2010년 선발 등판 경기를 보고 알아차렸어야 했습니다).
2011년 6월 16일. 덕아웃에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다 가르시아의 만루홈런과 함께 밝아지던 장민제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네요. 이 날 경기에서 장민제는 5.1이닝 5피안타 4볼넷 1몸에맞는공 5탈삼진 1실점(비자책) 이라는 성적을 거두며 승리투수가 됩니다. 앞으로 장민제가 한계라는 이름의 벽을 깨부수고 더욱 더 날아올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장민제는 이 날 경기에서 최고 구속 145를 기록했습니다.
덧붙임.
한화 장민제, "하나뿐인 여동생 위해 5선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