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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12 23:01:29
Name
눈시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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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정유재란 - 8. 호랑이 사냥
bgm은 알렉산더 ost입니다.
여담이지만 난중잡록 보면 진짜 재밌어요. -_-; 정유년 하반기가 자기 의병 활동으로 가득 차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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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성 전투
실록에서 울산성 전투에 대해 처음 드러나는 것은 12월 23일입니다. 제독 마귀가 권율을 불러 경상좌수사 이운룡에게 서생포의 적을 도발해서 울산성을 돕지 못 하게 하자는 거죠.
연려실기술에서는 양호가 "마땅히 먼저 청정을 공격하여 적의 오른팔을 끊어야 할 것이다"고 말 하면서 마귀와 함께 경상도로 갔다고 합니다. 이 때 명군은 병력을 나누어 의성 등 전라, 경상도 사이의 험한 곳을 막게 하고 천안, 전주, 남원을 내려가면서 순천을 공격하는 척 하게 하라고 했죠. 양호는 스스로 4만 5천에 달하는 대병을 거느리고 경주에 진영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목표인 울산왜성의 이름은 도산성. 바위 언덕을 기본으로 만들어서 지형적으로 난공불락이었으며 전국시대의 전쟁 경험으로 쌓아서 외성이 무너져도 내성에서 버틸 수 있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때 울산성 안에 있는 병력은 후방의 축성 및 방어 임무를 맡은 아사노 초케이와 고바야카와 히데이카, 군감 오타 가즈요시 직속 병력, 가토군 삼천, 기타 여러 일꾼들이었죠. 재밌게도 케이넨 할아버지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에 주둔 중이었죠.
28일 첫 승전 소식이 들려옵니다. 23일 적을 유인해서 승전했고 수급 5백여급과 왜장 1명을 생포했다고 하죠. 첫 날에 신나게 공성 후 아직 남병들이 오지 않아서 포위를 풀고 쉬었다고 합니다.
23~24일 양일간의 공격으로 도산성 근처에 있던 병영성, 언양성은 함락되고 적은 도산성으로 후퇴합니다. 양호는 이 도산성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의 병력을 끊고 도산성으로 진격하죠. 도산성은 완공된 지 얼마 안 됐던 때로 여전히 인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 다이묘들의 병력이 섞여 있었고, 명령체계도 통일될 수가 없었죠. 나름 요충지에 지은 성이었지만 함락되어도 별 상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 울산성에 입성합니다.
도산성은 왜성이라는 이름답게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여러 겹으로 이루어졌고 24~25일 중 니노마루와 산노마루, 조명연합군의 표현대로 외성은 점령된 것으로 보입니다. 화려한 승리였죠. 하지만 가토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죠. 조명연합군은 여려차례 내성, 혼마루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명군의 진인이 부상당하기도 하는 등 큰 피해를 입어서 후퇴하죠.
포위 직후부터 일본군의 군량과 식수는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조명연합군은 우물을 메워서 아예 보급을 끊어버리죠. 나베시마 나오시게나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의 지원군이 근처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명군에 의해 차단됩니다.
밤을 틈타 물을 뜨러 온 일본군도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고 가토 기요마사는 그렇게 철저히 고립당합니다. 이 때 성 내의 기마병을 모두 모아 천 명으로 역습을 가하려 했습니다만 조명연합군의 포위에 말려서 전멸당하죠. 정만록의 기록인데 일본군이 지난 임진왜란의 경험을 통해 기마 전술을 배운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더군요.
이렇게 전투의 과정 동안 명군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왜구전략을 충분히 숙달한 남병, 절강병등은 방패수와 사수, 살수, 포수의 절묘한 연계를 보여 주었고, 공격 후 후퇴하는 과정에서 조총에 맞아도 자기 이름이 적힌 방패를 들고 후퇴해서 일본군이 감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와 왜성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죠. 외성이 함락되고도 내성에서는 끈질기게 버텼고, 지형적인 이점 때문에 공성병기를 동원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명군과 조선군이 돌아가면서 몇 차례 화공을 시도했지만 적의 조총 집중사격에 번번이 물러나야 했습니다. 결국 양호는 항복을 권유하고 한 쪽 길을 터 줘서 후퇴하자는 협상도 시도하지만, 일본군은 응하지 않았죠. 케이넨의 일기에는 이 때의 참혹한 모습이 잘 실려 있습니다. 식량은 떨어져서 소나 말을 잡아 먹어야 했고, (인육을 먹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아닌 것 같군요. 그 근거가 적혀 있다는 일본 기록에서는 없습니다.-_-; ) 흙을 삶아서 먹었다느니, 흙탕물은 물론 핏물을 마셨다느니 하는 적이라고 해도 불쌍한 모습이 보입니다. 비가 오면서 옷에 있는 물을 짜 마시면서 버텼지만, 때는 겨울이었죠. 이렇게 일본군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립니다. 가토 기요마사조차도 비를 맞은 천을 짜 마셨다고 할 정도죠. 가토 기요마사는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하는 등 나름 시간을 끌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죠. 결국 그의 결론은 항복이 아닌 할복이었습니다.
그 동안 다른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울산의 위기를 듣고 병력을 규합,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까지 합류해서 8만에 이르는 대군을 모아서 구원에 나섭니다. 양호는 이것을 듣고 권율, 이덕형 등을 불러서 후퇴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리죠. 이 과정에서 일본기록에서는 명이 무질서한 후퇴를 해서 뒤를 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고 하고 연려실기술 등에서는 적의 추격을 예상해서 복병을 설치, 적을 격퇴했다고 하죠.
12월 23일부터 1월 14일까지 진행된 1차 울산성 전투는 이렇게 종료됩니다.
2. 울산성 전투의 영향
이 때 울산성의 일본군에서는 멀쩡한 병력이 천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성을 지켜내었죠. 제대로 된 물자와 병력도 없이 비전투원인 인부만 많은 상황에서 성을 지켜낸 덕에 이것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큰 전공이 되었습니다. 특히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던 성에 스스로 들어갔고, 명령체계가 제대로 통일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 싸웠으며 (일본에서는 울산성 전투의 "승장"을 고바와카와 히데아키로 본다는군요) 항복이나 도주 대신 할복을 선택했다는 점이 컸죠. 진주성이나 이치 전투 등의 예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일본의 승리가 맞습니다.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이 승리를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조명연합군에게 시간만 있었으면 울산성은 함락되었을 것이고, 농성기간 동안의 참혹한 기억 때문이었죠. 이후 그는 축성의 달인이 되어서 일본의 유명한 성 중 하나인 구마모토 성을 짓는데, 성 내에 우물을 많이 파고 고구마를 이용해서 다다미를 만드는 등 농성에 집착하게 됩니다.
조명연합군의 피해도 커서 삼사천에서 칠팔천 수준으로 집계되고 있다고 합니다. 연합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엄청난 피해죠. 항복을 종용한 이유가 비단 아군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후퇴했다 하나 명군에게도 의미가 컸습니다. 이제까지 명군은 밥 값도 제대로 못 한 채 식량만 축내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울산성 전투 기간 동안 보여준 강력한 모습은 대내외적으로 명군의 위엄을 알리기에 충분했습니다. 후퇴했다 하나 명군은 경주, 안동 등에 여전히 병력을 주둔하고 전라도의 남원부터 경상도의 경주 등 다섯 군데에서 둔전을 계획하며 장기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후 주둔지 밖에서의 일본군의 도발 및 약탈은 크게 줄었고 전쟁의 주도권은 이 전투 하나로 완벽하게 조명연합군으로 넘어갔습니다. 일본군 장수들은 순천, 울산을 포기하는 전선축소계획을 건의하지만 히데요시는 거부하죠. 이후 일본군은 그저 지키기에 급급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투 과정에서 보여 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과 외성을 함락시켜도 내성을 공략하기 힘들었던 왜성의 구조 등으로 명 역시 완벽한 승리를 포기하게 됩니다. 거기다 한 곳을 공격해 봐야 다른 곳에서의 지원군에게 앞뒤로 공격당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하는 것이 아닌 명에서 계속 오는 지원군을 모두 규합해서 정유재란 후반기에 볼 수 있는 사로병진을 계획하게 되죠. 또한 히데요시의 사망 후 명군이 보여 준 소극적인 모습 역시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울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후반기의 상황을 결정짓는 전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다시 남해 바다로
명량 해전이 끝난 후 조선 수군은 당사도, 다음 날에는 어외도로 이동하면서 후퇴합니다. 여전히 적의 수는 많았고, 전라도는 거의 점령된 상황이었죠. 이 때 명량해전의 피해에 대해서 순천 감목관 김탁, 종 계생이 전사하고 박영남, 봉학, 강진 현감 이극신이 부상했다고 적고 있죠. 다른 배의 전사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선두에 있던 상선에서 이 정도 피해가 났다는 건 명량 해전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전투였는지 다시 말 해 주죠.
조선 수군은 계속 북상해서 19일에는 영광군 홍농 앞바다로 갔고, 20일에 위도로 갔다가 21일에는 고군산도까지 갑니다. 이 때 전라도 순찰사 황신이 이순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죠 -_-; 이유가 뭘까요~~
그 후 몇 일 동안 몸이 많이 안 좋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오랜 긴장과 전투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든 듯 합니다.
10월 1일에는 아들 회를 보내 집의 사정을 알아보라고 했는데, 그 날 공문이 와서 보니 아산의 집이 잿더미가 돼서 남은 게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집이 걱정되기는 했다고 하더라도 하던 일을 멈출 순 없었죠. 2일 회가 출발하는데 이 때 "심사를 어찌 말로 표현하랴"고 적고 있습니다.
3일 이순신은 수군 정비를 마치고 다시 남진을 시작합니다. 이 날 법성포에 도착하죠. 이 때 피난민들은 계속 이순신을 따라다녔고, 도망갔던 장수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4일에는 나주의 선비인 임선, 임업 등이 왜군에게 붙잡혀서 싹싹 빌어서 풀려나서 임치로 돌아왔다는 편지를 받죠. 강항이 붙잡혀서 일본으로 간 것도 이 무렵입니다. 7일에 호남 안팎의 적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는 소문을 듣고 어외도까지남하합니다. 9일에는 우수영으로 돌아오는데 인가가 하나도 없고 사람의 자취도 찾을 수 없어서 참혹했다고 하죠. 해남에는 여전히 적들이 머물러 있다는 보고도 받게 됩니다. 이 날 김응함이 해남의 적이 도망치고 있다고 전합니다.
11일 정탐인 이순, 태귀생 등을 해남으로 보내니 적이 도망가면서 지른 불로 연기가 가득했다고 전합니다. 이 날 안편도에 도착하는데 적을 잘 볼 수 있고 배를 숨기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조계종이 와서 왜적들이 우리 수군을 몹시 겁낸다는 보고를 합니다. 다음 날 탐후선이 4일이나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하는데 적이 멀리 도망가서 뒤쫓느라 그럴 거라는 낙관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명량 해전 후 조선 수군이 후퇴했다 하지만 단 한 달도 되기 전에 이렇게 낙관적인 결론을 내릴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다는 것이죠. 이 날 발음도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안편도의 다른 이름이라는 주장을 들었습니다.
이 때 이순신에게 합류한 장수는 임치 첨사 홍견, 전라우수영 우후 이정충 등입니다. 이외에도 장흥 부사 전봉이나 금갑도 만호 이정표, 제포 만호 주의수, 당포 만호 안이명 등 많은 장수들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들이 명량 해전에 참전했던 것인지 그 이후에 온 것인지는 모르겠군요. 특히 이순신이 비난하는 것은 이정충인데 바깥 섬에 도망해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정충은 무슨 벌인지는 몰라도 처벌을 받게 되죠. 그 외에도 무안 현감 남언상이 도망가 있다가 승리 후에 나와서 "하는 짓이 참으로 해괴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10월 24일에 금부도사가 왔는데 무안 현감, 목포 만호, 다경포 만호를 잡으러 왔다고 하죠. 이들 역시 수군으로 참전해야 됐는데 도망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임치첨사 홍견의 존재입니다. 홍견은 명량해전이 벌어진 근처인 임치진에 있었는데 돌아오지 않았고, 격군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습니다. 나중에야 합류하는데 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 무안 현감 등은 임치첨사 휘하죠. 배흥립이나 류형, 이응표의 예에서 보듯 배설을 따라 탈출하지 않은 장수들도 명량해전 전후에 합류한 것으로 보아 홍견 역시 처벌하거나 언급해야 된다고 봅니다만... 없죠.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아래의 무안 현감 등이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서 이 문제에 매달리느라, 그러니까 정말 사정이 있어서 합류하지 못 했거나 배설을 쉽게 처벌하지 못 했던 것처럼 전라우수영의 실세여서 처벌을 못 했다는 쪽으로 추측이 가능하죠. 혹은 남해현령 박대남처럼 육군의 상황이 더 급했거나 (즉 무안을 육지에서 지키고 있었거나) 아예 누군가의 명에 의해 육군에 종사하거나 이순신을 돕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게 아닐까 하는 등, -_-;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별의별 추측이 가능하군요. 가문 기록 같은 걸 찾기 전에는 확신 못 하겠습니다. 1605년에 홍견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관직 주지 말자 이런 얘기가 실록에 나오는데 생각해보니 70살 가까이 되긴 했습니다. 일단 무안 쪽에서 조선 수군의 역사를 말 할 때는 홍견이 격군이 없어서 참전은 못 했으나 이순신이 도착하자 매우 환영했다,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록이 거의 없어요.
아무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명량 해전 후 한 달도 안 돼서 다시 남해 바다로 돌아왔고, 적은 물러나는 가운데 장수들이 계속 합류했고 그 중에 몇 명은 도망간 죄로 처벌 받았다는 것이죠.
4. 조선 수군의 재건
섬들을 전전해서 최대한 교전을 피하고 재건에만 주력한 것 같지만, 난중일기에는 육지에 병력을 파견한 게 많이 발견됩니다. 특히 해남은 반드시 탈환해야 될 곳이었죠. 11일에 정탐인을 보내고, 13일에는 기다리던 탐후선이 돌아와서 보고를 들으니 10일에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모두 도망갔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에 우치적, 정공청, 주의수, 태귀생 등을 보내죠. 15일에는 임중형 등을 흥양, 순천 앞바다로 보냈고 16일에는 김응함, 류형 등을 해남으로 보냅니다. 이 날 전에 보냈던 우치적이 돌아와서 적 13명가 적진에 투항한 자들의 머리를 베어 오죠. 이렇게 조선 수군은 아직 적 소굴이었던 해남을 자기 집처럼 드나듭니다.
24일에는 명의 수군이 강화도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기뻐했을지는 모르겠네요. 이 날에 해남의 적에게서 뺏은 군량 322섬이 도착합니다. 군량 조공일까요 -_-;
29일에는 마침내 고하도로 진을 옮깁니다. 이제 다음 해 봄까지 이 곳은 조선 수군이 재건되는 인큐베이터(계약 좋아하는 축생 아닙니다)가 돼 주었죠. 11~12월에는 고하도에 집을 짓고 군량을 계속 운반하며 해남의 적을 염탐하고 붙잡은 적들을 심문하는 내용이 다수를 이룹니다. 한편 조정과의 연락이 재개되면서 16일에는 명량 해전의 포상이 내려오고 여기서 은 20냥을 받습니다. -_-; 하지만 명나라 장수들은 따로 선물을 보내줬죠. 특히 양호는 붉은 비단을 보내면서 직접 배에 걸어주고 치하하고 싶지만 멀어서 그럴 수 없다는 편지도 보냅니다. 류성룡의 편지도 왔죠. 다음 날에는 적진에 뿌리라고 면사첩도 도착합니다.
22일에는 장흥에 있던 적이 20일 달아났다는 보고가 왔고, 27일에는 장흥 부사가 이에 대해 "전쟁에 크게 승리한 장계"를 씁니다.
12월 23일에는 도망갔던 황신이 찾아 오겠다는 기별을 듣습니다. 다음 날에 이종호를 보내 문안하죠. 이 날 의병장 나덕명이 도착하는데 "머무르고 있는 것을 싫어함을 모르니 한심하다"고 쓴 걸로 봐서 수군에게 빨리 진격하라고 강요한 모양입니다. -_-;
25일. 순찰사 황신이 도착합니다. 여기서 바다에 접한 19개의 고을을 모두 수군에 전속시키기로 하죠. 황신이 그 전에 도망쳤던 이유가 짐작되는 부분입니다. 늘 육군에 병력을 뺏겼던 이순신에게는 꼭 필요한 요구였죠. 이렇게 조선 수군은 급속도로 재건돼서 다음 해 1월 2일에는 새로 건조한 판옥선을 취역시킬 정도가 됩니다. 수군은 해남, 강진, 장흥부터 순천 앞바다까지 수륙 양쪽으로 병력을 진출시키며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일본군 출몰지가 많았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 지역은 조선 수군 출몰지가 돼서 적을 두렵게 했습니다. 염전을 만들고 각 섬을 개간해서 군량을 마련했고, 육지에서 계속 군량을 충당하고 적의 군량까지 뺏어 왔죠. 피난선들과 상인들에게 통행첩을 줘서 비용을 충당했고, 물고기를 낚아서 식량으로 쓰거나 팔았습니다. 전라우수사에 안위가, 경상우수사에 입부 이순신이 임명돼서 손발도 잘 맞았을 것입니다. 김완만 빼면 이순신이 아끼던 부하들이 거의 돌아온 것입니다.
그 결실은 무술년에 제대로 드러납니다.
5.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그렇다고 이순신이 힘을 다시 되찾았다고 보자면, 그것도 아닙니다.
10월 14일, 그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그 날 꿈을 꾸는데 발을 헛디뎌 내에 떨어졌는데 쓰러지지는 않고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징조였을까요.
그 날 저녁 천안에서 편지가 왔는데,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고 합니다. 겉면에 적힌 말은 "통곡" 면의 전사 소식이었습니다. 그 날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늘이 어질지 못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 간담이 타고 찢어졌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떳떳함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백일조차 빛이 변했다. 아아,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범속하지 않기로 하늘이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는가. 내가 지은 죄로 화가 너의 몸에 미쳤는가. 이제 내가 세상이 있은들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란 말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너의 형, 너의 누이, 너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어가기는 하지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서 소리쳐 울따름이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1년 같다."
읽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 이 기록은 그의 심정이 어땠는지를 너무도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이순신과 같이 있던 회 등의 아들들이 질투할 정도의 애정을 준 아들 면, 하지만 그가 전사한 거죠.
16일에는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 마음놓고 울어 보지도 못 했으므로 염한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날 마음껏 울었던 것 같습니다. 칼의 노래에 이 때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죠. 다음 날에 향을 피우며 또 통곡하고, 19일에는 밤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제는 영령이라 불효가 여기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비통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함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이 날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렸다고 합니다. 이미 그의 몸과 마음은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죠.
조정에서도 이런 그를 신뢰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11월 3일에는 선전관 이길원이 왔는데, 그게 배설을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고향 성주로 간 배설을 잡는데 수군을 찾았다는 것은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거였죠. 그 날 일기에서 이것을 크게 비판합니다.
12월 5일에는 권율의 군관이 밀지를 가져옵니다. 선조의 말이었죠. 통제사 이순신이 권도, 원칙을 지키는 도리를 따르지 않고 있어서 장수들이 민망해한다고 하니, 개인 사정은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전쟁에서의 용맹이란 간소한 음식을 먹으면 기운을 낼 수 없으니 경계를 풀고 방편을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순신은 상 중이라서 고기를 먹지 않고 있었고, 임금은 이걸 걱정해서 고기 반찬을 내린다는 것이었죠. 군관은 밀지와 더불어 고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에 대해 이충무공전서본에서는 "감동감동"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장면이죠. 신하는 상 중임에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고, 임금은 그것을 감탄하면서 몸을 걱정해 직접 고기를 내립니다. 그리고 신하는 이것에 감동하면서 그것을 먹죠.
난중일기 초본에 나오는 말은 "비통비통"입니다. 왜 바꿨을까요?
자기 말에 복종하는지 확인하는, 충성 서약 아니었을까요?
현대에 들어서 차라리 뒤엎지 왜 계속 충성을 했냐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라를 지켜야 했고, 백성을 지켜야 했습니다. 아무리 싫어도 왕은 왕이었죠.
정유년 10월 8일 일기의 뒷장에는 "무릇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는 독송사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이 때의 그에게 삶에 대한 의지는 남아 있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슬픔을 나타내는 일기 구절 외에 다른 부분은 너무나도 담담하고 깔끔합니다. 그를 이끌고 있는 것은 나라를 구해야 된다는 의지, 그리고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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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긴 정유년이 끝났습니다. 이제 정유재란도 끝... 이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1년이 남아 있군요. 다음 편의 제목을 뭐라고 해야될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98년 초중반의 상황을 좀 살펴 보겠습니다.
그런데 (스포일러)를 생각하면 쓰기 싫기도 하네요. -_-a 조선 수군은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다로 끝나면 좋을텐데요. 그래도 (스포일러)를 써야죠. 아무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 근데 분명히 울산성 전투를 다룬 글인데 왜 수군 부분이 더 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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