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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09 18:24:09
Name 눈시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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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정유재란 - 7. 전세 역전





BGM 교체. 진주만 OST입니다.
아우 명량 해전 끝났으니 이제 좀 설렁설렁... 죄송합니다.
이번 편은 제 고민의 흔적입니다. 재미가 많이 없을 겁니다. -_-;
계속 예정에서 벗어나고 있네요. 호랑이 사냥은 다음편입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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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군의 후퇴
15일, 선조는 새벽에 별전으로 갑니다. 이 때 대신들에게 밀지를 내린 모양인데 다 핑계를 대고 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대충 갈구다가 본론을 꺼냅니다. 중국군의 기밀을 알아낸 거죠. 일본군이 후퇴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때 중국군은 용인과 죽산 부근까지 병력을 전개시켜 적이 왜 갑자기 후퇴하는지 알아내 보려 했다고 대신들은 추측했죠. 이에 선조는 적의 유인을 의심합니다. 16일에 다시 이것이 거짓 퇴각인지 의논하며 이 날 명군이 적을 수급 18급을 베었다는 보고를 듣죠. 한편 경리 사후 낭청이 와서 전과를 말하는데, 이게 9753명을 참하고 말 4천여 필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_-; 그럴 리가요.
18일 보고에는 금강까지 진출해서 또 적 46급을 베고 진천의 적은 이미 강을 건너 떠났다고 하죠. 20일에는 더 구체적인 보고가 들어오는데 명의 여러 장수들이 총 1백 55급의 수급을 얻었고 청주, 공주의 적들은 모두 흩어져 호남이나 조령을 통해 퇴각했다고 합니다.
이 때의 보고로 "지금 이 왜적들은 사람을 만나면 즉시 죽이기 때문에 길가의 마을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어린아이도 남겨두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라는 부분이 있죠.

이렇게 명군의 추격 작전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고 적은 단 몇 일 사이에 충청도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죠. 충청 병사 이시언도 이것을 보고하고, 조정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서 도망간 관리를 처벌하고 아군 병사들을 사열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일본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정유재란의 최고 주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2. 후퇴의 원인은?
1) 후퇴 시점
이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나뉘고 있습니다.
- 일단 저번 편을 보신 분들이라면 다들 찬성하실 적은 한양으로 진격했는데 보급로가 막히니까 바로 철수! 장군님 만세!
- 일본인들 중 감히 명량 해전을 폄하하기 위해서 만든, 애초에 철수하려는 계획이었다. 즉 애초에 히데요시는 충청도나 경기도는 "할 수 있으면" 하라고 했고, 겨울이 다가오니까 철수한 거다는 거죠. 직산이고 명량이고 별 영향은 못 끼쳤다는 것입니다.
- 선조가 좋아하고 역시 일본이나 중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직산 [대첩]으로 인해 철수! 황제폐하 만세!

정도가 있겠습니다. -_-a

일본군의 작전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전주 회의와 정읍 회의입니다. 이 중 전주 회의는 전주 점령 직후에 시작된 것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우키다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남쪽으로 후퇴한다는 내용이고 가토 기요마사 등은 경기도로 향한다는 거였죠. 후방으로 후퇴하는 병력은 전부 좌군 소속이었죠. 이 회의는 어디까지나 좌군은 전라도 점령, 우군은 북상한다는 정유재란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 준 거나 다름 없습니다. 한편 여기서 수군은 다시 바다로 간다는 것도 결정되었죠.

정읍 회의는 9월 17일에 있었는데 날자가 적절하기에 이게 일본군 후퇴를 결정짓는 회의가 아닌 하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면면을 보면 시마즈 요시히로가 전라도에서 축성한다는 것,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적당한 곳을 찾아 축성하고 부산포에는 모리 요시나리를 보내 수비를 강화한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성 사이에 축성한다,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이 중 북상하던 우군 소속으로 언급된 이는 나베시마 나오시게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게 후퇴를 결정한 거라면 그 이전부터 보이는 후퇴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죠.

15일 새벽에 선조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한 것을 보면 명은 14일부터는 적의 후퇴를 파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 후퇴의 이유였죠.

케이넨이 8월 27일자 일기에서 한양으로 가게 되니 즐겁다는 말을 합니다. 케이넨이 조선인들의 죽음도 슬퍼해 주고 전쟁을 싫어했지만 역시 아군이 이기는 상황에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던 듯 하죠. 혹사는 싫지만 일단 이겼으니 기뻐할 수밖에 없듯이요. -_-; 아무튼 이 때 우군의 진격에서 "한양이 목표가 아니다"는 확실한 건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가능하면 공략하라는 거고, 우군 역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케이넨이 설레발 친 게 아니면요.
직산 전투 직후인 9월 9일 군의가 열리는데 조선물어에서는 이 때 한양 공략을 의논했고 오타 가즈요시가 반대하고 후퇴를 주장했다고 합니다. 다른 장수들은 이 결단을 칭찬했다고 하죠.

2) 무엇을 위한 후퇴인가
+) 당시 일본력과 조선력은 하루 차이가 있고, 아래 부분은 모두 조선력에 맞추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이 후퇴가 무엇을 위한 후퇴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후퇴가 전면적인 후퇴라면 명량 해전의 의의는 대폭 축소되고 혐한들의 주장대로 명량 해전의 전술적 승리와는 상관 없이 이미 일본군은 후퇴하고 있었다는 게 되니까요.

문제는 이 다음 날인 10일에 경기도 안성, 죽산을 공격한 후 후퇴했다는 점입니다. 이 부대는 구로다-모리의 우군 주력이었습니다.
케이넨이 있던 오타 가즈요시, 가토 기요마사는 직산, 천안 부근에서 진천으로 전진했고, 이후 "본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본진에 도착했는데 케이넨은 팔일에 이곳을 통과한 적이 있다고 하죠. 이 본진을 직산으로 보기는 어렵고, 가토 기요마사 군이 청주에서 충주로 기동했다고 했으므로 이 본진은 청주로 봐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케이넨이 있는 오타 가즈요시는 청주 -> 직산 -> 진천 -> 청주로 간 거죠.
이런 과정에서 케이넨은 "포구"가 가까워졌다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해석하면 서해의 어느 포구로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동로를 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나지 않죠.

케이넨의 일기에 포구로 가서 좋다는 건 이제 집에 가는구나 수준입니다. 전라도에서도 그랬고 나중에 서생포로 향하니까 드디어 포구로 왔다고 좋아하죠. 그렇게 본다면 여기서 포구로 간다는 건 완전 철군 명령이 떨어져서 경상도 포구로 간다고 해석하면 될 듯 한데... 정작 경상도 상주로 가서는 포구 얘기는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충청도 내에서 조금 움직였는데도 포구가 가까워졌다고 좋아한 걸로 보면요.

그의 일기에서 보면 언제는 이랬다 언제는 저랬다 하면서 그 본인이 확실한 작전을 아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의 퇴각은 위에 쓴대로 "바다든 강이든 충청도의 어느 포구로 간다"고 좋아했던 것이고, 어느 순간에 작전이 바뀌어서 내륙으로 갔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아산이 일본군에 의해 공격당해 이순신의 아들 면이 전사하죠. 이것이 일부러 이순신의 가족을 노린 게 아니라면 아산 공격 역시 어떤 목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실록에는 중국군의 전과 보고와 충청병사의 보고가 같은 날에 있는데, 보통 조선군의 보고보다 명군의 보고에서 일본군이 더 후퇴한 것으로 나옵니다. 명군의 보고가 더 나중 일을 다뤘거나 전과를 과장한 거겠죠. 이것을 감안하고 보겠습니다. 충청도에서의 보고가 하루이틀에서 당일치기라고 생각해 볼 경우, 14일 수준까지 경기도 남부에서 활개치던 일본군은 갑작스레 직산으로 후퇴했고, 16~17일 수준까지는 직산에서 명군과 대치했고, 17~18일선에서 갑작스레 천안과 직산을 내주고 후퇴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가토군은 15일 이전부터 충주로 갑작스러운 기동을 하죠.  
이들은 19~20일 선에서 청주, 공주, 충주를 모두 버리고 후퇴하고, 명군의 추격은 진천까지 추격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충주로 간 것이 이후 드러나듯 충주 -> 조령 -> 문경 -> 상주로 가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상주로 가려면 그렇게 돌아갈 필요 없이 임진왜란 때 구로다군이 그랬듯 청주에서 추풍령을 넘어 상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 때 김수, 류성룡 등은 후퇴하는 것이라 여겼고 선조와 홍진은 적의 유인책으로 여겼습니다. 명군 역시 말이야 기세등등했지만 이것을 걱정해서 병력을 멀리 진출시키지 않은 것으로 보이구요.

다시 케이넨의 조선일일기로 돌아가 보자면, 처음에 후퇴할 당시 케이넨은 그저 포구로 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충청도의 포구로 봐야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때 "충청도와 전라도를 모두 점령했다"면서 기뻐하는 것으로 보아 이 퇴각 역시 충청도에서의 전면퇴각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구요. 충주로 간 가토 기요마사가 바로 조령을 넘지 않았고, 상주에 도착한 게 20일인 것으로 보아 가토 군의 전면퇴각은 18~19일 선이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또한 청주의 남쪽 보은에서 정기룡의 병력이 구로다-모리군의 선봉과 부딪힌 게 20일이라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총퇴각 역시 18~19일 사이에 결정된 것이라고 봐야겠습니다.

3) 직산 전투의 역할
그냥 간단히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본 철수의 정확한 시점에 대한 문제는 머리가 아픕니다. -_-; 명량 해전 이전에 이미 철수 움직임이 보이거든요. 일본과 명의 경우 명량 해전보다는 직산 전투 및 일본군 애초의 계획에 무게를 더 두고 있거든요. 물론 명량 이후에 적이 서해로 진입하지 못 한 것도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철수 원인으로는 잘 두지 않죠.
하지만 직산 전투는 기병 4천으로 구로다군 선봉도 초기에 격파하지 못 한, 결코 잘 했다고 볼 만한 전투가 아닙니다. 구로다군의 병력은 사오천 정도, 우백영과 양등산은 이 병력이 많다고 싸움을 꺼렸다고 하고 결국 제대로 격파하지 못 한 채 (윤민혁님의 묘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 집에 왜 왔니" 놀이만 하면서 몇 차례 치고 빠지고 하다가 모리군이 나타나자 후퇴한 전투입니다. 이후 일본군이 계속 직산에 머물고 안성까지 공격한 것을 보면 직산 전투가 적 후퇴의 직접적인 원인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명군이 초반에 구로다군을 강력히 압박한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강력한 적을 이겼다"는 과장법을 생각하더라도요. 그 자체의 전과보다 중요한 것은 명군이 본격적으로 요격을 시도했다는 것이겠죠. 다 합쳐서 일만수준밖에 됐다고 하더라도 명군은 계속 증원되고 있었고, 임진년처럼 싸움을 피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강력한 반격을 시도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겠죠. 졸전을 벌였다 하나 모리군이 올 때까지 명군 역시 후퇴하지 않고 버텼고, 그 때의 병력이 명의 가용병력 전부인 것을 생각하면 후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도 직접적인 전과보다는 명군이 참전했다는 정신적인 충격을 강조합니다. 에 좀 과장하지만요. -_-; 아무튼 겨울은 다가오고 보급은 오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명도 강력하게 맞서니 전략의 변화가 필요했겠죠.

직산 전투 다음 날인 9월 9일의 군의는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포구 확보를 위한 후퇴" 및 "가토군의 충주 기동"이라는 점에서 일본군의 작전은 전면 철수가 아니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실제 그 날 기록을 모두 적는 실록을 제외하면 일본군의 후퇴는 청주에서 전라도 방향으로의 후퇴라고 적고 있고 여기에는 가토의 이름도 포함돼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가토의 목표인 울산 서생포가 경상도 동북쪽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안전한 전라도 방향이 아닌 적이 얼마나 있을지 모를 충주 -> 상주 방향으로 후퇴한다는 것은 이상하죠. 실제 가토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충청도-경상도 병력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명군에서 잡아 온 일본 포로나 충청 병사 이시언이 잡은 복전감개라는 포로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9월까지만 공격하고 10월에는 돌아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특히 명군이 잡은 포로는 "10월까지 모두 일본으로 철수하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건 바로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복전감개의 경우 "전라도도 포기하고 부산포-울산으로 후퇴"라고 했는데 히데요시는 전라도는 다 점령하라고 했고 실제 정읍회의에서도 전라도-경상도의 축성을 의논했지 전라도 포기를 의논하지는 않았죠. 살기 위한 과장일까요. 아니면 이게 맞는 말일까요. 일단 전 부정적입니다. 히데요시가 따로 명령을 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히데요시가 서울공략 포기 및 충청도, 전라도 포기를 명할 만한 시기가 없었고 9월 9일에 서울 공략을 논했다는 것부터가 히데요시의 명령이 따로 없었다는 것을 말 해 줍니다.

3) 총정리
-_-; 엄청나게 길어졌네요. 하아... 좀 정리해 보자구요.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명의 대부대가 올 경우 곧바로 보고하라. 내가 바다를 건너겠다"고 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작전 행동이 끝나면 각각의 축성지로 돌아가라"는 것이 있죠. 이것을 대입해 보면...
경기도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제법 강력한 저항을 받고, 두려워서 떨던 조선 조정과는 별개로 더 이상의 진격을 자제하며 명군에 맞설 대비를 합니다. 아산만을 공격하는 등 포구를 확보하고 안성을 공격해서 명군을 도발하죠. 한편 가토는 충주로 기동해서 조령을 통한 약간의 보급이라도 가능하게 하죠. 충주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에서 볼 수 있듯 우회해서 한양을 공격할 수 있을 만한 곳이었습니다. 여차할 경우 조령을 통해서 바로 후퇴할 수 있는 위치였죠.
명이 추격에 나서자 일본군은 이에 맞서면서 보급을 기다립니다. 이 상황에서 충청도 서해의 포구는 거의 확보된 상태였을 겁니다. 여차하면 가토군과 연계해서 추격해오는 명군을 포위할 수도 있죠. 이런 면에서 유인책이 아니냐는 선조의 판단이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랬던 일본군이 총퇴각한 것은 18일 직후, 뒤도 돌아보지 않는 빠른 퇴각은 더 이상 진격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겠죠. 여기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명량 해전이죠.

패전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안까지 600~700척이 이동했다는 것은 이들이 단지 바다 유람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 해 줍니다. 충청도의 일본군이 기대한 것은 이것이었고, 이 기대가 완전히 꺾이자 바로 철수합니다. 임진년의 악몽이 떠올라서겠죠.

3. 재조지은
적이 물러간 후 선조는 뻔질나게 명 장수들의 거처에 드나듭니다. 뭐 늘 하던 짓이었습니다만... 이번 경우는 좀 특이했죠.
25일 부총 해생, 중군 팽우덕
26일 유격 파새, 참장 양등산
27일 지휘 왕내징
28일 유격 우백영
29일 부총 오유충
10월 3일 유격 파귀

선조가 거처를 방문해 주례를 베풀고 선물을 준 명단입니다.
이 중 해생, 파새, 양등산, 우백영, 파귀는 직산 전투 참가자죠. 특히 파귀의 경우 사관이 "직산 전투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갔다"고 직접 적고 있습니다. 선조가 이들을 찾은 이유는 9월 중후반의 일본군 추격이 아닌 9월 초에 있던 직산 전투를 치하하기 위함이었죠. 거기다 최소한 임금을 업신여기지는 않았던 이들에게 선조는 큰 절로 예를 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오만방자하던 명 장수들도 당황한 모양입니다. -_-; 거기다 이게 명 장수들에게도 퍼졌는지 우백영 때부터는 아예 읍, 반절을 서로 하는 걸 먼저 제안합니다.

직산 전투가 나름 가치가 있다 하나 일본군을 확실히 몰아내는 수준이 아니었고 그 이후의 추격 역시 일본군의 후퇴를 대충 추격하다 만 것을 볼 때 이것은 확실히 정치적인 이유로 한 거였죠. 이렇게 직산 전투는 직산 대첩으로, 넘어서서 재조지은의 대표적인 전투로 올라섭니다. 현대의 중국과 일본도 직산 전투의 전과를 과장하긴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영역으로 올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선조였죠.

이것은 조선군에 대한 포상에도 이어집니다. 충청도가 점령된 상황에서도 버티면서 공을 세운 충청병사 이시언은 가자되고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보고가 쏟아지면서 이에 대해 각종 상을 내립니다. 조선 수군에도 포상이 이어져서 11월 16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거제 현령 안위가 되고, 기타 여러 장수들도 차례차례 벼슬을 받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안위는 그 공이 인정된 건지 전라우수사의 자리에까지 오르죠. 하지만 이순신이 받은 것은 은 20냥이었습니다. 여전히 정 3품 절충장군이었던 거죠.

한편으로 조경남이 난중잡록에서 직산 전투를 과장해서 적고 (들은 걸 적은 거니 뭐라 하긴 좀 그렇지만 -_-; ) 이후의 기록들에서 명에 대한 충성을 강화하면서 직산 전투는 완전히 직산 대첩이 돼 버립니다. 직산 전투를 별 신경 쓰지 않은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 정도였죠. 나중에 연려실기술에서는 명이 이렇게 도와 줬는데 마치 적이 그냥 물러간 것처럼 적었다고 류성룡을 디스합니다. -_-;

이렇게 직산 전투는 대첩이 되고, 명량 해전은 적을 조금 꺾은 전투로 바뀌어 버립니다.

4. 조명연합군의 진격
10월 초, 명군은 남진을 시도합니다. 6일에 전라도로 가는 장수들의 명단이 있는데 이여매, 해생, 파새, 파귀, 우백영 등이었죠. 이들은 7일 내려갑니다. 8일에는 선조가 직접 백성들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하죠.

21일 제독 접반사 장운익의 장계가 올라오는데, 이 병력은 15일 전주에 도착하고 16일 임실까지 이르렀고, 남원과 구례에 소규모의 병력을 보내 약간의 전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장수들은 곡성에서 일본군이 물러난 것을 공으로 삼고 구례나 남원을 탈환할 생각은 하지 못 했다고 하죠. 난중잡록에서는 이 때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백성들을 또 학살하고 곡식을 뺏고, 주인 없는 논에 있는 곡식을 모두 거두어 갔다고 합니다. 그나마 안심하고 다시 농사를 지으려 했던 백성들은 여기서 또 다시 떼죽음을 당한 거죠. 점령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 분풀이로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명군과 조선 조정의 징병 요청...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겠죠.
한편 케이넨의 일기를 보면 가토 군은 22일까지 상주에 머무르다가 남하한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초에는 영천까지 후퇴했고, 명군 역시 경상도에서도 계속 추적해 왔구요. 5일에 경주에 도착한 후 9일 마침내 울산에 도착합니다. 케이넨은 드디어 포구에 도착해서 집에 갈 수 있게 돼서 기쁘다고 적었는데... 글쎄요. 전쟁이 끝나야지요.

남원이 탈환된 게 23일이라고 기억하는데 어디서 본 건지 모르겠네요. -_-; 이후 명군은 재정비를 위해 다시 후퇴했고, 일본군은 해안의 성에 머물면서도 다시 여러 차례 진군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라도의 경우 함양에까지 이르렀고 조선 수군은 해남, 장흥 등에서 일본군과 계속 맞서 싸웠죠. 아직 명군은 적을 확실히 밀 정도의 병력이 되지 못 했고, 조선군은 도망간 수령을 계속 처벌하고 임명하면서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전라, 경상도의 중부는 양군이 대치하는 중립지대로 남았구요.

조선군도 적은 수로나마 적이 진격하는 과정에서 게릴라전으로 맞섰고, 후퇴하는 과정에서는 충청 병사 이시언 휘하의 병력, 전라 감사 황신 휘하의 김언공 등이 후퇴하는 적에 맞서 싸운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창원까지 쳐들어 간 장수도 있죠. 다만 이런 장계들이 너무 중구난방이라서 선조가 정확히 알아보고 상을 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너무 많아서 여기엔 넣지 않겠구요. -_-; 조경남도 이 시기에 의병을 일으켜서 남원 등지는 물론 진주 부근까지 쳐들어가서 신나게 싸웁니다. 이것에 대한 얘기는 다음 편에 하도록 하죠.

12월 9일 경상우병사 정기룡은 경상도에서의 적의 상황을 보고합니다. 여기서 경상도 남해안 전부 적이 웅거하고 있고 의령, 진주, 합천 등지까지 적이 몰려와서 약탈하고 돌아간다고 했죠.
이후 전라 감사 황신의 장계도 올라오는데 여기서는 해남, 보성 흥양 등지의 적이 순천으로 점차 후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12월 16일의 장계에 적이 남원에서 장수 일대까지 올라와서 공격한다고 하면서 방어의 어려움을 토로하죠. 이 때 영호남의 상황은 다수의 적은 각 왜성에 웅거하면서 소수로 치고 빠지고, 역시 소수의 조선군이 거기에 맞서는 형태였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정유재란의 전투 양상이죠.

이런 상황에서 명군이 속속들이 증원됩니다. 오만 오천에 달하는 명군이 증원되었고 선조는 명군이 올 때마다 장수들을 접견하느라 바빴죠. 12월이 되자 명군은 남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선조가 따라가겠다고 난리치죠 -_-; 덕분에 경상도로 남하하는 동안 전라도의 적이 치고 올라가면 어쩌나, 내려가기 전에 종묘에 제사 지내고 가야 되나, 왕이 내려가면 세자가 대신 나라를 다스려야 되나, 내려가기 전에 중요한 건 결제하고 가라, 내려가면 어디서 머물러야 되는 쓰잘데기 없는 논의가 계속되죠. -_-; 남행하기로 한 날짜는 12월 11일, 하지만 군문 형개가 반대하기도 하고 조정에서도 의논이 맞지 않아 취소됩니다. 이래저래 정리하기도 싫은 소동이 있은 뒤 명의 대군이 남하합니다. 목표는 가장 포악한 적이 기다리고 있는 울산이었죠. 정유재란 발발 반년만에 명군 3만 6천, 조선군 1만 1천 5백, 거의 오만에 이르는 대군이 남진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이든 명이든 이것으로 전쟁이 끝나기를 바랬을 겁니다.

울산성을 지키던 장수는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만 육천명.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호랑이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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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뭐 이렇게 자질구레한 것들이 많은지 -_-; 여기서 끊겠습니다. 정유년을 이걸로 끝내고 싶었는데, 할 얘기가 너무 많네요.
다음 편이 진짜 [호랑이 사냥]입니다. 1차 울산성 전투와 조선 수군의 재건 등을 살펴보도록 하죠.

... 근데 생각해보면 "일본군 총퇴각은 명량 해전 때문이다" 이 한마디 하려고 이렇게 긴 글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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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ked_In
11/05/09 18:32
수정 아이콘
그냥 아무리 봐도 결론은 하나네요. 오오 충무공!! 닥치고 찬양!!
우유친구제티
11/05/09 18:51
수정 아이콘
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11/05/09 19:00
수정 아이콘
이번편은 '본격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때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군요;; 제발 통제사 맡아달라고 할때는 언제고.
11/05/0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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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퇴근하기전에 정확히 캐치해서 보고가네요^^ 매번 좋은글 감사합니다~
호떡집
11/05/09 19:10
수정 아이콘
어제밤에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명량해전 관련해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읽은 기사가 있는데요..

선조 94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1월 10일(정유) 5번째기사
제독 총병부에 적군의 동태와 대비책, 우리 장수의 전과를 알리게 하다

(전략)지금 앞서의 연유에 따르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후략)


선조가 쓴 글인데 명량해전을 작은 승리라고 폄하 해놓고 적선이 서해로 못들어 올거라고 모순된 글을 적어놓았네요. 작은 승리가 겸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왠지 선조 명의로 중국에 보내진 글이라서 더 열받더라구요.
하야로비
11/05/09 19:48
수정 아이콘
항상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눈앞의 적군보다 무서운 등뒤의 무능한 아군들을 보고 있자니 제가 분통이 터져서 쓰러질 것 같습니다.
보는 우리도 이런데 충무공은 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ㅠ_ㅠ 엉엉엉 장군님 저라도 가지세요ㅠ_ㅠ
미스터H
11/05/09 19:54
수정 아이콘
감사히 잘 봤습니다. 진짜 명량해전덕 아니었으면 어찌됬을지 깜깜하네요;
무리수마자용
11/05/09 20:11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누나들 파마 염색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한줄기 단비와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m]
그..후..
11/05/09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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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이보게 글쓴이 양반..댓글 달 시간에 어여 다음편을 써주시게..

늘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위의 반말투 이해 하시죠?..^^;;;
Je ne sais quoi
11/05/09 22:34
수정 아이콘
시작할 즈음에 선조 이야기는 역시 다 이 뒤의 이야기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군요!! 이런 무능하고 방해만 되는 은혜를 모르는 놈 같으니...
벤카슬러
11/05/09 22:4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정말 정유재란은 충무공으로 대부분 설명되네요.
"충무공 파직으로 시작된 전쟁이 충무공의 명랑해전으로 반전되어서 충무공에 의해 마무리되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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