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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08 23:40:11
Name nickyo
Subject [일반] 지난 날의 그 길 모퉁이 위에 서서 마주한 그대.
일요일은 내게 나무늘보의 날이다. 월요일 부터 토요일까지 나름의 일상을 견뎌오던 날 집 방구석에 추욱 던져놓는 날. 가끔 친구들과 만난다거나 하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은 집에서 늘어져있다. 머리도 감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고 트렁크 팬티 한장으로 훌렁훌렁 거리며 라면을 끓여먹는게 일주일의 낙이라 할까. 그치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어버이날을 기념하여 부모님께 외식을 선물하고, 이왕 기어나온김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했다.


친구와는 여전히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게 바쁜, 치열한, 열정적인 그 친구와 그 열기를 조금 나누어 받을 셈인 나는 커피숍 모퉁이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긍정적인 낙관과, 힘든 비관들이 쏟아지고 서로에게 몇 마디 위로를 건넨다. 조금은 오그라 들지만 우리 힘내자며 화이팅을 하고 돌아섰다. 해는 이미 어둑어둑 진 채 밤의 네온사인들이 점등되어있었다. 고유가 시대라고 TV 속 아나운서가 엄한 얼굴로 말하지만, 이렇게 밤거리의 휘황찬란한 모습을 보노라면 그리 와닿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지구에게 계속 심한 짓을 하고 사는 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집에 그냥 들어가기는 아쉬워 귀에 이어폰을 끼고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술 한잔이나 떠들썩한 사람들보다는 되려 이런 것이 사람을 다스리는데에는 더 좋은 것 같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해에 유행한 노래를 들으며 골목골목을 돈다. 주황빛 가로등을 지나고 빈 쓰레기 분리수거함을 지나, 세련되어진 학교의 갓 지은 교문도 지나 문 닫힌 떡볶이 집들을 거친다. 아무 생각없이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문득 발에 무엇이라도 걸린 것 처럼 걸음이 멈추어진다.



한적한 동네의 골목길 끝, 몇 발자국 앞의 휘황찬란한 거리. 그 직전 길모퉁이에 서서 나는 그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시청자고 저 곳의 사람들이 배우인 것 처럼, 웅성웅성 거리며 바삐 지나다니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보았다. 밤 열시의 번화가. 우연찮게도 두달을 조금 채우기 전에 난 그 거리에 다시 돌아왔다. 그때는 그녀가 내 곁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었다. 집에서 좀 여러번 엎어지면 코 닿을 동네를 두 달만에 나온것도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보다 더 놀라운건 따로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뚝 하고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그 사람의 향기였다.



스크린 안에는 그 사람과 내가 있다. 번화가는 자주 오지 않는다며 두리번 거리는 당신과, 잘난 듯 내가 살던 동네를 들떠서 소개하는 내가 있다. 펌 한지 얼마 안된 머리의 구부러진 곡선이 찰랑이는 당신과, 짧은 머리에 야상 포켓속으로 손을 쿡 찔러넣은 나. 하늘색 간판으로 된 화장품과 잡화가 가득한 가게로 들어가서는 내게 선물 한번 해준 적 없다며 기다란 외제 과자를 꺼내오던 당신. 동생 남자친구가 엄청 맛있다며 좋아했으니 나도 좋아할 거라며 가방도 없는 내게 불쑥 건넨, 들고 다니기에는 조금 커다랬던 과자. 가게에 들어가자 헬로키티가 새겨진 납작한 알류미늄 케이스에 비타민이 들어있는 것을 보며, 당신이 과자를 사러 안쪽으로 들어갔을때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재빨리 샀던 비타민제. 우연찮게도 당신이 준 과자에 대한 답례가 되어버렸지만, 아까워서 못 먹겠다며 가방에 조심스레 넣었던 당신.



카메라는 그들의 뒤, 혹은 옆을 따라 쭈욱 이동해간다. 8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를 지나, 주황색 천막이 이어진 포장마차들의 맛있는 냄새를 맡으며 높은 빌딩의 극장에 들어간다. 당신의 시선은 스크린에, 나의 시선은 당신의 옆모습에 고정되어있다가 당신의 고개가 조금 움직일때면 재빨리 얼굴을 앞으로 돌린다. 영화의 내용이라곤 당신의 매끄럽게 내려온 턱선과, 성숙한 누나의 향기와 그것들 사이에 작게 자리잡고 있는 귀걸이 하나 하지 않은 귀여운 귓볼이 다였던 내게 신나하며 영화를 설명해주던 당신. 극장을 나와 한층 더 어두워져서 이제 네온사인이 드문드문 자리잡게된 어두운 거리를 지나 바깥 풍경이 다 보이는 노래방을 찾았다. 남자와 단 둘이 노래방을 온 적도, 아침까지 이렇게 논 적도 나 말고는 없다며 들릴 듯 말듯 말하곤 수줍어진 얼굴이 들킬 까 싶어 앞에 놓여진 맥주를 금세 마시는 당신이 클로즈업된다. 아마도 그 때 내 심박수는 정상치의 두 배는 되지 않았을 까.



야경이 예쁜, 고층빌딩의 노래방에서 당신을 향해 마음을 담아 노래부른 날. 당신과 주고받은 답가들이 기억난다. 처음으로 다른사람에게 마음을 다해 노래부른다는 것이 이런것이라는걸 느끼게 해 주었지. 당신의 시선은 나에게로, 그러나 나는 차마 당신의 시선을 마주한 채 노래하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노래방의 벽면을 뒤덮은 거울로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못생겨서 조금 더 작아진 듯 한, 그렇지만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감동을 주고 싶다는 마음에 부른 그 노래들. 당신이 촉촉해진 눈빛으로 손뼉치며 바라보던 그때의 그 노래들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남아서 돈다. 그 곳에서 차마 손 한번 잡지 못하고 서로 닿을 듯 말듯 한 거리를 가지고 새벽의 거리를 걸었다. 화면은 우리의 닿을 듯 말듯 한 손의 사이를 계속 비춰주었겠지. 당신과 나는 결국 아침까지 술을 마셨다. 엄마같다는 내 말에 실망하던 당신, 사실 누나가 실망하기를 바라며 던진 말임을 그대는 알았으련지. 누나는 조금 새콤해져서는, 내가 그렇게 편한사이면 좋냐고 되묻는 말에 난 누룽지 탕이 맛있다며 숟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두 달 만에 다시 찾은 밤의 그 거리에서 당신의 향기를 느꼈다. 스크린에는 당신없이 우두커니 홀로 서 있는 내 뒷모습이 비추어지는 것일까. 그때 우리가 걸었던 그 거리들 사이에 당신과 내가 혹시 있을까 싶었던, 그래서 지난날 그 길 모퉁이에 서서 하염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래도 당신은 없음을 다시 알아 챈 오늘 내 뒷 모습은 어떤 쓸쓸함인가. 이제는 당신이 내게 없다. 지난 날이 되어버린 당신은 이 거리 어디에도 없다. 머리카락이 얇아서 향기가 나지 않는 다는 당신에게 머리카락 냄새를 맡는 척 다가가 안았던, 그러자 조금 놀란 당신이 내가 당신을 안는 것보다 더 꽈악 날 안아주었던 그 날이 지난날이 되어버린 오늘 다시 찾은 이 거리에서 영화는 끝이 나겠지.



지난날의 그 길 모퉁이에서 다시 떠오르는 당신의 파편들에 추억을 되감는다. 당신은 여전할까,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당신은 내게 가라앉아 드문드문 못 잊은 사람이 되어 떠오른다. 당신이 지난날의 사람임을 깨닫고 밀려오는 허전함에, 조용히 그 거리로 들어서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 거리에는 나와 당신이 있을 것 같아서 돌아선다. 나무늘보가 되지 않았던 일요일 어느 밤에, 당신은 내게 아름다운 사실로 시간에 흘러가지 않은 채 그렇게 아련히 그 거리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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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개인적인 나가수 순위는

1등 김범수 박정현
2등 김연우 임재범 이소라 BMK
3등 윤도현

초심이 변했어 YB형님들
다시 내게 돌아와줘요. ROTC롹앤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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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파괴자
11/05/08 23:49
수정 아이콘
아이. 이 미친 제목.. 제목만으로 심장이 멎을뻔 했네요
가치파괴자
11/05/08 23:59
수정 아이콘
글을 다시 정독하니 마지막 문단이 가슴이 울리네요,
으아, 참.. 아름다운 글 잘봤습니다..
一切唯心造
11/05/09 00:22
수정 아이콘
마지막 문단이 좋네요
11/05/09 02:48
수정 아이콘
아름다운 단편이네요...심하게 글 잘쓰십니다^^ 언젠가, 쓰신 글들 추려서 책을 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ridewitme
11/05/09 08:13
수정 아이콘
오늘은 유독 재밌네요 [m]
11/05/09 10:12
수정 아이콘
[m]
Noam Chomsky
11/05/09 10:36
수정 아이콘
좋네요. 이런 절절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게, 또 이런 감수성으로 추억을 되뇌일수 있다는게 정말 부럽네요.
글 보는 내내 성시경의 거리에서가 떠오릅니다. 종신옹이 노랫말 썼는데 닉요님의 글을 보니 종신옹이 이런맘으로 가사를 썼겠단 생각이 드네요. [m]
다다다닥
11/05/09 19:26
수정 아이콘
nickyo님 팬이예요~~

너무너무 재밌어요~~

잘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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