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에 나온 오주연문정전산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실학이 한창 퍼지는 와중에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서 지은 책이라고 하는데요. 역사, 천문, 지리, 문학, 음악, 농업, 광업, 화폐 등등 많은 항목을 다룬 백과사전 형식의 책입니다.
거기에 흥미로운 글이 있죠.
"임진년 왜추가 창궐했을때 영남의 고성이 바야흐로 겹겹이 포위를 당해 망하는 것이 조석지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 때 어떤 이가 성주와 매우 친했는데 평소 매운 색다른 기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비거를 제작해 성중으로 날아 들어가 그의 벗을 태워 30리를 난 뒤 지상에 착륙해 왜적의 칼날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서양에서도 그렇게 비거를 만들어서 날린다는 말이 있는 걸로 봐서는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서양에서의 일도 적어 놓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여기에 우리나라의 일이 적혀 있는 게 참 특이하죠.
신경준의 여암전서 거제책에서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이 등장하구요.
이제는 나름 유명해졌을 겁니다. 임진왜란 때 비행기가 있었다, 라는 말이요. 외국에서야 '한국은 뭐든 지들이 세계 최초라고 주장한다'는 것의 근거 중 하나로 쓰이는 모양입니다만.
현재의 진주에서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이건 한 발 더 나아가서 진주성이 포위당했을 때 비거로 몇 차례 왕복하며 식량 등을 수송했고, 왜군에 대해 원시적인 폭격도 했다고 하죠. 여기서 종이 폭탄, 지포를 개발했다고 하네요. 거기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정평구. 전라도 김제 출신으로 전라우수영에서 군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진주성에 있었던 것 역시 진주 병영 별군관으로 임명된 것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 정평구를 모시는 종교(라고는 하지만 무당 쪽 계열인 거 같더군요)도 있다고 합니다만.
비거의 기록은 이게 전부고, 다른 게 있다 하더라도 이 이상을 넘지 못 합니다. 설계도가 없으니까요. 설계도를 그린 게 있다고 합니다만 발견은 되지 않구요. 다만 왜사기에 진주성에서 뭔가 날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이 덕분에 그 존재에 대한 교차검증만 될 뿐입니다.
과연 그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진주성의 높이와 바람 등을 이용하면 글라이더처럼 활공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다만 그렇다면 반대로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불가능하죠. 오주연문정전산고 등에는 풀무질을 응용했다고 하는데 설마 초보적인 단계의 동력기관을 만든 게 아니냐는 추측을 할 수 있죠. 형태는 고니나 따오기. '복중을 쳐서 바람을 일으키면 공중으로 떠올라 백장(300m)이나 날아갈 수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동력기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지죠. 따라서 세계 최초의 '비행기'(글라이더는 엄격한 기준에서 비행기로 분류되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거죠. 이외에 쏠 방放 자가 나온다는 걸 생각해서 신기전 형식의 로켓형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도 가능하더군요. 다만 이 경우엔 정말 목숨 내어놓은 거지만 -_-; 비행기 역사 초기에 목숨 안 거는 게 어딨겠어요.
딱 여기까집니다. 이 이상의 기록이 없는 이상 어떤 추론도 불가능하죠. 그래도 현재는 방송 등을 통해 많이 알려졌고, 과천 과학 박물관에도 전시돼 있죠. 이제는 한두줄로나마 항공 역사 설명할 때 언급되기는 하는 모양이더군요. 한국 한정이겠지만요 ^^; 이런 얘기들이 역사에는 많은 모양입니다. 분명 있는 거 같긴 한데 그 실체를 확신할 수 없는... 저는 어느 쪽이냐를 따지자면 문헌고증학 쪽을 좋아해서 이런 건 좀 신경쓰지 않는 쪽이죠. 눈 앞에 있는 책들 파기도 바쁜데 이런 식.
음... 후삼국 얘기 안 쓰고 갑자기 왜 이 얘기 하냐면요.
이 비거에 대해 처음으로 소설을 쓰신 분이 저희 아버지시거든요. 비거에 대해서 아무도 신경을 안 쓰던 90년대 초반, 국문과 출신이신 어머니 힘을 빌려 한자 원문들을 찾아보며 여기 문의하고 저기 문의하고 하셨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정작 다 쓰고 나니 출판사는 부도났고, 겨우 다시 2000년대 초에 '비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죠. 그 때 여기저기 초대 돼서 인터뷰도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역사에 관심 많았던 저는 이거 보면서 나중에 뭐 할까 생각했더랬죠. 그리고 2007년. 잊혀진 우리 나래(이게 원래의 제목이었습니다) 비거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과학 박물관에 전시할 비거 모델을 만드실 무렵이었는데, 휴가 나와서 도와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역시 역사 쪽 전문가가 아니시다보니 찬밥 대접을 많이 받으셨죠. 괜히 몇 초 나오는 인터뷰 하겠다고 서울 부산 왔다 갔다 하시고...
그 때 그 모습을 본 아들은 역사와 문학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 해 둘 다 하고 있고 (바꿔 말하면 둘 다 제대로 못 하고 있고) 순수 공돌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에 비해 손재주가 아예 없어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도 못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따로 연구한다면 모를까, 사학도로서 이걸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리 없어 보이네요. 일다 저나 아버지나 비거에 대한 연구는 설계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여기까지가 한계다고 생각하고 있죠. 다만...
감상적인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역시 3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 기록들을 다 맹신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많이 부딪히죠. '영남 고성의 태수를 탈출시켰다'고 하는데 이 고성이 어디인지, 진주성에서 정평구는 전사했다고 하는데 그럼 이 전에 있었던 것인지, 진주성이라면 1차 전투인지 2차 전투인지 등등... 위에 올린 기록이나 가문 족보 등에서도 그 이상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의 경상도에서 누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다각도적인 접근이 필요하겠죠. '~' 뭐 제가 이어받는다면 이게 제 몫이겠죠?
결국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무엇인가가' '날았다' 정도입니다.
잠깐 부산 내려왔다가 잊혀진 우리나래를 보면서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다시 올라가 봐야 돼서 이만 접겠습니다.
+) pgr에서 활동하시는 많은 아버지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아빠가 돈 버는 거 말고 딴 거 하고 자식들이랑 안 놀아주고 그러는 게 밉고 왜 저러나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게 자식들에게는 또 다른 꿈이 될 때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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