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파세요~"
아파트의 상가 옆에 자그맣게 딸린 콘테이너 박스에는 꽃과 분재를 파는 가게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꽃집들에 비해서 수수한 꽃들에, 지긋한 노년의 꽃집 내외가 꽃을 손질하는 포장법은 굉장히 간단하고 단조로워서, 화려한 장미마저 그 숨이 한 숨 죽는듯한 꽃다발이 되고는 했다. 어쩐지 그런 수수한 매력이 끌려서 가끔 꽃을 살 일이 생기면 그곳을 이용하였다. 꾸밈없는 꽃은 생화 그대로 생명력만큼은 굉장히 두근거렸기에, 한 번 마음에 들면 다른 꽃집의 화려한 것들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회색빛으로 흘러가는 매일에 간혹 쥘 수 있는 이 수수하지만 고동치는 꽃을 사게 되는 일은 몇 안되는 나의 소박한 행복이었다.
날씨는 화창, 가을의 바람이 선선히 겨드랑이를 간질인다. 햇볕은 구름 사이로 요리조리 몸을 틀며 인사한다. 잘 다린 양복에, 한 껏 광낸 구두를 신고, 약간은 벗겨진 머리를 가릴 멋쟁이 중절모도 썼다. 면도도 했고, 양치에 가글까지 하며 요란을 부렸다. 심지어 평소엔 질색하던 향수도 손목과 발목에 톡톡 두어번 뿌리니, 왠지 어릴 적 두근거림이 다시 살아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이런 바보같은, 한 두살먹은 애도 아니고. 가지런히 포장된 꽃다발을 소중히 품에 안고 그녀를 맞이할 기분에 약간 들뜨는 소년의 마음을 침착하게 두드렸다. 그만둬. 그만둬. 애가 아니라구.
마음속에선 아직도 쿵쾅거리는 소년의 발걸음이 전혀 느려지지 않았는데, 나이든 아저씨의 발걸음은 마음도 몰라주고 애석하리만치 빨랐다. 어느 새 그녀와 만날 장소에 도착하니 조금 빠른 걸음에 가쁜 숨을 쉬었다.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있는 듯, 그렇지 않은 듯 했다. 학생모를 쓰고, 서로 손을 스치는 것도 두근거려서 어쩔 수 없었던 그 시절. 함께 몇 번이고 발맞추어 걸었던 거리의 보도블럭은 모두 바뀌어 있었고, 주변의 나무도 건물도 모두 새로운 것처럼 어색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이곳에 발걸음을 한 발, 두 발 걸어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들은 다시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빛 바랜 사진은 오색빛깔의 고운 색채가 덧씌워질테다. 그녀는 이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30년전의 오늘, 우리는 이 곳에서 헤어졌다. 지금처럼 서로를 향해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통금이 있었고, 두발규정이 있었고, 부모님이 엄했고, 손 잡는데도 벌벌 떨어야 했던 그런 시절. 그때의 떨림. 숨결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우면서도, 그 설레임이 온 몸을 약간 붕 뜨게 했던 청춘의 행진곡. 우리는 그것에 대해 결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과 그때가 한가지 달랐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시원스레 버릴 수 없었다. 근사한 직장을 얻고, 멋진 아내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이 벌써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었건만, 난 아직도 마음속에 남은 약속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난 나쁜 남자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내 가슴속에 남아있던것은 '사랑'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걸어온, 그 시절에 대한 이정표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의 아내를 가장 많이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난 사랑을 간직해 온 것이 아니다. 그저, 내게 청춘을 선물한 사람은 내 청춘의 증거가 되어줄 수 있었고 그것은 내게 젊음이 있었음을 다시금 느끼게 해 줄것이다. 그것 뿐이었다.
그녀는 내 기억속에서 아직도 곱고 새하얀, 그리고 똘망똘망한 아이로 남아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시간은 내 기억이 쫓아오기엔 너무 빨랐다. 그렇게 애닳고 그리웠건만, 그녀의 눈동자는 컸었는지, 그녀의 코는 오똑했었는지, 심지어 그녀의 웃음소리가 어땠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그 웃음이 화사했다는 것만, 그 손길이 고왔다는 것만, 그녀의 주변은 언제나 따스한 파스텔 톤이었다는 것만이 확실하게 새겨져 있다. 째깍째깍. 조금씩 가슴의 고동이 사그러들때쯤, 멀리 보이는 저 대로변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단아하고, 멋스럽지만 화려하고 사치스러워보이지 않는. 그녀일까 하는 생각에 새삼스레 옷깃을 여미고 모자를 고쳐썼다. 그렇지만 그녀는 다른 방향의 횡단보도를 지나 뒷모습만을 남긴 채 사라져갔다. 아쉬운 입맛을 씁쓸히 다셨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해와 구름이 번갈아 머리위를 지나도록, 수 많은 청년들이 스쳐지나가는 동안에도, 더 이상 설레이지 않았다.
수수한 꽃다발을 가만히 공원의 벤치위에 두고, 담배에 불을 한모금 붙였다. 해가 빌딩 저편으로 넘어가고, 어둑어둑한 하늘이 땅까지 떨어질 무렵에, 나는 붉게 타들어간 담배를 무심히 바닥에 던졌다. 오늘이 아니었을까, 어제였을지도 몰라. 아니면 내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이 아니라는게 중요했다. 마음의 구석에 구멍이 뚫린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움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딱딱하고 차가운 나무의자에 앉아, 손가락이 닿는게 떨려 언제나 어깨가 닿지 않는 거리로 앉고는 조금씩 조금씩 엉덩이를 들썩여 다가갔던 그 자리에서, 그녀는 어느새 그 화사한 웃음마저도 희미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고운 색깔에 이상한 모양으로 바뀐 벤치에서 일어나려고 허리를 숙였을 때에 익숙치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였다. 얼굴에 함박꽃처럼 미소가 피어오른것이. 바뀌어버린 벤치의 아래에는, 줄기만 휑하니 남은 한 송이 꽃이 바람에 따라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그녀를 만나지 못해서 다행이야. 비로소 난 40년에 걸친 긴 작별을, 아니. 졸업을 한 기분이 들었다. 내 청춘은 아직도 건강했다. 오늘은 아내가 좋아하는 순대를 사서 들어가야겠다. 멋쟁이 중절모를 옆구리에 끼고, 수수한 꽃다발을 공원에 내버려 둔 채, 기다릴 그녀를 만나러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꽃다발 대신 순대 한봉지를 사들 생각에 왠지 모르게 신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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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써보고 싶은 글이 생겨서
써 보았습니다.
별로 재미는 없지만..
읽어주셨으면 어떤 느낌인지 코멘트를 달아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평소에 써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한 부분을 그려내려 했더니
어렵네요.
금요일 저녁입니다.
다들 즐거우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