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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9/16 01:13:28
Name 글곰
Link #1 https://brunch.co.kr/@gorgom/29
Subject [일반] (삼국지) 송건, 가장 보잘것없었던 왕 (수정됨)
  후한 말엽의 군웅할거 시대에 스스로 황제나 왕을 자처한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원술이 옥새를 쥐고 황제를 자처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했지요. 조조는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한나라의 신하로써 위왕에 책봉됩니다. 이후 유비가 한중왕을 칭했지요.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황위를 선양받자 유비 역시 한나라의 계승을 천명하며 황제의 관을 썼습니다. 손권 역시 훗날 스스로 황제가 됩니다. 또 요동의 군벌이었던 공손연 역시도 연왕을 자칭하였다가 토벌되었습니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비록 수준 차이는 있을지언정 적어도 한 지역을 제패할 만한 실력이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른바 ‘동오의 덕왕’으로 알려진 엄백호는 실제 역사에서 왕을 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 송건을 아는 분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동탁이 죽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수많은 군웅들이 일어났습니다. 송건도 그런 무리 중 일원이었는데요. 그는 중원에서 서로 치고받으며 명멸한 수많은 경쟁자들과는 다른 방식을 택합니다.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세력을 구축한 후 자신의 국가를 세운 것이죠. 스스로 하수평한왕에 오른 송건은 연호를 정하고 승상 이하 문무백관을 임명하여 나라의 기틀을 갖추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영토가 고작 현(縣) 하나였습니다. (참고자료 : 삼국시대의 지방 제도 https://brunch.co.kr/@gorgom/7)

  현. 한나라 시대 지방 행정구역의 최소 단위입니다. 규모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만 호 전후였습니다. 현대 대한민국에 견주어 보면 읍면동 단위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콩알만 한 영토지요. 게다가 그가 자리 잡은 포한현이라는 곳은 관중 지역에서도 서북쪽으로 한참이나 들어간  농서군에 속한, 지금의 소수민족 자치구역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당대에는 그야말로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는 깡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송건은 살아남았습니다. 너무나도 외진 곳에 있었던 탓에 구태여 공격할 필요도 없었고, 또 공격해서 얻을 이익도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관중 일대는 마초와 한수를 비롯한 십여 명의 군벌들로 인해 극심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요. 서로를 견제하기에 바빴던 그들은 굳이 송건 같은 피라미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때 그토록 강성했던 원술조차 황제를 참칭한 후 고작 2년 만에 멸망했지만, 그보다 훨씬 보잘것없었던 송건은 너무나도 기막힌 위치 선정과 지나치게 미약했던 세력 덕분에 3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성공적으로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수평한왕의 최후는 슬프게도 비극적이었습니다.

  211년. 이미 중원을 평정한 조조는 드디어 관중으로 진출합니다. 혼란스러운 관중을 평정하겠다는 심산이었지요. 관중의 군벌들은 외부의 침입에 힘을 합쳐 대항합니다. 마초와 한수를 필두로 하여 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승자는 조조였습니다. 이후 하후연이 잔당들을 소탕하고 이민족들을 토벌하며 관중 일대를 안정시킵니다.

  그때까지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던 송건도 더 이상은 조조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천자를 끼고 황명을 받들어 역적들을 토벌하는 입장인 조조로서는 감히 황제를 참칭한 대역 죄인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지요. 214년. 군사들이 마침내 포한현을 포위합니다.

  토벌군의 지휘관은 명장 하후연이었습니다. 거기다 장합과 장기라는 훌륭한 장수들까지 가세한 호화찬란한 진용이었지요.  놀랍게도 송건은 그들을 상대로 무려 한 달이나 버텨냈습니다. 포한현이 워낙 지세가 험준하여 지키기 좋은 지역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나름대로의 능력은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그의 재주로도 천하의 삼분지 이를 차지한 거대한 강적 조조의 군세를 끝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송건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은 모두 참수당했으며, 송건의 백성들은 잔혹하게 도륙되었습니다. 그렇게 송건의 나라는 국명조차 기록에 남기지 못한 채 멸망했습니다.




  송건은 물론 너무나 보잘것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군웅쟁패기에, 그토록 조그만 세력을 지니고도 사서에 이름을 뚜렷이 남긴 자는 송건 외에 없었습니다. 또 그토록 미약한 세력으로 그렇게까지 오래 살아남은 자도 송건 외에 없었습니다. 원소. 여포. 도겸. 원술. 유표. 마등. 한수.......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군웅들이 모두 죽어 땅에 묻힌 후에도 송건은 여전히 살아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격변하는 현대 사회를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소시민들에게 그는 어쩌면 작은 희망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모두 꿈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너무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나 같은 존재도 혹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비록 가능성은 한없이 낮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는 그런 작고 소중한 꿈 말입니다.

  모두가 유비나 조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혹시 송건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런 희망을 지니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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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탄다 에루
19/09/16 01:23
수정 아이콘
이런 인물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Je ne sais quoi
19/09/16 01:2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及時雨
19/09/16 02:02
수정 아이콘
참수엔딩이 우리의 희망이라니 흐흑
19/09/16 04:29
수정 아이콘
저도 이 생각을....
하야로비
19/09/16 08:17
수정 아이콘
이것이 당신의 엔딩입니다
뭐여 XX 살려줘요
19/09/17 12:17
수정 아이콘
한때나마 뜨겁게 불타올랐잖아요?
물론 저는 가늘고 길게 살겠습니다. :)
말코비치
19/09/16 05:04
수정 아이콘
뒤져보니 송건의 유지(?)를 계승한 대중화불국(https://ja.m.wikipedia.org/wiki/大中華仏国_(石頂武)) 이라는 것도 있었군요.
처음과마지막
19/09/16 07:37
수정 아이콘
이미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것 현실에 버티는것 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작은 왕이 아닐가요?

예전 고대왕보다 지금 현대 도시의 일반인이 더 누리는게 많은것 같습니다
19/09/16 07:57
수정 아이콘
셀옹이 있었다면 백도어로 수명연장 시켜줬을텐데 흑흑..
토끼공듀
19/09/16 08:29
수정 아이콘
https://pgr21.co.kr/recommend/2998#114199

프리퀄로 쓰신다는 익주입성전을 작년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달도 안남았네요!

아이씽나!!!
19/09/16 08:39
수정 아이콘
...이 아저씨 무서워...
19/09/16 11:50
수정 아이콘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
이건 복수는 아니지만 무서운 분들 뭐이리 많은가여, 크크크크
19/09/16 09:49
수정 아이콘
오 이 분 비범하신 분
세인트
19/09/16 09:24
수정 아이콘
뭐야 내 몸통 돌려줘요
스타나라
19/09/16 09:35
수정 아이콘
관공. 어찌하여 찡찡거리시오?
세인트
19/09/16 10:13
수정 아이콘
쟤가 오목하는데 3x3 하잖아요
19/09/16 09:56
수정 아이콘
예전에 조인 떡상에 이은 하후연 떡상론이 잠시 언급될 때 하후연의 전승 상대 중 하나로 저 송건이 언급되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cluefake
19/09/16 09:59
수정 아이콘
이봐 자네는 모가지야!
박진호
19/09/16 10:28
수정 아이콘
송건이라는 사람 정도면 너무 좋겠네요.
전 항상 삼국지 시대에서 무슨 인물일거 같나고 물어보면 유비 조조 제갈량이 아니라
뒷줄에서 뛰어가다가 화살맞는 황건적 중 1인
혹은 촉나라 농부 중 1인
조조군 소문 듣고 무서움에 떨고 있는 흉노족 목축업자 중 1인
정도 선에서 골라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19/09/16 10:58
수정 아이콘
그 셋 중에 고르라면 촉나라 농부가 압도적으로 좋아 보입니다. 저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승상님하 ㅠㅠ
19/09/16 14:13
수정 아이콘
인구 94만에 10만 군대를 대외원정 보내는 나라의 농부가 농사만 짓고 살 수 있을리가요...
19/09/16 14:22
수정 아이콘
황건적이면 정말 잘 풀려봤자 청주병으로 병호가 되고, 흉노라면 조창에게 신나게 털렸을 텐데, 촉의 농부라면 물론 징집은 되었겠지만 생존가능성이 앞의 둘보다 높겠습니다. 물론 이릉에 안 끌려갔다는 가정하에...
19/09/16 14:47
수정 아이콘
하기사 촉이면 아무리 상태 나빠봐야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 수준에 준할 정도일 뿐이겠...
아마데
19/09/16 12:48
수정 아이콘
그래도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었으니 꿀물 찾다 죽은 누구보단 낫군요...
홍승식
19/09/16 13:40
수정 아이콘
하후연이 주장에 장합,장기가 부장이라면 못해도 병사만 1만은 되었겠네요.
가호가 1만호 밖에 안되는 나라에서 1만명을 상대로 한달을 버텼다니 대단합니다.
Libertarian
19/09/16 14:04
수정 아이콘
익숙한 지형의 우위를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면 마속보다 군재가 더 뛰어난 것 아닙니까!?
19/09/16 15:12
수정 아이콘
아...여기서 마아속이..
Libertarian
19/09/16 15:5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숫적/질적 모두 압도적 열세인 병력, 30년간 단 한번도 없었던 실전경험, 중간 지휘관 및 인재의 부재, 지형적 우위 이외엔 전무했을 수비 인프라, 하물며 적수는 조위를 대표하는 명장들이 이끄는 정병...송건은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한달을 버텼는데, 마속의 객관적 여건과 송건의 객관적 여건을 비교해보면 두 사람의 재능 격차는 명백합니다. 게다가 송건과 마속 모두 장합이란 동일한 적장을 상대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송건의 명확한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죠. 단순히 군재만이 아니라, 30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해당 지역을 통치해 낸 실적을 감안하면 가히 만능의 인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능력은 흠잡을 데 없으나 야심이 컸기 때문에 군주들로선 수하로 부리기엔 부담스런 인물이므로 하후연이 그를 회유하지 않고 참수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만약 승상께서 변방의 잠룡 송건만 얻을 수 있었다면 북벌의 꿈도 꿈으로 그치지만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송건의 매력적인 인물상은 후대에까지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창작물에서 송건을 모티브로 삼은 대표적 캐릭터로는 은영전의 오스카 폰 로이엔탈을 들 수 있습니다.
19/09/16 16:08
수정 아이콘
과학적 분석 인정합니다. 유비가 생전에 관중 땅과는 그리 인연이 깊지 못한 게 촉 입장에선 아쉬움이었네요. 마초보다 송건이었거늘..
19/09/17 12:18
수정 아이콘
아앗 이렇게 뛰어난 분석이..... 댓글 추천이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19/09/16 21:33
수정 아이콘
신채호 선생이 '묘청의 난'을 얘기하는 과정에서 언급한 말이 기억 납니다. 역사는 6의 역량으로 5의 성취를 이룬 사람은 영웅으로 치지만, 10의 역량으로 11의 목표를 뛰어 넘으려다 실패한 사람은 실패자로 낙인 찍는다고요. 만일 만렙 송건에게 10만의 사병이 있었다면 중원을 통일했을지도?모른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해봅니다. 글곰님께서 직접 판타지 소설을 쓰시면 1부는 예약입니다..
HA클러스터
19/09/17 10:58
수정 아이콘
이거 요즘 유행하는 삼국지 전생물의 모티브로 쓸만하네요.
치열하게
19/09/19 08:22
수정 아이콘
이열.... 좋은 인재를 알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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