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기억 속에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세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일이었다.
그 해 여름,
나는 두오모 광장에서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올려다 보며 경탄하는 환한 미소를 보았고
베니스에서 얇고 기름진 피자의 찝찔하고 맛없음을 같이 성토했으며
인터라켄에서 설익은 컵라면을 나누며 감동하고
파리에서 헤어지며 다음에 만나자 연락처를 나누었다.
헤어질 때는 몰랐지만
홀로 리옹행 기차를 타고 열차칸 복도에서 짐 위에 걸터앉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깨달았다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고.
남들은 군대 다녀와서 성숙해진다지만 예비역 삼년차가 되도록 숫기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한 점 없던 나였지만
뭐에 홀린 듯 문자를 보내고 메일을 보내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았고
꼬박꼬박 오는 답장을 받을 때마다 구름 위를 거니는 듯 몽롱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비록 여행에서 만났던 이들의 단체모임이었지만 몇차례 식사와 술자리에서 얘기를 나누며 더더욱 희망에 부풀었다.
드디어 처음 둘 만의 만남을 약속하였다
약속을 해주었다는 사실 만으로 모든게 다 되었다 생각했다
무슨 말로 고백을 해야할 지 며칠동안 고민했다.
세기말의 크리스마스 이브
토이스토리2는 아직도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른다
그날 길거리 노점상에 선물받은 호랑이 무늬의 작은 고양이 인형은 선명히 기억한다
유명하다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무얼 먹었는지는 알지만 무슨 맛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달떠있는 내게 그녀는 조용히 지갑 속 선배의 사진을 보여주며 오늘 이시간에도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무슨 뜻일까
지갑 속에 저 사람이 너의 애인이냐고 물어야 했지만 그 말은 절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바래다 주며 잘 들어가라 또 연락하겠다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흐지부지
청춘의 백일몽
알량한 저주받을 자존심
여성불신
못난 놈
몇 해 뒤 여름 일요일
진절머리 나는 야근철야에 한동안 못 만나던 친구들과 어울려 시원한 극장에서 블록버스터 한 편을 보고 나오다 그녀를 마주쳤다
잘 지냈어?
여전히 싱그럽고 아름다운 기억 속의 그 모습
여기는 어쩐 일로?
영화보러 왔겠지 무슨 일로 왔겠냐 이 멍청아
응,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그래 그럼
안녕
안녕
스쳐 지난 두번째 만남이 마지막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여보 내일 마트 안여는 날이야! 낼 먹을거 없어! 당장 마트가자!
무한도전의 끝맺음을 아쉬워하다 지상렬의 근본없는 개그에 깔깔대며 소파에 널부러져 있는 삼부자를 못마땅하게 보던 아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알았어 바로 가자
야 니네들 수학 문제집 풀고 방 치워놓고 있어라 엄마아빠 마트 다녀온다
낮에는 봄맞이 집정리 대청소 사역에 동원하고 저녁엔 장보기라니 군대도 일과후 사역은 없다는데 속으로 구시렁대며 집을 나섰다.
저녁 8시 마트에 왜 이리 사람이 많은지
여보 위층 가서 이거랑 이거 가지고 와 여기 식품 돌고 있을께
알았어 자기 전화 들고있어 여기 사람 너무 많다
위층에서 알려준 몇 가지 담으려니 왜 또 이리 멀리들 떨어져있는지 락 걸려있는데 담당자는 어디 간건지
거진 이십분 가까이 뺑뺑이 돌고 내려왔다.
아 또 전화 안받네 전화 꺼내 놓으라니까 폰을 귀에 대고 팔짱끼고 투덜대며 두리번 두리번 돌아보다
그녀를 보았다
마트 안에 그 수많은 사람 속에
왜 그녀가 보였을까
보자마자 어떻게 아 그 사람이구나 알아 볼 수 있었을까
그녀는 여전히 싱그럽고 아름다울 줄 알았지만
살집이 오르고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보이고
화장기 없고 부시시한 머리에 운동복 위에 걸친 패딩
못생기고 버릇 없을테지만 얌전히 어미를 따르는 아이와
나이 오십이 되어가도록 인격도 안쌓았는지 뱃살도 없어 비쩍꼴아 키만 크고 볼품없는 남편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대로 카트를 밀고 사람들 속으로 멀어진다
나는 그녀에게 이십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밥 한 번 뜯어먹은 호구였을까
그녀는 내게 이십년을 간직한 꽃같은 사람이었는데
전화가 울린다
여기 생선 앞이야 여기로 와
살짝 얼떨떨한 마음에 황급히 돌아 보았지만 이미 찾을 수 없다
아내를 만나러 갔다
상기된 얼굴을 숙여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지만
내 아를 낳아준 소중한 사람
내 반쪽
마음을 다스리며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늙은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에에엥 ?? (゚ω゚) ????
그냥 객관적으로 봐도 울 마눌이 훨 미인이구만!!!!
뭐여 개이득!!
역시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피천득 선생 말씀이 정답이구만!!!
신나서 집에 왔다
마눌 사랑한다 충성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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