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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7/17 07:18:36
Name 글곰
Subject [일반] [기사단장 죽이기] 하루키의 자기복제 (스포 약간)
안녕하세요. 글곰입니다.

주말에 하루키의 신작인 [기사단장 죽이기]를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 다섯 개 만점에 두 개 반. 두 개를 줄까 두 개 반을 줄까 고민하다 두 개 반으로 정했습니다. (별점기준은 다음 참조 : https://pgr21.co.kr/?b=8&n=43634)

하루키는 '나'가 존재하는 현실을 차곡차곡 구축하고, 그런 후 그에 대비되는 비현실로 '나'를 전이시키는 기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나'는 그 비현실을 통과의례로 삼아 내면적인 도약을 이루지요. 문제는 이 기법이 너무 자주 쓰인다는 겁니다. 이게 좋게 말하면 하루키스러움인데 나쁘게 말하자면 반복되는 자기복제입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참 좋았어요. [해변의 카프카]쯤 되니 이게 뭥미 싶었습니다. [기사단장 죽이기]에 이르러서는 왜 만날 똑같은 이야기만 하나 싶습니다. 아니 자칭타칭 대작가쯤 되면 다른 이야기도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기복제가 비단 전개 기법에만 해당되는 건 아닙니다. 등장인물 중 마리에는 [1Q84]에 나오는 후카에리과 대동소이합니다. 같은 인물이 이름을 바꿔서 나온 줄 알았습니다. 기사단장은 [해변의 카프카]의 까마귀 소년과 커넬 샌더스를 섞어 놓은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나'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처럼 아내와 사이가 멀어지고,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나 [1Q84]처럼 유부녀와 섹스를 하며, [댄스 댄스 댄스]처럼 친구를 사귑니다. 그러던 중에 [해변의 카프카]처럼 생령도 만나도, [태엽감는 새 연대기]처럼 우물에도 처박히고 말이죠. 아우.

하루키 팬이 이 책을 집어든다면 십중팔구 꽤 실망할 겁니다. 분명 처음 읽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거든요. 이 책의 자기복제성은 그 정도로 심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두 개 반을 부여한 건, 하루키 아저씨가 글을 풀어 가는 힘이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능수능란하게 인물을 배치하고 비현실적인 현실세계를 공들여 구축해낸 후 이야기 속으로 등장인물을 밀어넣는 솜씨는 여전히 일품입니다. 문제는 역시 그 모든 과정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점이죠.

게다가 [해변의 카프카] 이래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과다한 메타포 투입은 이번작에서도 여전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무슨 의도인지도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그런 메타포를 독자의 뇌리에 쑤셔넣으려고 하니, 솔직히 짜증이 납니다. 심지어 그런 경향성을 감추려 하지도 않아요. 작중에서 대 놓고 말하거든요. 메타포! 메타포! 오오 메타포! 나의 메타포 맛 좀 쬐끔만 보거랏!

여하튼 [기사단장 죽이기]는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합니다. 그러나 책장에 꽂힌 이 책을 제가 또다시 빼어들게 될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간에 [댄스 댄스 댄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한 번 더 읽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ps) 하루키의 나이가 어느덧 육십대 중반을 넘어 칠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만, 섹스에 대한 집착은 나날이 도를 더해가는 것 같습니다. '후우 나는 사정했다.' 거 연세도 있으신데 이제 그만하시지... (https://pgr21.co.kr/?b=8&n=53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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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깽이
17/07/17 08:34
수정 아이콘
현실의 나를 비현실의 나로 전이 시킨다.

정말 멋진 표현이네요. 감탄했어요. 해변의 카프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Q84를 이보다 잘 표현하는 문장이 있을까요...

근데 해변의 카프카가 혹평받을때마다 가슴이 아프네요. ㅠ
태엽감는새
17/07/17 08:35
수정 아이콘
또 우물다이브라니..나온지도 몰랐는데 사서 읽어봐야겠네요. 글 감사합니다
17/07/17 09:41
수정 아이콘
이렇게 보니 하루키 소설 하나도 안읽어봤군요
어차피 자기복제라면 하나만 읽어보면 될거같은데
뭐가 제일 재밌나요?
Blooming
17/07/17 11:03
수정 아이콘
제 경우를 비추어 보면, 작품의 발표 순으로 읽다가 지겨워 지실 때 쯤 졸업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yangjyess
17/07/17 09:50
수정 아이콘
하루키는 자기복제의 달인입니다. 그걸 원하는 팬도 있어요. 그 작품이 너무 좋아서(무엇이든간에) 똑같은 책 열번 읽고 스무번 읽고 하는데 비슷한 느낌으로 책 계속 내줘서 고마워하는 그런..
부화뇌동
17/07/17 09:54
수정 아이콘
예술에서 자기복제를 그닥 고까워하지 않는 쪽인데
학창시절 야자시간때 다들 IQ84 들고 있었어도
묘한 반항심떄문에 하루키 작품들 읽어본적이 없네요
이번주에 한번 알아봐야겠군요
도르래
17/07/17 10:07
수정 아이콘
하루키의 자기복제에 대해 저도 같은 생각이예요. 게다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은 읽다보면 말이 많아지셨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좀 고민했지만 이번 신작은 안 보기로 했어요. 그 시간에 댄스댄스댄스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다시 읽는 게 낫다는 말씀도 공감하거든요.
17/07/17 10:18
수정 아이콘
하루키가 대작가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노벨상이 요원한 까닭이겠네요.
모나크모나크
17/07/17 10:34
수정 아이콘
복제느낌 많이 나죠..
그래도 하루키만의, 글을 읽게하는 독특한 문체, 재치있는 비유는 여전한지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Neanderthal
17/07/17 10:37
수정 아이콘
그런데 하루키 문체라고 하는 것이 번역으로도 고스란히 살아날 수 있을까요?...
예전에 일본어를 잘하는 분(통역사)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원본을 읽는 것과 번역본을 읽는 것은 차이가 크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마스터충달
17/07/17 11:06
수정 아이콘
아이러니한게 하루키 문체가 번역을 역번역해서 얻어진 거라고...
서동북남
17/07/17 11:10
수정 아이콘
번역을 제 2의 창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니 뭐..
전 과연 번역 자체가 가능할 지 의문인 문학작품 중에 하나가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입니다.
yangjyess
17/07/17 11:20
수정 아이콘
'차이가 큰 만큼의 하루키 문체' 겠죠. 다른 일본작가의 글을 번역한다고 '차이가 큰 만큼의 하루키 문체' 느낌은 절대 안날테니까요. 번역으로만
외국소설을 접할 수 있는 독자에게는 사실상 그게 하루키 문체나 마찬가지일 거에요. 카프카나 헤밍웨이나 기타 외국작가 문체도 그렇구요. 노인과바다가 번역본이 여러 종류가 있고 스타일이 다 다르지만, 그 모든 번역본에서 헤밍웨이 문체는 분명히 느껴집니다. 일본인 갑과 일본인 을과 한국인 병과 한국인 정이 동시에 하루키 책을 읽었을 때, 일본인 갑을과 한국인 병정 사이의 감상 차이보다 한국인 병과 한국인 정의 감상차이가 훨씬 클수도 있어요. 그 사람이 살면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와 그걸 바탕으로 한 그의 독서취향이 어떠느냐에 따라. 좋은 작가는 그 원본이 펼쳐보이는 세계가 워낙에 크기 때문에, 아무리 번역이 그 원본에 훼손에 가까운 변형을 가해도 대부분의 느낌은 독자에게 전달된다고 봅니다.더군다나 번역자의 역량에 따라서는 오히려 원본보다 더 하루키스러운 번역본이 될수도 있구요.
17/07/17 12:14
수정 아이콘
노르웨이의 숲을 군대에서 한글로 보고, 나중에 일어로 다시 봤습니다만, 아주 크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 그보다는 일본에서 살고 경험을 해서 일본인의 감성을 이해하면서 읽는 것과 아닌 것 사이의 간격이 더 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한국어-일본어 사이의 번역에 의한 내용 전달은 그래도 90% 수준은 충분히 원전이 아니라도 맛보는 걸겁니다.
원문을 보아서 오는 머리의 스트레스가 문학적 감수성을 해하지 않는 정도라면, 충분히 한글로 읽어도 될 정도일 듯 합니다.

그보다, 저는 무라카미 류의 책 또한 한글로 읽고서, 일본어로 꼭 읽어야지 생각 했어서 일본어를 배운 것도 있었는데요.
무라카미 류의 문체가 드라이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한-일 번역가들이 참 번역 잘하는구나... 느꼈었습니다.
(물론 책 전체 보다 보면, 이 뜻이 이런 걸 오역 했구나, 또는 이런 걸 중의적 표현인데, 번역되면서 삭제되어 나가는구나 느낄 때가
한 두군데가 있기는 하지만요.)
1llionaire
17/07/17 11:31
수정 아이콘
그래도 국내출판사가 하루키 작품 낼려면 선인세로 20억 정도는 줘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장르소설 좋아하는데, 하루키는 아직 안읽어봤습니다. 읽어볼만 한가요?
17/07/17 11:53
수정 아이콘
하루키는 예전 단편들이 참 좋았습니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이후로 시점이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뀝니다.

그 이후로 몰입이 잘 안되더군요. 그전에는 주인공에게 나를 대입시켜서 읽어나갔는데 시점이 바뀐 이후에는 잘 안됩니다.

여전히 글을 쓰는 능력은 탁월한 것 같습니다. 표현력도 정말 좋구요.

하지만 예전 단편들이 더 좋습니다.
17/07/17 12:08
수정 아이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이랑, 단편집 정도를 보았습니다만,
조금 뭐랄까... 헛헛한 느낌의 소설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류 랑은 어쩌면 정반대 스러운 내용이랄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 중에서 예를 들면 한 챕터 정도는 빼고 읽어도, 전혀 소설을 덜 읽은 느낌이 안날 것 같습니다.
역으로, 전체 중에 한 챕터만 읽어도, 전체 중의 그 챕터 분량 만큼의 느낌이나 감동은 다 충분히 받은 듯한..

그에 반해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참 독합니다.챕터 중간 중간에 자극적/엽기적/비일상적 내용이 가득합니다. 거기에다 전체가 맞아떨어져 가서,
마지막에 결말 부분에서 안그래도 충격적인, 비일상적인 내용을 그립니다만, 아예 작살을 내버리는 결론으로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거기다 무라카미 류도 섹스 관련 내용, 연쇄 살해 관련 내용, 피어싱이나 원조교제, 테러 등도 다 다룹니다만, 좀 다 경우가 다른데요.
링크 거신 글에서 쓰신 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서의 섹스에 대한 입장은 좀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제가 읽은 몇 안되는 하루끼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표현하는 섹스는 조금 '불임의 섹스' =/= '바람둥이의 섹스' =/='헛된 섹스' 라는 인상입니다.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이 부인(인지 동거인인지)과의 관계 설정을 아이를 낳지 않는 관계로 해 놓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지도 모릅니다만
모두 다, 근원적으로 이 세상에 본인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강력한 감정의 교차/교환(많은 소설이든 현실이든 경우 이런 섹스가 이야기되죠)
이 아니라, 그냥 '유희'로서의 섹스 같은 모습으로 섹스가 어떤 과정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린 부분 같이 느껴졌습니다.

역으로 예를 들면 제가 느끼기에 헤밍웨이 소설(무기여 잘있거라 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에서 섹스란 것은 매우 인생 예찬적/긍정적이고,
그 결과 때문에 여주인공이 목숨을 잃더라도, 그 의도나 내용이 절절하게 남아서 흐르는 매개체로 반드시 있어야 할 부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마스터충달
17/07/17 14:12
수정 아이콘
저도 무라카미 류 좋아해요. 흐흐.
17/07/17 14:24
수정 아이콘
ps 부분이 아마 영원히 만족하지도 채워지지도 않아서 집착하는것 일까요?
윌로우
17/07/17 16:57
수정 아이콘
동어반복에 지치는 시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겠죠. 제 감명은 해변의 카프카까지 였던 것 같아요. 이번 신작은 돈주고 사고 싶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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