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 자환. 시호는 문제文帝이고 묘호는 세조世祖. 위무제인 조조曹操의 차남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3남으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왕이 되었다가 헌제獻帝의 양위를 받아 후한을 멸하고 조위를 창업합니다. 그리고 226년에 사망했죠. 일명 사이코패스, 후추통 속칭 성격 파탄 종결자입니다.
이연李昖, 초명은 이균李鈞이었다가 왕위에 오르자 피휘를 해 이름을 연昖으로 바꿉니다. 시호는 처음엔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었다가 아들인 이혼李琿이 선종이라는 묘호를 선조宣祖로 바꾸면서 최종으로는 선조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조선의 14대 왕 선조입니다.
조비와 선조 이연. 한사람은 고대 중국의 황제, 한사람은 근세 조선의 왕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출생관계나 성향 등이 달랐지만 심하게 닮아있었습니다.
조비는 3남이었지만 사실상 장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큰형인 조앙은 완의 장수가 배반해 기습할 때 아버지인 조조에게 자신의 말을 내주고 탈출시켰다가 사망했습니다.
차남인 조삭 역시 조앙과 청하장공주(하후무의 아내)와 동복 형제자매였습니다. 하지만 생몰년도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봐서는 조앙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와중에서 조앙, 조삭, 청하장공주의 어머니였던 유부인이 일찍 죽었고, 조조의 정처였던 정부인이 조앙의 죽음 때문에 조조와 갈라서면서 무선태후인 변씨의 아들인 조비가 장남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조조의 장남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조비는 조조의 지위를 순탄하게 이을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지위를 확고하게 굳히지 못한 것은 다름아닌 친동생들 때문이었습니다.
문재가 뛰어나 상당히 문학적 능력이 뛰어났었던 조조에게 총애를 받았던 진사왕 조식 자건.
장수로서의 능력이 뛰어나 오환토벌, 선비 토벌 등 위협적인 북방민족들의 준동을 저지하고 한중전투 당시 조조가 유봉의 유격전에 화가 난 나머지 황수아(조창)를 불러 유봉을 상대하겠다고 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던 임성왕 조창 자문.
조식이 문사적 능력이 조창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도대체 후계자로서 능력에 문사적 능력이 들어가냐고 물으시겠지만 예전 과거시험에서 문학적 재능과 정책 수립능력에 중점을 두었던 제술과가 우대받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해가 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조비는? 조비는 동양 사상 최초의 논문인 전론을 썼고, 문재 역시 뛰어났지만 조식에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조조가 조비에 대한 확고한 승계의지가 있었다면 조비의 두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정치면에 있어서는 확고한 법가적 인사였고, 이러한 조조의 처사는 시행이 의문이긴 하지만 당대에는 파격적인 구현령이라는 포고령에서 보는 것처럼 실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조비가 조조의 뒤를 이을 확고한 입지라고 볼 수는 없었죠. 거기에 당시 2~3세대에서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던 양수와 정의 등이 조식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은 조비에게 있어서는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조 이연.
덕흥군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덕흥군에게는 선조 외에도 하원군 이정, 하릉군 이린 등의 아들들이 더 있었고, 덕흥군 역시도 실록에 상당히 좋지 않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종 7년(1552)4월 23일 기록에는 덕흥군 이초가 성품이 교만하고 패악해 재상을 능룍하고 선비를 구타하며 창기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변복하고 나돌아 다녀 종친의 품위를 상하게 하니 파직시킬 것을 사헌부에서 상소합니다. 그러자 명종은 덕흥군이 어려서 그런 것이니 가르쳐 훈계하라고만 말합니다.
명종 16년(1554)에는 여종인 대비가 딸 셋과 함께 도망해 전의감 이문 안의 집에서 숨어살다가 관에서 이들을 잡으러 오자 덕흥군과 정세호라는 사람의 종들이 추쇄를 담당했던 서리 오영정을 구타하는 사건까지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런 덕흥군의 만행은 뒤로 하더라도 명종이 순회세자를 잃고 왕위 계승권자가 없는 상황에서 선조가 왕위에 오른 것은 가히 천지개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익선관 사건이나 이준경의 기지로 왕위에 오른 것처럼 야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가 하성군을 낙점하면서 선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명종이 죽기 전 인순왕후는 명종이 말을 하지 못하자 전교를 내리는 데 이상한 말을 합니다.
“지난 을축년(1565)에 하서下書(편지를 내려)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그대들이 알고 있으니 지금 그 일을 정하고자 한다.”
실록에는 이 하서를 바로 그 해 명종의 건강이 좋지 않자 덕흥군의 3남 이균을 후사로 삼는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국본(國本)에 대한 일은 지난번 신들이 입대하였을 적에 계청하였는데 상께서 아직 확답이 없으시니 신들이 답답할 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몹시 불안해 하고 있으니, 지금 인심을 안정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내전께서 마음을 두신 데가 있습니까?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이준경 등이, 후사를 정하는 일은 누설시킬 수 없다 하여 박계현(朴啓賢)을 시켜 이 계사를 쓰게 하고 봉하여 들여갔으므로 사관(史官)이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다가 계청한 뒤에 비로소 그 초안을 보았다.】
하니, 중전이 뒤에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조금 있다가 중전이 전교하기를,
“일이 몹시 망극하니 후일에 결정하겠다.”
하였다. 이준경 등이 아뢰기를,
“이 일은 속히 단안을 내리셔야 하고 의심을 갖고 망설여서는 안되니 오늘 중으로 결정하소서.”
하니, 중전이 친필(親筆)로 써서 내리기를,
“국가의 일이 망극하니 덕흥군(德興君) 【중종 대왕의 서자이다. 이름은 이초(李岧)인데 죽었다.】의 세째 아들 이균(李鈞)을 입시시켜 시약(侍藥)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준경 등이 함께 의논하여 중전에게 아뢰기를,
“하서(下書)에 ‘이균을 입시시켜 시약하게 하라.’ 하시니, 인심이 약간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사인데 주상께 품하고 결정하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아직 품하지 않으셨다면 비록 한 자라도 반드시 어필(御筆)로 써서 내리신 후에 대사를 결정하소서. 상의 환후가 조금 나아지시면 신들이 입대를 청하여 직접 전교를 받들겠습니다.”
하니, 중전이 언서로 답하기를,
“상께서는 본래 심열이 있으신 데다 상사를 만나 거상하시느라 오랫동안 심열이 낫지 않고 더하여 이처럼 미령하게 된 것이다. 만약 이 일을 계품한다면 틀림없이 마음이 동하여 증후가 더욱 중하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아뢸 수가 없으니 우선 이렇게 결정하였다가 회복되시면 다시 계품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지금 대신이 입대를 청한다면 심열이 더하여질 것이니 입대를 청하지 말라. 간절히 바란다.”
하였다. 이준경 등이 회계하기를,
“신들이 삼가 의지를 보니 심열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므로 몹시 걱정이 됩니다. 이 일은 중대한 것이라 주상에게 품달하지 아니하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니 내전께서 잠시도 잊지 말고 유념하시었다가 조금 덜하신 틈을 타서 힘을 다하여 도와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든 신하들은 반드시 상의 명을 얻고서야 물러갈 것입니다.”
하니, 중전이 언서로 답하기를,
“아뢴 뜻을 알았다. 마땅히 마음에 새겨 두고 형세를 보아 품하고 결정하겠다. 지금 당장은 결코 계품할 수 없다.”
하고, 조금 있다가 중전이 다시 언서로 전교하기를,
“방금 국본에 대한 일을 잠시 계품하였더니 성심이 몹시 동요하셨다. 결코 이런 시기에 계품할 수 없다.”
하였다. 이준경 등이 그제야 물러갔다.【이날 부정(副正) 윤건(尹健)이 차비문과 수상의 처소를 7∼8차례나 왔다갔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준경이 윤건을 통하여 중전에게 은밀하게 아뢰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니, 윤건은 바로 심강(沈鋼)의 매부이기 때문이다.】 백관이 궐정에 모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1. 후사를 정하는 일이 중하다지만 사관들이 일체 들어오지 못했다가 나중에 이 일을 받아본 것.
2. 분명 국본(세자)를 정하는 일임에도 병중이라지만 명종은 이에 대해 보고받은 적이 없고 오로지 영의정 이준경과 인순왕후만이 서로 의견을 교환한점.
3. 당연히 명종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인순왕후가 명종의 건강을 문제삼아 이를 보고하지 못하게 하고, 이준경이 인가를 받아야겠다고 버티자 얼마 안가 명종의 심기가 불편해졌다고 품의하는 것을 중지한 것.
4. 그 다음날 조정 주요 중신들이 단 하루만에 다시 계품할 것을 주장하는데 전날 적극적이었던 인순왕후가 주저한 점.
5. 그 다음날 같은 대신들이 후계문제를 명종에게 인정하는 전교를 내려달라고 요청하고 인순왕후 역시 이에 동의한 점.
6. 명종이 1565년 10월 10일 영평 부원군 윤개와 이준경, 심통원 이명등과 만난 자리에서는 “국본의 탄생을 진실로 기다리고 바라야하니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
7. 이후로 명종이 죽는 명종 22년(1567) 6월 28일까지 선조는 아예 국본에서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된 점.
자 왜 도대체....인순왕후 심씨와 이준경 등은 왜 이런 상황을 불러왔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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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번은 당연합니다.
일단 1565년은 조선 왕실 최고의 여걸이자 악녀라고도 할 수 있는 문정왕후가 죽은 해입니다. 문정왕후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명종이 그나마 친정 다운 친정을 할 수 있게 되었죠. 순회세자가 죽은 이후로 후사에 대한 이야기도 제대로 꺼낼 수 없었던 명종 입장에서는 신하들에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낸 것이니 당연하다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명종 나이가 1565년 당시에 겨우 서른 둘입니다. 아들 하나 정도야 생각이 당연한 나이죠.
하지만 1~5의 결과로 미루어 볼 때, 명종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안 인순왕후가 진즉에 하성군 선조를 낙점 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만 저렇게 시간을 질질 끈 이유는 이준경과는 반대로 선조의 책봉에 반대하던 심통원이 있었으니 직전에 날치기 하듯이 받아내기 위해서 이준경과 서로 짰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