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민머리요정입니다.
주기를 길게 가져가던 포스팅을 조금 짧게 가져왔습니다.
언젠가 한번, 김상진 선수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제 마음도 너무 무겁고, 글쓰기도 너무 무거워서 보류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한번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타이거즈 팬들에게 아픔으로, 그리고 추억으로 남아있는 이름.
아기 호랑이 김상진 선수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김상진 선수는, 광주 용봉초등학교 5학년 시절,
선수 부족으로 인해서 고민하던 서림초등학교 김영기 감독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집안 사정과 내성적이고 숫기 없는 성격이었던 김상진 선수는,
"야구로 성공하면, 선동열처럼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수 있다"는 김영기 감독의 말에 혹해서,
바로 용봉초에서 서림초로 전학하여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성격탓에 처음에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야구에 임했지만,
진흥중학교 진학이후, 강의권 감독 조련 하에 실력을 키울수 있었다고 해요.
이후, 진흥고로 진학하여, 초고교급 선수로 성장한 김상진 선수는 연세대로의 진학이 예정된 상황에서,
70세가 되신 아버지, 그리고 생계유지를 위해서 공장을 다니시는 어머니를 위해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1995년 11월, 해태타이거즈와 계약금 1억, 연봉 2천만원에 계약을 맺습니다.
데뷔 이후, 첫 두해동안 김상진 선수는 9승을 기록합니다.
당시 메이저리그로 직행했던 수많은 고졸 선수들을 생각하면,
프로리그로 바로 뛰어들었던 고졸 선수들 중에서,
박명환 선수 다음으로 주목받던 선수가 김상진 선수였죠.
박명환 선수는 첫 두해동안, 7, 8승을 거둔 반면, 김상진 선수는 각각 9승.
두 선수 모두 대단하다고 생각할만큼의 성적은 아니지만,
마지막 해태의 전성기라고 불리운 96, 97년.
조계현, 이강철, 문희수, 김정수, 이대진 등, 특급투수들로 구성된 선발진 사이에서,
아직 가다듬어지지 않은 고졸 신인이 만들어낸 9승은 그 자체로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규정이닝을 채우면서, 3점대 자책점으로 막아낸 이 성적은,
향후 이 선수가 어떤 선수로 성장할 지 기대하게 만들었죠.
입단 2년차 1997년 한국시리즈는 아기호랑이의 신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이거즈는 2년 연속으로 정규시즌 1위를 기록하면서,
선동열, 김성한 없이 더이상 강팀이 아닐 것이라는 많은 이들의 생각을 뒤흔들었죠.
하지만 97년은, 96년과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이전해에 비해 승수가 반토막난 에이스 조계현,
그리고 전성기 시절 가을의 힘을 내지 못하는 이강철과 김정수.
조금씩 무너진 마운드는 LG트윈스를 한국시리즈에서 맞이한 해태타이거즈의 고민이었습니다.
1차전은 에이스 이대진의 6이닝 1실점 역투와, 초보 마무리 임창용의 3이닝 마무리. 6-1의 완승을 거두었지만,
2차전 선발로 내세울 카드가 마땅치 않았던 해태는,
후반기 페이스가 괜찮았던 깜짝카드 김상진을 꺼내듭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 카드는 김응용 감독 조차도, 확신감에 차서 꺼내든 카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3회초 1사 이후, 김상진 선수는 주자를 내보냈고, 애초에 선발로 내세울때부터 불안한 감을 가지고 있던 벤치는,
바로 김상진 선수를 내리고, 안정적인 카드라 생각했던 강태원을 내보냅니다.
4회초 1점을 먼저 해태가 얻자, 굳히기를 시도하려, 이강철과 김정수를 투입한 해태의 벤치.
결과는 대실패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강철과 김정수는 4,5회동안 각각 5실점하면서, 철저하게 무너졌고,
경기는 10-1로 패배하고 맙니다.
3차전 선발로 조계현을 내세웠고, 조계현이 4.1이닝을 책임진 이후, 강태원이 남은 이닝을 마무리.
경기말에 터진 이종범의 연타석 홈런을 앞세워 승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됩니다.
4차전 선발은, 1차전 선발이었던 에이스 이대진의 재출격.
이대진이 또 다시, 7이닝 1실점하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해태는 3승 1패.
한국시리즈 우승에 단 1승만을 남겨놓게 됩니다.
하지만 1차전과 마찬가지로, 1차전 승리 이후에 벤치는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2차전에 안좋았던 2명의 선수, 그리고 3,4차전 선발투수는 세울수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이 될 수 있을 5차전 선발을 놓고 다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벤치의 선택은 이번에도 김상진 선수였습니다.
계투자원도 소모된 탓에 넉넉치 않았고,
직전 등판에서 빠르게 강판된 탓에 선발로 등판이 가능한 선수는 김상진 선수 뿐이었죠.
이 등판을 보고서, 트윈스 팬들은 다시 한숨돌릴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겁니다.
불안한 감대로,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김상진 선수는 유지현을 볼넷으로 내보냈고, 이어 도루까지 허용.
그리고 서용빈에 적시타를 허용하며 불안하게 1실점하며 출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LG의 희망은 거기서 끝.
야수들은 연이은 호수비로, 이 어린 선발투수의 어깨에 힘을 실어줬고,
이어 3회 최훈재가 경기를 뒤집는 적시타를 때려냅니다.
그리고 4회부터 경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김상진 선수는 단 한명의 타자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늘 선동열이 서있던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무대 위에는,
이제 막 20살을 넘긴 아기 호랑이 김상진이 서있었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그저 너무 좋다는 표정과 함께....
97년 한국시리즈 5차전, 김상진의 완투승은, 역대 최연소 한국시리즈 완투승으로 남아있습니다.
9번째 해태의 우승.
이 우승은 김성한과 선동열이 없이 이루어진 우승이며,
이대진, 김상진이라는 투수가 발견된 시리즈이자, 새 해결사 이종범이 함께한 우승이기에,
타이거즈 팬들의 마음을 더 설레이게 했습니다.
우승을 했던 이듬해, 김상진 선수는 121이닝 6승, ERA 3.78의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팀이 어수선했던 시기와 맞물렸기에,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기대에는 크게 못미치는 기록.
팬들은 팀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고, 어수선해서 그러려니 했겠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몸속에 이미 암세포가 퍼져, 목신경을 자극하고 있을꺼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OB전에서, 목의 통증을 느끼고 조기에 강판을 했고,
단순한 목 부상으로 생각해 쉬면 나아질꺼라 생각했지만,
시즌 종료 후, 친구들과 광주시내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게 됩니다.
전남대 병원에 입원해서, 목에 생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정밀조직검사를 한 결과, 그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게도 위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해 타이거즈는 84년 이후, 처음으로 5위로 떨어졌고,
모기업 해태는 부도를 맞으며 자금난에 시달렸고, 이종범은 일본으로,
조계현, 이순철, 정회열은 삼성에 트레이드 됩니다.
여기에 유망주 안상준까지 LG에 현금 트레이드가 된 상황.
이렇게 어려워진 팀 상황 속에서, 팀의 희망이고, 미래가 되어야할 막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에이스 오브 에이스, 이대진 선수 마저, 어깨부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렇게 최고의 왕조였던 해태는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팬들은 선수가 이지경이 될때까지 구단에서 무얼했느냐고 비난을 쏟아냈지만,
해태는 매년 선수들을 대상으로 정기검진을 시행을 했습니다만,
김상진 선수의 위암은 특이 케이스로,
내시경을 통해서도 절대 잡을 수 없는 위 외벽으로부터 생성된 암세포였다고 합니다.
이후, 용산 중앙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계속 했고,
조금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종양에 의해 위가 청공되며 한차례 수술을 더 받게 되고,
이 수술 이후로 호전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길어야 3개월일꺼라던 병원 측의 얘기와는 달리, 김상진 선수는 8개월이나 버텼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마운드에 다시 돌아갈수있을꺼라고 늘 말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팬들은 해태과자 사먹기 운동을 통해서, 그를 돕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이런 팬들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김상진 선수는
1999년 6월 10일, 팬들의 곁을 떠나 영원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
김상진 선수가 김준재 트레이너에게 63빌딩에 가고 싶다고 간청하여 휠체어에 탄 채 전망대에 올라갔고,
어딘가를 멍하니 주시하고 있던 김상진 선수에게 김준재 트레이너가 어디를 보고 있냐고 묻자
김상진는 손가락으로 잠실야구장을 가리키면서,
"형님, 저곳이 제가 한국시리즈 완투승을 거뒀던 곳이죠...?"라고 말하며, 울먹이며 물었다고 합니다.
어깨수술로 인해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던 이대진 선수는,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모교 후배이자 동생인 김상진 선수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이 그동안 달고있던 26번을 내려놓고,
김상진 선수의 번호인 11번을 달고 뜁니다.
허무하게 떠나보낸 동생의 번호를 등에 달고서,
다시한번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을 선물하겠다는 각오에서 말이죠.
재기 후, 8승으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부상이 재발한 탓에,
2년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03년 1승밖에 거두지 못하자, 이대진 선수는 스스로 11번을 내려놨습니다.
그 이유는,
[상진이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칠수없다] 였다고....
‘ 너무 웃고만 다니고. 이뻐 가지고. 머리 쓰다듬어 주고.
야구도 잘하면서 잘 먹어서 살도 찌고 하체도 상당히 좋고. 이뻐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생긴 거나 어떤 면을 보면 참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얼굴 같은데...
집안이 어려운 표시도 안내고... 늘 웃고 다니고.’
- 장채근 선수 인터뷰 중 -
김상진 선수를 추억하고 기억하는 많은 감독, 선배, 친구들이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미소를 머금기도 하고, 웃기도 했지만,
결국 그 그리움에 끝내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주기부터, 지금까지,
그가 세상을 떠난 6월 10일 경기 한켠에는 늘 그를 추모하며 기억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를 추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12년이 지난 2009년,
기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우승을 차지한 타이거즈.
그리고 그 우승의 순간에 함께했던 이대진 선수.
여전히 김상진 선수를 추억하고 기억하며,
타이거즈는 그의 영전에 다시한번 우승 트로피를 선물합니다.
안타깝게 너무나 빨리 져버린 불꽃.
희망과 함께 슬픔을 주었던 이름 세글자 김상진.
끝내 맹호가 되지 못했던 아기호랑이 김상진.
우리가 그를 여전히 기억하고 추억하는 한,
영원히 잠들지 않고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