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빵 터지는 이야기는 아니고, 흥미진진하게 몰입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벌써 네번째 글까지 왔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3편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던 계기에 대하여 조금 써보려고 합니다. 여행기와 동시에 이전 글에서 설명이 부족했던 O-트레인 패스에 대한 설명도 같이 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4. 가장 빠르게, 가장 느리게
2004년 4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KTX가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때 교과서에는 분명히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 되고 어쩌꾸 저쩌구 했던 것 같은데. KTX가 개통된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실감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강원도 산골에는 KTX 같은 게 안 다니니까. 그렇다고 멀리 여행을 많이 다녔던 것도 아니었고, 서울과 부산을 밥먹듯이 오고가는 비즈니스맨도 아니였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내던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대로는 왠지 억울해서 못 살겠다.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산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제001열차 [KTX]
다음 날 아침을 먹자마자 서울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1544-7788에 전화를 해서 서울역에서 09시 45분에 출발하는 KTX 열차를 예매했습니다. 1번이라는 번호를 부여받은 KTX의 상징 중의 상징. 21세기를 여는 열렬한 서막. 300km/h의 혼. 마치 로봇 합체를 외칠 때 열심히 힘주어 외치는 주인공처럼 혼자서 궁시렁거리면서 탑승 준비를 합니다.
더러워도 고귀해보이는 KTX #001
KTX 처음 타는 촌놈 인증을 거하게 합니다. 쫄래 쫄래 앞에 가서 사진도 찍어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일상이겠지만, 저에게는 그야말로 특별하고도 우발적인 여행이기에 신기하기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상 속에 특별하게 끼어드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재미 아니겠습니까. 상하행 각 한 대만 있는 무정차 편성이기에 별 것 아니지만 신납니다. 서울-부산을 2시간 16분만에 주파합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제002 열차는 13시 50분에 부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정말로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부산에서, 저녁을 다시 서울에서.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나는 모르는 사이에 와있었습니다.
여기가 Reach의 고향입니까,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출발하기 전에 너무 흥분했었던 것 같습니다. 09시 45분 정시에 출발한 열차는 진실로 아무 역에도 정차하지 않고, 서울과 부산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객실 상단에 있는 모니터에 280km/h를 보고 스르륵 잠이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무리할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결국 눈을 떠보니 저는 부산역이었습니다. KTX 굉장해! 어차피 너무 빨라서 풍경은 보지도 못했을테니 아쉬울 것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부산역을 나왔습니다. 지연이 약 3분 정도 된 것 같았지만 2시간 16분만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요금은 금요일이라고 57,700원이었습니다. 현대 문명의 위대함을 느낀 순간이었다고 호들갑을 느끼며,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수육백반
부산에 와서 정말 점심만 먹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 저녁을 먹기에는 부산이라는 도시가 참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해운대, 광안리를 제껴두고 이기대를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부산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27번 버스를 타면 바로 갑니다. 그리고 이기대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돼지국밥집이 있어서 돼지국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부산에 갔으니 돼지국밥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옆테이블에서 아저씨가 먹던 수육백반이라는 것이 정말 맛있어보여 같이 먹었습니다. 맛있습니다. 오. 맛있습니다. 아주머니에게 부추 더 주세요 그랬는데 아주머니가 정구지 더 드릴게요로 교정해주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오륙도에서 시작한 이기대 해안산책로는 지금까지 제가 생각했던 부산의 이미지를 고쳐주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부산은 매일 뉴스에서 접하던 해운대 해변 같을 줄 알았습니다. 부산에도 이런 한적한 길이 있다니 감탄하며 쉬엄쉬엄 이기대 길을 걸었습니다. 이기대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오륙도에서부터 동해와 남해가 구분된다고 하며, 고성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이 시작한다고 안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고성까지 걸어올라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며 계속 길을 걷습니다.
Butterfly Waltz
화려한 광안대교와 광안리 해변의 야경을 함께 하며 길을 걷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오륙도에서 부산지하철 광안역까지 해변을 따라 거의 8-9km 정도는 걸은 것 같습니다. 많은 여행객들도 보고 커플들도 보고, 혼자 있는 아리따운 아가씨들도 보고, 무서운 외국인들도 보고, 아름다운 밤바다도 보고 재미있는 길이었습니다. 여름의 부산이라는 곳이 이런 곳이었구나 하며 부산 처음 온 촌놈 티를 내며 이제 부산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가장 느리게
부산에서의 하루를 마치며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이번에는 부산역이 아니라 부전역으로 왔습니다. 서울에 용산역이 있다면, 부산에는 부전역이 있습니다. 마치 주가 되는 경부선 외의 노선을 다 집어넣어 놓은 곳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부산으로 내려올 때는 2시간 16분밖에 걸리지 않았던 가장 빠른 열차를 타고 왔다면, 반대로 돌아갈 때는 가장 느리게 서울로 올라가는 22시 30분 출발 청량리행 열차를 타고 갈 것입니다. 청량리 도착 시간은 05시 38분으로 소요시간은 7시간 8분으로 가장 느린 열차 중의 하나입니다. 주말에는 부산-강릉 간 8시간 짜리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O-트레인 패스의 여행도 같이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의 내일로 O-Train Pass
출발 전에 미리 준비해놨던 다음 여행의 준비물인 O-트레인 패스를 꺼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연재글은 시간이 역순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왜 O-트레인 패스를 어른들의 내일로라고 하냐면, 만 26세 이상이자 직장인들에게는 7일간의 티켓을 줘도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2박 3일의 자유여행패스를 쓰기에는 주말을 다 못 쓸 경우 아깝기도 하고, 왠지 이제는 입석으로 눈치보며 가느니 조금 편안하게 여행을 가고 싶은 나이이기도 하고…. 이처럼 26세 이상은 이래저래 여행에 고민이 많은 질풍노도의 시기입니다. 그래서 1일권, 2일권, 3일권, 5일권, 7일권으로 나누어서 구매할 수 있으며, 편안하게 좌석 지정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O-트레인 패스야말로 어른들의 내일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25세 이하가 못 쓰는 게 아니라 할인까지 해줍니다.
O-트레인 패스로 이용 가능한 구간
그러나 O-트레인 패스로 모든 철도 구간을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목적 자체가 중부내륙권의 관광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해당 지역을 다니는 중앙선, 영동선, 태백선, 정선선, 충북선, 경북선에 대하여만 패스로 이용이 가능합니다. 지도의 녹색은 O-트레인 패스가 다니는 노선이자 패스 사용 가능한 구간, 갈색은 V-트레인 운행 구간이자 패스 사용 가능한 구간입니다. 황색은 그 외 패스로 이용가능한 노선들입니다. 수원에서 출발하는 O-트레인의 경우 수원과 천안, 오송을 경유하지만, 이 구간에는 이 O-트레인 이외에 연계할 수 있는 열차가 없어서 지도에는 생략해놓았습니다.
좌석지정권의 모습
패스를 이용한 좌석지정은 전화,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예매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역의 창구에 가야지만 좌석지정을 받을 수 있는 불편함이 아직은 있습니다. 단, 창구에서는 패스만 있다면 언제든지 패스 사용기간 내의 좌석을 지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용을 막기 위해 중복되는 시간에 발권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12시에서 1시 사이에 이미 좌석지정을 받았다면, 그 시간과 겹쳐서 다른 곳의 좌석 지정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창구에서 뽑아주는 것이기 때문에 빳빳한 맛이 없는 인쇄용지라 아쉽긴 합니다.
제1624 무궁화호. 부전-청량리
돌아갈 때는 가장 느린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의문인점은 부전에서 청량리로 가는 노선은 중앙선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부전에서 경주까지는 동해남부선을 이용하지만 이 때도 좌석 지정이 가능합니다. 즉, 위 6개 노선과 연계되는 열차에서도 좌석 지정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내일로와 마찬가지로 출발하는 시간에 맞춰야만 패스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패스의 범위는 해당하는 날의 00시부터 23시 59분까지입니다. 따라서, 다음 날의 패스를 끊은 저 같은 경우는 22시 30분에 출발하는 열차의 좌석을 지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틀권을 끊기에는 아까우니까 출발지인 부전에서 경주까지는 직접 예매를 하고, 경주에서부터 청량리까지는 패스를 이용해 좌석지정을 받았습니다. 경주에서는 열차가 00시 24분에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패스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출발하기 전에 역에서 미리 좌석 지정을 해놓아야 합니다. 중간 정차 시간들이 다 1,2분 내외이기 때문이며, 차내에서는 처리가 안 됩니다. 그냥 이 패스만 들고 일반 열차에 탑승하면 입석, 자유석 승객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6개 노선 내에서만 아니라, 연계되는 열차도 좌석 지정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김천을 경유하는 부산-영주 노선, 주말 한정 부산-강릉 노선 등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부산-김천간의 경부선 노선만도 좌석지정이 가능합니다.
무궁화호 특실
무궁화호에도 특실이 있으며 O-트레인 패스는 이러한 특실마저도 특실로 주세요라는 말이면 특실로 좌석 지정이 가능합니다. 청량리-강릉, 청량리-안동 등에서 1호차를 특실로 운행하고 있습니다. 특실의 장점은 기내식을 준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 넓은 좌석과 입석 승객이 들어올 수 없다는 우월함조용함 뿐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쾌적하게 여행을 위해서 특실이 가능하다면 특실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특실의 종류에는 첫번째 사진처럼 원래 무궁화호 특실이었던 객차와, 아래의 동글동글 새마을호 창문을 달고 있는 새마을호 객차 출신이 있습니다. 차이점은 새마을호 객차 출신은 무릎 받침이 있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에 무슨 객차가 붙어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햄버거의 성지였던 청량리역
밤기차이자 숙소였던 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새벽에 도착합니다. 반듯한 민자역사 청량리역을 보니 옛 추억이 떠오릅니다. 한 때 버거킹, KFC, 롯데리아, 맥도날드 한 곳에 입점하여 무한한 가격 전쟁을 펼치던 햄버거의 성지였던 곳. 그러나 지금은 롯데에게 모든 것을 잃고 만 쓸쓸한 곳. 아마 우리 나라에 그 때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다음 O-트레인 여행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전 이곳에서 원주, 제천까지 이동한 후 그 뒤에 제천에서 출발하는 O-트레인 열차를 이용했습니다만, 사실 여기에서 8시까지 기다려서 O-트레인 패스를 타도 됩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부터는 1부 중부내륙순환열차 편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거꾸로 거슬러서 글을 써서 읽으시는 분들에게 불편함 아닌 불편함을 안겨드리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우발적인 여행을 통해서 즐거웠고, 새로운 열차와 저의 여행을 이곳 PGR21의 회원분들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었던 마음이라 부족한 실력이지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PGR21 회원분들에게 정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또 시간이 남아서할 일이 없다면 조만간 새로운 글을 쓸지도 모르니, 감히 또 한 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