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쯤 밤 12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아마 맞을겁니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왠지 PGR에는 아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네요. '유희열의 올댓뮤직' 이라는 프로그램이었죠.

토이 앨범들은 물론 익숙한 그 집 앞, a walk around the corner 앨범까지 갖고있을 정도로

유희열씨를 너무 좋아하던 저라서 '유희열이 라디오를 진행한댄다! 음악도시의 유희열이 돌아온다!' 라는 소식을 듣고

그래. 라디오를 꼭 들어야지. 라디오 인간이 되어야지 생각했지만...

밤 12시에서 새벽1시에 라디오를 듣고있기란 역시 쉽지 않은 일이죠.

잠을 자거나, 피씨방에 있거나, 가끔 드물게 공부를 하고있거나 하는 시간이니까요.


생방송을 들어본건 열 번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다 아주 가끔씩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될 때 한 번씩 듣고, 아주 드물게 할 일이 없을 때

사연(이라기 보다는 시청자게시판에 잡담 몇 줄 찍 쓰는게 전부였습니다만) 한두번 보내본게 전부였죠.

그렇게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유희열의 올댓뮤직'은 끝이 나버렸고

저는 '아쉽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 4년쯤 뒤였을까요?

인터넷을 뒤져보다 어느 웹하드에 '유희열의 올댓뮤직' 녹음파일들이 올라와있는걸 발견했습니다.

옳다구나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다 하고 받았죠. 그런데....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집에 베토벤 모차르트 전집같은걸 사 놓으시고 가끔씩 그 CD들을 바라보며

'그러고보니 저걸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볼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네' 라고 말씀하시는걸 보면서

에휴 아버지는 왜 그러실까 생각하곤 했는데, 저도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더군요.

파일을 받아놓고 하드에 고이 모셔놓고만 있었지 들어보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그런 파일들이 있었는지도 까먹고 있었죠.

다들 아시겠지만 하드디스크라는게 참 어려가지 물건들을 담고있고,

아무래도 문서보다는 음악파일, 음악파일보다는 이미지 파일, 이미지 파일보다는 동영상.... 을 주로 틀어보게되지 않나요? 아닌가요?

어쨌든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폴더 안에 들어가 있다 보니 나중에는 그 폴더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그런 폴더가 있었는지조차도 모르게되더군요.

한 달 전 아내가 본인 컴퓨터가 고장난 관계로 제 컴퓨터를 쓰겠다고 하는 바람에 하드 대청소를 하다가
(아내가 파일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는걸 싫어합니다. 그래서 대청소를 해야했던거죠... 음....)

잊고있던 그 파일들을 발견했습니다.

발견 순간 육성으로 '헐...?'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파일들을 발견하고 나서 '이제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생각에 출퇴근 길에 파일들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제 출퇴근 길이 자가용으로 딱 1시간이 걸리는데 왕복하면 정확히 2회분의 라디오를 들을 수 있더군요.

그런데 이게 지난주에 한 방송 다시듣기도 아니고.... 10년이나 지나버린 라디오를 듣는 기분은 대단히 오묘합니다.

Hot 한 신인이라고 소개해주는 가수가 세븐, 동방신기니까요.

유희열씨는 '살인의 추억 다들 보셨나요?'

'스캔들 장안의 화제죠. 보신분들 거기 배용준씨 너무 멋있게 나오지 않았어요? 저랑 배용준씨랑 힢 라인이 되게 비슷한데...'

라는 멘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연이 소개될 때 이름 주소 사는 곳 그리고 가끔 나이를 말해주죠.

'XX시 OO구 YY동에 사시는 강건마씨... 올해로 계란 한판을 찍었는데 아직도 모태솔로라고 보내주셨는데요....'

라는 사연을 들으면 '이 사람은 지금 40인데... 지금도 솔로일까? 설마?' 라는 생각도 들고

가끔 지금 사는 동네에 사는 사람이 소개되면 '10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우리동네에 살고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러고보니 2004년 3월 초 방송에서는 뜬금없이 김장훈씨가 난입해서

'여의도에 '쓰'로 시작하는 것들이 많아요. 우리에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라는 멘트와 함께 로보트 태권V 노래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대체 이게 뭔가 싶어서 찾아봤더니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가 터졌던 때 더군요. 그런 일도 있었죠.

정말 말 그대로 '아, 그 땐 그랬지' 하면서 라디오를 듣게됩니다.

심취해서 듣고있으면 라디오가 울려퍼지는 자동차 안이 작은 타임머신이 된 기분이죠.

그리고 바로 오늘 출근 길에 작은 사건이 터졌으니...




여느때 처럼 라디오(파일)을 듣고 있는데

유희열씨가 'OO시 XX구 YY동 ZZ대학교 제2기숙사에서 사연이 도착했습니다' 라고 말하더군요.

순간 움찔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 제가 있던 기숙사거든요.

나 말고도 이걸 듣는 사람이 있긴 했구나. 싶어서 신기한 기분도 들었지만,

하긴 인터넷 방송도 아니고 멀쩡히 공중파 타는 방송인데 그 많은 기숙사 사람들 중 저 혼자만 들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거겠죠.

그리고 이어지는 멘트.

'아 이거 너무 슬프지 않아요? 주소부터가? 제2기숙사. 너무 처량하다'

들으면서 실실 웃었죠. 그래, 주소도 처량하지만 정말 그때 다들 처량하게 있긴 했지.

'젊은아빠씨가 보내주신 사연인데요'

어??

어????!??!??  

어어어어?!??!??!??!??!?!??!?!

저 였습니다.

세상에나.




'기숙사 문을 잠그고 나오는 순간 열쇠를 방 안에 놓고온게 생각났다.

나도 정말 칠칠맞구나 싶어서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했더니 핸드폰도 방 안에 있다.

별 수 없이 매점에서 시간이나 보낼까 싶어 매점에 갔는데 지갑도 방 안에 있다.

만사 귀찮아져서 학교 도서관 컴퓨터에 앉아 룸메이트가 돌아올 시간을 기다리며 게시판에 글을 남긴다.

문득 궁금한건, 내 눈에는 평생 보이지 않을 나의 뒷모습을 보고있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느낌일까?  라고 보내주셨는데요. 어떤 느낌이겠어요. 쟤 진짜 불쌍하다는 느낌이겠죠 으흐흐흐흐흐'


이름까지 소개되었을 때는 설마 동명이인이?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연을 들어보니 제가 맞습니다.

그런 글을 썼던 기억은 없지만, 마치 소풍가서 찍힌 여러 사진들 중에서 뒷통수만 찍힌 모습을 보고도

'어, 이건 나다' 하는 느낌을 받는 것 처럼, '이건 내가 쓴 글이다. 내가 보낸 사연이다' 라는 느낌이 오더군요.

아니 그냥 그런걸 떠나서 하고있는 짓이 10년 지난 지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으니.... 음....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게 기껏해야 한두번인데 그게 뽑히다니,그리고 그게 뽑힌걸 1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다니.

살다보면 참 이런저런 놀라운 일들을 겪게 되어서, 몇 년 몇 십년이 지나도 마치 동영상으로 저장해놓은 것 처럼

머리속에서 언제든지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는데, 오늘도 그런 순간들 중 하나가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10년이라니... 1년 2년 5년도 아니고 10년이 지나서야 알게되다니.... 허허....


어쨌든 저는 이렇게 오늘부터, '라디오에 사연 소개 된 남자'가 되었습니다.




P.S.

라디오를 끝까지 들었더니 '오늘 사연 보내주신 젊은아빠님께 LUNA SEA 앨범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던데..

제가 있던 기숙사는 스파르타 식이라서 도착한 택배를 본인이 일정기간 동안 가져가지 않으면 폐기처분을 해버렸습니다...

평생을 간직할 기념품이 되었을 텐데...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