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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25 20:51:20
Name js
Subject [일반]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
19일. 밖에서 개표방송을 보다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놓고는 “엄마 우울해 박근혜가 돼서 우울해...” 란다. 엄마는 유신 때 대학을 나왔고, '황토회'라는 고전적인 이름의 연합써클에서 운동을 했고, 역시 운동권이었으며 감옥도 몇 번 갔다 온 아빠와 결혼했고, 이후에는 꽤 오래 주부로 살았고, 지금은 돈을 벌고 있다. 평범하다면 평범하게 산 시간이 더 많으니 엄마의 말은 ‘내가 젊음 바쳐 싸웠던 시간을 모조리 부정당한’ 뭐 그런 심각한 분위기의 것은 아니겠다. 아마 날것의 우울함이었을 테다. 학창시절에는 이불 속에서 소설책을 내리 읽다 알 두꺼운 안경을 쓰게 된 문학소녀였던, 그래서인지 지금도 종종 여자아이 같은 엄마니까. 시대니 정치니 국가니 하는 큼지막한 것들을 제쳐놓고 그저 박정희의 딸이 후보로 나온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니까. 그래도 말이 아픈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우울하다”고 말하는 상황은 겪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별로 없으니.

친구들도 비슷했던 것 같다. 망연자실. 허탈. 몇 명은 대놓고 “울었다”고 말했으니 그보다 많은 친구들이 실제로 울었겠지. 친구 중에 문재인 지지자는 몇 명 없으니 낙선이 슬펐던 것은 아니겠다. 다들 노무현 때 대학시절을 보냈고, FTA니 이라크 파병이니 대추리니 노동문제니 하는 것들에 관심 뒀던 친구들이니까. 뭐 지금까지 대놓고 운동권으로 사는 친구는 거의 없다만 아직 당비를 내는 녀석들은 대개 사회당 녹색당 진보신당이니까. 다들 ‘박근혜의 당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울한 것이다. 대한민국 십팔대 대통령이 박근혜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지난 대선 결과와 사뭇 다른 반응이다. 따지면 노무현-이명박의 차이가 이명박-박근혜의 차이보다 크지 않으려나. 명박산성이니 사대강이니 하는 것들의 스펙타클한 놀라움을 겪어 왔으니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도 박근혜 시대가 특별히 격렬하게 나빠지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스트롱맨의 딸이지만 스트롱맨 자체인 것은 아니니 탱크를 몰거나 투표함을 뒤집지도 않을 테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노동열사가 수없이 나왔으니 저 송전탑 위에 올라간 쌍용차 노동자들의 삶 역시 대통령 박근혜 아래 충분히 개연적인 것이겠다. 뭐가 다를까.

사소한 이유다. 내가 ‘대통령 박근혜’를 싫어했던 이유는 그것이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쪽팔렸다. 설령 박근혜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준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내게는 수정할 수 없는 과거가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대한민국 십팔대 대통령은 박근혜다. 내가 노인이 되어도 대한민국 십팔대 대통령은 박근혜다. 천 년이 지나고 만 년이 지나도 대한민국 십팔대 대통령은 박근혜다. 첫 번째 여성대통령이고 또 첫 번째 부녀 대통령이고 또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으로 스트롱맨의 딸인 대통령이다. 이것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그것이 비참했다. 그의 참담한 언어능력과 부족한 역사인식과 새누리당의 부패와 뭐 그런 모든 것들보다 내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정말 사소한 이유다. 역사라는 것이 애초에 사소한 까닭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니고, 현재를 잘 살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친일파였던 이들이 현재에 부도덕한 것이 문제다. 정신대 피해 여성들의 아픔과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아픔은 똑같이 아픔이다. 역사는 그저 말(言)이다. 그게 어디 밥 한 끼 먹여주던가. 주변에 역사 공부하는 친구들이 딱히 잘 벌어먹지는 않으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니 사소한 이유다. 슬픈 드라마를 볼 때처럼, 사실 삶과는 별 관련 없는 우울함이다. 상대 진영의 뒷치기를 당해 내 캐릭터가 죽은 것과 비슷한 분노다. 매드라이프가 자꾸 퍼블을 내줘서 느끼는 안타까움과 유사한 감정이다. 홍진호가 끝내 우승하지 못하고 은퇴한 데서 오는 슬픔 같은 것이다. 그러니 우울한 것은 어쩌면 기분 탓이다. 내게는 유신의 아픔을 온몸에 새긴 고문 피해자들의 기억도, 오년 더 못 버티겠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현재도 없으니까. 이명박이 당선되고는 눈물은커녕 헛웃음이 나왔으니 확실하다. 우연히 호르몬 조절이 엇나간 것이겠다.

차라리 취향 같은 것이다. 역사는 사실 취향이다. 취향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박근혜의 당선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다. 문재인이 되었어도 국민의 절반은 우울했을 테니까. 나는 그들의 취향을 존중한다. 그러니 내 취향도 어느 정도는 존중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전 김태희가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이제 대통령 되실 분도요.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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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호
12/12/25 21:42
수정 아이콘
저도 글쓴이 분과 같은생각을 했었습니다.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다시 뽑은 국민. . . 역사에 남게되겠죠.
그래서 저도 나름 보수주의자이지만 마지지막에 박근혜에게 표를 줄 수 없더군요. . .
하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직을 정말 잘 수행한다면
역사는 지금의 유권자를 독재자의 딸이며 그 후광의 영향을 많이 받는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대통령직을 맡길 수 있었던 국민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12/12/25 21:45
수정 아이콘
근래 본 정치 관련 글 중 가장 와 닿았어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12/12/25 22:12
수정 아이콘
추천합니다. 사실 시작은 항상 취향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취향도 물론 학습되는 거지만 그렇든 아니든 취향은 취향이죠^^ 취향의 문제를 합리성의 문제로 가져가려 하다보면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pgr에 와야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why so serious
12/12/25 23:16
수정 아이콘
취향이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하지 않는다면야... 얼마든지 존중해 드립니다.
헥스밤
12/12/25 23:41
수정 아이콘
사회당 없어졌다 임마...나 당비 내고싶어도 낼 데가 없음.
크리스마스에 까페에 앉아서 우울한 글이나 쓰지 말고 있다 롤이나 하자 문자 확인좀 하고 답장 빨리좀 해라....
12/12/26 07:47
수정 아이콘
덧글 감사합니다. 박근혜가 대통령직을 잘 수행한다면 역사는 지금까지 없었던 방식으로 새롭게 쓰이겠지요. 새 정부가 부분적으로라도 완결성 있는 체제를 만들어낸다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취향'도 그에 따라 변해갈 테고요. 뭐 개인적으로는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지만 관조적인 태도 정도는 괜찮을 것도 같습니다.
12/12/26 11:39
수정 아이콘
박근혜 후보를 뽑은 51.6%의 국민을 존중합니다. 다만, 그 만큼, 우리들 각자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다수결이지만, 정당성은 소수자의 의견을 존중하는데서 나옵니다. 나이많은 어르신들이 왜 겪어본적도 없으면서 박정희를 싫어하냐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독재를 싫어하는것도, 그분들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독재를 싫어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박근혜정부가 비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면, 이명박정부보다 더욱 더 독재로 받아들여질수 있는 확률이 큽니다. 박근혜 정부는 시작부터 힘이 들겁니다. 그분이 말하는 대통합을 실제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5년이 될것입니다.
제가 박근혜 후보를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냥 독재가 싫고, 독재 시절의 잔재가 싫고,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제가 지지하는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낮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민주적인 방법으로 대통령 당선자가 된 박근혜 후보와 그를 지지한 국민들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 만큼 저의 생각도 존중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옳은것은 아닙니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옳은 선택을 하였습니다.
happyend
12/12/26 11:48
수정 아이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슬픈 연말이네요.춥기도 참 춥고요.
옆집백수총각
12/12/26 17:29
수정 아이콘
추천 할 수 없어요. 이 글 일부에서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량의 대부분은 괜찮은 글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까기보다 제가 더 부족한 것을 느낍니다. 좋은 글 잘 보고갑니다.
12/12/27 02:03
수정 아이콘
박당선인을 대통령으로 인정은 하지만, 존경은 못하겠습니다.
지도자는 우선 도덕성을 갖추고, 그 다음 능력을 따지는게 맞다고 봅니다.
박근혜 당선자는 도덕성은 물론 그렇다고 능력도 보여준바가 없으니....
그래도 민주적 절차에 의해 뽑인 사람이니 5년 임기 내내 잘 감시하고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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