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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10 23:00:23
Name 화잇밀크러버
Subject [일반] 축언(畜言)
마음의 고백, 심정의 토로, 그 동안 묵혀두었던 가슴에 담긴 말……. 그 모든 것은 표현하겠다고 다짐을 한 그날 밤은, 날카로운 바람이 옷깃을 베어들어오는 시린 겨울의 밤이었다. 찬 바람에 마음 속의 복잡함이 엉킨 탓으로 추위에 떠는 것인지, 흔들거리는 마음에 몸이 같이 떠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몸서리를 동반한 체, 첫사랑인 여자와 만나기로 한 곳을 향하여 걸어갔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이 내려 세상을 아름다운 흰색으로 덮어버리며, 내 마음의 격정도 함께 묻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보다 차가운 바람이 떨림을 가중시킬 뿐, 하늘은 흰 점 하나없이 어두운 달빛에만 물들어 있었다.

오래전 연락이 끊긴 그녀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메워져 그것들을 정리하는 것도 벅차 한걸음, 한걸음을 힘겹게 나아갔다. 이제와 무엇 때문에 약속을 잡은 것이냐며 스스로를 책망하다가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으니 걱정해봐야 의미없는 일이라며 스스로 힘을 돋구었다. 그러나 다시 후회하고 그런 자신을 다시 한번 위로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또한 만나게 되면 말해야 할 무수히 많은 감정과 기억을 정리해야 됐기 때문에 걸음걸이는 계속하여 무거워졌고 느려졌다.

옆을 스쳐지나가는 차와 사람들, 셀 수 없이 많은 세상을 이루는 것들은 자연스레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며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있는데, 나는 혼자 거센 역풍에 치이는 마냥 시간에 도태되는 느린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렇게 느리게, 한참을 생각하며 왔는데도 그녀를 부르기로 한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조차 생각의 편린을 다 정리하지 못해, 터벅터벅 걷다보니 어느새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버렸다.

애초에 약속에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녁때 만나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긍정의 답만 받아놨었을 뿐, 그것은 스스로 결단이 서면 그때보기 위함이었다. 이는 결심을 내리지 못하면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도망침이 담긴 약속이었지만 지금은 확고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지금 집 앞에 도착해있는데 나와줄 수 있어?”

담담하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불렀지만 가만히 서있는 몸은 심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가리기 위한 허세에 불과했다. 몸과 마음 모두 부들부들 떨렸지만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린 뒤 엘리베이터는 그녀가 살고있는 층에서 멈추었고 곧 1층을 향하여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준 그녀가 이렇게 나오기 전까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 궁금했다. 어린 시절에는 같이 있던 시간이 짧던 길던 꽤 많았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커감에 따라 몇 년간에 걸쳐 교류가 없어져버린 시점에서 용건이 있으니 저녁에 만나달라는 질문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너무도 뜬금없는 나의 요청이 어색하기도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을텐데 그 부탁을 무리없이 받아준 그녀가 고마워졌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현관앞에 선 나와 마주쳤다.

“무슨 일이야?”

그녀의 질문에 난 매끄럽게 다듬어져있지는 않았지만 십년 가까이 쌓아두었던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이해할 수 없겠지만 교류가 끊겨져 있는 지금이……. 그리고 앞으로도 만날 접점이 사라져 만날 일이 없는 이 시점이, 가장 말하기 좋은 때라고 생각했거든.”

"무엇이 고마운 것이냐면 10년 전쯤 네가 나의 첫사랑이 되어준 것이야. 그때부터 좋아한 사람이 너 한사람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이 사람이 없었다면 난 영화에서 사랑의 장면이 나와도, 음악에서 아무리 사랑을 노래해도 그 사랑에 대해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겠구나 싶더라구.”

"물론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가슴에 남아 다른 여자를 좋아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 마음이 드는 여성을 만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계속 품고 있던 사람은 너였기 때문에 그런게 정말 고마웠어. 물론 나중에 다른 사랑이 생긴다면 그 사람에게 감정이 옮겨가겠지만 첫사랑에 관련된 기억이 떠오를 때면 항상 네가 생각날거야. 너는 내 평생의 기억속에 한자리를 계속 차지할테고 그 기억은 생각하면 기분좋은 밝은 추억이니까. 그 것을 선사해준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었어.”

“아마도 앞으로 만날 일이 없겠지. 그래서 부탁하나만 하고 싶어. 악수 한번만 해주면 안될까?”

“응…….”

  그녀는 수락과 함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줬다. 마주잡은 그 손은 방금 집에서 나왔기에 따스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추운 밤거리를 걸어다닌 내 손은 한기를 가득 담아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보다도 차가웠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녀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고 그 따스함은 마주잡은 손을 놓았을 때 큰 여운으로 다가왔다. 단지 기본적인 스킨쉽인 악수에 불과한 접촉이었지만 더이상 만나지 못할 그녀와의 접촉이었기에 나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다음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는 아직 짝사랑은 끝나지 않은 것이겠지만 내 첫사랑은 좋은 결말로 마무리 짓는 것 같아. 고마워, 그럼 안녕.”

말을 끝마치고 바로 뒤돌아 집을 향했다. 못나지 못한 후로도 그녀 외에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마음을 전달한 말이 '사랑해'가 아닌 '고맙다'는 방식이었던 것과 곧장 집을 향한 행동은 내가 겁쟁이기에 선택한 방식이었다. 그녀의 반응이 무서워 나에게 답을 주지 않아도 되는 고마움으로 표현했고 약간의 답변도 말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난 나의 첫사랑의 기억을 조작된 거짓 아름다움이라도 간직하기 위해서 이 방법을 택한 것이다. 더 행복한 이야기가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와 상반되는 끝이 두려웠으니 이 것으로도 그만이었다.

후회가 남을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쌓아놓았던 말을 다 할 수 있어서인지 돌아가는 발걸음은 종전에 비해 가벼웠다. 이후로도 마음 속에 계속하여 저축되어있는 감정으로 남아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일 뿐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덜어내거나 나름의 방법으로 맺음을 지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나는 나의 첫사랑을 내 마음대로, 내가 생각했던 형태로 겨울 밤의 맑은 검은 하늘처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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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백수총각
12/12/11 09:54
수정 아이콘
이런 글에 댓글이 없다니!
화잇밀크러버
12/12/11 11:34
수정 아이콘
하나도 없어서 민망했습니다. 구원의 댓글이네요. 흐흐.
12/12/11 10:27
수정 아이콘
첫사랑이야기네요. 애틋하고 또 신기합니다. 저렇게 싹둑 잘라 간직하는게 참 쉬운일은 아니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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