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꽤 옛날 일이 됐는데, 저도 열아홉 나이에 수원에 있는 S모 회사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공고를 다녔기 때문에 3학년이 되자 학교에서 실습을 나갈 학생을 구하는 시즌이 도래하게 됐었죠. 1차 지원자를 받을 땐 학교에서 잠을 자느라(...) 알지 못했던 관계로 지원하지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공부에 워낙 흥미가 없었던 터라 수능공부따윈 장식일 뿐이란 생각으로 2차 지원자를 받을 때 번개같은 기세로 지원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제 인생에 그렇게 번개같이 움직였던 적은 메피스토와 디아블로를 잡을 때 빼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차저차 이제 공장에 팔려가는 게 확정된 관계로 1차 지원했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거기 분위기는 어떠한가 친구여~?' 라며 물어봤는데, 놈들의 반응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 들어오는 공돌이여]
전 놈들이 단테가 된 줄 알았습니다. 더욱 멋진 점은, 저게 현실이었단 점입니다. 이건 뭐 판데모니움도 아니고...
하지만 전 고1 시절부터 각종 건설현장과 유통현장을 누비며 쌓은 경험치가 있었던 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생산라인에 서서 반복작업을 하는 것인데, 등에 맥주 3짝을 지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나 포대를 던지는 것에 비하면 실로 가소로울 것이란 생각이었습죠. 그런고로 전 친구들의 비명을 이런 근성을 요구하는 일을 겪어보지 못한 애송이들의 불평으로 간주했습니다. 역시 세상 모르는 철부지의 생각이란 이렇게 좁고 얕은 법입니다(...)
이렇게 여차저차 며칠이 지난 후, 전 수원으로 가서 팔달문 근처에 있는 정체불명의 숙소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 제가 생활하게 될 방으로 가보자, 피곤에 쩔어있는 아저씨 두 명이 널부러져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일단 짐을 풀기 위해 불을 켜자 부스스 일어나서 절 반겨주며 이것저것 물어보더군요. 나이는 몇이냐, 졸업은 했냐, 집은 어디냐, 어느 라인으로 가냐 등등... 성심성의껏 대답하다가 'xx로 갑니다' 라는 말이 나왔을 때 심상치 않는 눈빛을 보인 것 같았는데, 생각하면 그때 잽싸게 튀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1층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평범한 남성이었던 저는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숙소는 놀랍게도 남녀가 같이 생활하는 것이었습니다!
절대 여자 목소리가 들려서 내려간 것이 아니고 우연찮게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을 뿐이란 표정을 지으며, 표정과는 상반되는 총알같은 발걸음으로 1층으로 총총총 내려가자 제 또래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사감과 얘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오오 여고생 오오... 심지어 예쁘기까지... 다른 건 몰라도 그 기숙사만은 참으로 축복받은 곳이었습니다. 절 보자마자 "엇? 새로 오셨나봐요?" 하면서 살갑게 말을 걸더군요. 그렇다고 대답하며 나이를 물어보자 저랑 동갑이었습니다. 나이만 같으면 모두가 친구란 사상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고교생답게 동갑이란 걸 알자 바로 말을 놓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저것 얘기를 하다보니 어째 잘 맞더라고요. 갸들도 또래가 없어서 그동안 꽤 심심했었던 것 같았습니다. 농담따먹기를 좀 하다가 오늘은 비번이라서 쉬는데, 있다 너님 출근하는 것 아니면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더군요. 0.2초정도 튕기는 척을 하고 바로 콜 사인을 내렸습니다. 사실 0.2초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육포에 달려드는 멍멍이처럼 신속하고 절도없게 따라나갔지요. 나가서 밥도 먹고, 고교생에 어울리지 않게 맥주도 홀짝홀짝 마시면서 이것저것 얘기도 나누고 즐겁게 놀았습니다. 의기투합을 너무 지나치게 하는 바람에(...) 기숙사로 돌아올 때 쌀쌀하다며 양사이드에 팔짱을 끼고 돌아오는 등 참으로 행복한 하루를 보내며 생각했습니다. 역시 일하러 나오길 잘했다고. 남자만 우글대는 땀내나는 곳에서 살아온 공고생에겐 이는 극락과 같은 것이었지요.
...요즘도 가끔 생각합니다. 쟤들은 신속한 이탈을 막기 위해 공장에서 투입하는 알바가 아니었을까 하고(...)
다음날 일어나서 아침 통근 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됐습니다.
갑자기 시간이 남게 돼 바로 이어쓰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절단신공을 하지 않았을 텐데 흑흑
제가 간 곳은 에어컨 생산 라인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에어컨에 들어가는 컴프레셔를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간단하게 서류를 작성하고 바로 현장으로 투입시키더군요. 자비라곤 0.1g도 없었습니다. 사무실 밖으로 나와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 안 그래도 엄청 시끄러운데 지게차가 왔다갔다하면서 빙~빙 소리를 내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소음 + 뭘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당황스러움이 겹치면서 신삥답게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어리버리하게 서있자 노란 티샤쓰 입은 아저씨가 와서 귀마개를 주고 자길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도착한 곳은 공장 구석에 있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박스 수십 개가 쌓여있었는데, 박스 안에는 이상한 쇠뭉치 수십 개가 비닐에 싸여 있었습니다. 어큐라는 부품이라고 하더군요. 뭐에 쓰이는 건진 당최 모르겠지만, 아무튼 박스에서 부품을 꺼낸 후 비닐 포장을 전부 벗긴 다음에 다시 박스에 넣고 빠레트 위에 쌓는 일이었습니다. '일단' 이걸 하고 있으라고 말하고 노오란 샤쓰 입은 사나이는 사라졌습니다. 저 '일단' 이라는 말에 일말의 불길함을 느끼긴 했으나, 일이 너무 편했던 관계로 금세 잊혀졌습니다. 이 일은 정말 편하더군요. 대략 1시간 가량이 지나서 요령이 생기자 비닐을 한큐에 4~5개씩 잡아뽑는 일에 쾌감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자 5분간 휴식이더군요. 공장의 시스템은 대략 2시간 근무 -> 5분 휴식 -> 2시간 근무 -> 30분 식사 -> 2시간 근무 -> 5분 휴식의 패턴이었습니다. 쉬는시간에 담배를 맛있게 쪽쪽 피우면서 사이다를 마시고 있는데, 아까 그 노샤입 아저씨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저에게 묻더군요. "자네 힘 좀 쓰나?" 라고...
다른 건 몰라도 대한민국 남자가 군대에서 하나 확실하게 배우는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능력을 자신하지 말고, 설령 진짜로 능력이 있더라도 없는 척을 해야 한단 진리죠.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으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선 이는 실로 진리와 같습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전 아직 군에 입대하기 전이었고, 자신있게 외치고 말았습니다.
"제 키를 보십쇼, 나름 힘 좀 씁니다!"
"좋아! 너 이제 어큐 그만 뽑고 나 따라와!"
도착한 곳은 심상치 않은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맞은편에 어여쁜 누나들이 뭔가를 쪼물락대고 있는 바람직한 풍경이 보인다는 걸 제외하면 그 모든 것이 불길함 그 자체였습니다. 뒷쪽에선 마스크 쓴 양반들이 알 수 없는 거대한 쇳덩어리에 용접을 하고 계시고, 위를 올려보자 원숭이마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무슨 고무 뚜껑을 뽁뽁 뽑고 있었습니다. 제가 서게 될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뒷쪽엔 컨베이어 벨트가 있고, 앞에는 돼지고기를 거는 것 같이 생긴 갈고리가 잔뜩 걸려있는 벨트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뒷쪽 컨베이어 벨트에서 오는 무언가를 집에서 앞 벨트에 거는 일 같았습니다. 순식간에 바뀐 환경에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와중에 노샤입 아저씨가 저에게 말하더군요.
"저기 뒤에서 컴프가 올 거야. 그거 잡아다가 앞에 벨트에 걸면 돼. 엄청 뜨거우니까 장갑 세 겹으로 끼고, 허리랑 무릎에 아대 꼭 차라."
"그냥 걸면 되는 건가요?"
"응, 걸기만 하면 돼. 힘만 괜찮으면 간단한 일이야."
...퍽이나 간단하겠소. 그렇게 간단한 일이면 나 오기 전에 서있던 젊은이가 날 보자마자 구세주를 만난 듯한 표정을 지을 리가 없잖소. 허리와 무릎에 아대를 차란 말에 제 불길함은 거의 확신에 이르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마음을 다잡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 까짓 거, 사나이 가오에 힘든 게 대수랴? 나도 지금껏 수라의 길을 헤쳐온 몸이올시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동안 라인은 다시 가동됐습니다.
저쪽에서 컴프레셔가 슬슬슬 오더군요. 바로 앞에서 갓 용접한 따끈따끈(...)한 컴프레셔를 집어서 저기에 걸기만 하면...음?!?!?!
무겁습니다. 이게 진짜 무겁습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kg? 피박입니다. 얄짤없는 피박입니다. 게다가 빨리 옵니다. 진짜 생각보다 겁나게 빨리 옵니다. 최소한 5초에 하나씩은 오는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피박인데 광박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탄력을 이용해서 뭐빠지게 벨트에 걸고 있는데, 왠지 생김새가 미묘하게 달라진 녀석이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이놈이.... 단지 생김새만 달라진 게 아니고 뭔가 더 크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들어보니까 확실히 아까보다 무거웠습니다. 멍텅구리 추가요.
패망의 기운이 온몸을 엄습했지만 좌절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컨베이어 벨트는 자비없게 부품을 일정한 시간으로 토해내니까요. 대략 200개 정도 걸었던가? 팔이 후덜덜 떨리기 시작하더군요. 그래도 나름 학교에서 팔 힘 깨나 쓰는 편인데... 나의 완력은 겨우 이 정도였던가? 실수로 컴프를 하나 손에서 놓치자 쿵! 하며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갈구더군요.
"야야 젊은놈이 왜 힘을 못 쓰냐?"
욕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이런 망할, 그럼 댁이 와서 좀 해보시던가. 속으로 젊으니까 이나마 거는 겁니다(육두문자)를 씨불씨불거리며 그저 걸고 또 걸었습니다. 난 일을 하는 게 아니야, 리듬에 내 몸을 맡길 뿐이지. 진짭니다(...) 순전히 탄력만으로 걸고 또 걸었습니다. 점심시간이 오기만을 바라면서.
지옥의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됐습니다. 30분이란 짧은 시간인지라 잽싸게 튀어가서 식사를 해야 하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함바로 헐레벌떡 뛰어가 식사를 하려는데, 이런 망할! 팔이 마음대로 안 움직입니다. 오른손에 든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입에 넣는 간단한 작업이 뜻대로 수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 오른팔은 불과 2시간만에 컴파일을 해보면 오류가 수십군데는 튀어 나올 듯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팔을 제자리에 두고 얼굴을 숟가락 갖다 대어 밥을 먹는 기묘한 식사를 마치고 다시 죽음의 라인으로 복귀하러 털레털레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할 곳을 다시 보니까, 위에 뭔 전광판이 있는 겁니다. 아래 쓰여있는 5xx라는 숫자는 암만 봐도 제가 건 컴프레셔의 숫자 같은데, 위에 2400이라는 숫자가 보이는 겁니다. 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피박, 광박, 멍텅구리인 상황에서 공장은 자비없이 저에게 쓰리고를 외치더군요. 용접하는 아저씨에게 이거 무게가 얼마나 되나염? 하고 물어보니까 환하게 웃으면서 23~30kg이라고 대답해주시더군요. 25~30kg이라... 레오파르트2A4 무게가 55톤이었던가? 근데 2400개면 25kg으로 잡아도 60톤이잖아? 난 대체 왜 무려 MBT 무게에 해당하는 쇳덩이를 옮기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8시간이란 시간제한까지 있는데 말이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디인가? 내가 공장 꿈을 꾸는 것인가? 공장이 내 꿈을 꾸는 것인가?
온갖 망상에 빠져있었지만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작업을 올리는 벨소리와 함께 컨베이어 벨트는 우렁차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어찌저찌 첫날 지옥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미 난 니 몸과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한 제 오른팔을 감싸쥐며 라인에서 비틀비틀 벗어나려는데, 다시 등장한 노샤입 아저씨가 외치더군요.
"이봐! 오늘은 특근 뛰고 가야 돼!"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어 기숙사로 돌아오자, 어제 저와 함께한 가시나 2인조가 1층에 있었습니다. 절 반갑게 맞아주며 있다 같이 나갈래? 하고 물어봤지만 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1초라도 빨리 누워서 자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전 그제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왜 숙소 아저씨들은(아저씨라봤자 사실 20대 후반이나 됐을까 말까 같았지만) 새파랗고 어여쁜 여고생을 놔두고 그렇게 죽은 듯 자고 있었는지를요.
에필로그
아무튼 전 지옥의 걸걸이(그 작업을 걸걸이라고 부릅니다) 라인에서 2개월 넘게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S사의 높은 분이 공장을 방문하신다고 하더군요. 다들 긴장하고 일을 하고 있는데, 제가 일하는 곳 앞에 멈춰서더라고요. 전 순간 당황했지만, 일이 워낙 빡센지라(...) 그 양반을 신경쓸 여력이 없어서 정신없이 벨트에 컴프레셔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과 뭐라뭐라 얘기를 나누더군요. 뭔가 싶어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공장이 시끄러워서 귀마개를 하는데, 이상하게 사람 목소리는 잘 들립니다)
"이봐, 저거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예, 벨트에 컴프레셔를 거는 작업입니다."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고, 저걸 대체 왜 사람이 하고 있냐고!"
...그렇습니다. 그 높으신 분은 바로 앞에서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데, 저걸 왜 '사람'이 하고 있는지 궁금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흘러 제가 다른 라인으로 옮긴 지 좀 됐을 때, 전 걸걸이 라인에 기계가 설치되어 이제 그 일을 기계가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덧 : 제가 걸걸이 라인을 그만두자 저와 애매모호한 관계(...)로 잘 지내던 그 아이는 기숙사를 옮겼습니다. 알바설을 뒷받침하는 0.1g정도 고려할 만한 근거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