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렴청정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자리. 그 뒤에는 발을 내린 채 그걸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뭔가 배후에 있는 무시무시한 포스가 느껴지는 가운데...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는 말은 이렇게 남자 신하들과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발을 내린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왕이 어리거나 몸이 안 좋은 것 등의 핑계로 다른 사람이 대신 정치를 하는 것을 섭정이라고 하죠. 그 중 왕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등이 대신 하는 것을 수렴 청정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옛 것을 좋아하는 조선답게 그 근거도 뚜렷했죠.
"수렴 청결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한나라의 등후와 송나라의 유후가 있었는데" (성종 6년 12월 13일)
첫 수렴청정을 했던 성종 대에 나온 말입니다.
중국에서 처음 수렴 청정을 한 이는 바로 한고조 유방의 아내 여후입니다. 그 외에 유명한 사람으로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가 있죠. 이들의 공통점은 조선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입니다. 측천무후의 경우엔 아예 황제가 되죠. 또 하나, 이 셋 모두 악녀로 불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가 조선의 특성과 여군주의 한계를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조선 이전에는 고구려에서 1회, 신라에서 2회, 고려에서 4회가 발견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다루진 않겠습니다. 기록 부족도 부족이지만 조선 이전으로 가면 찾아 볼 게 너무 많으니 -_-; 제가 조선을 좋아하는 것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조선 얘기밖에 못 할 거 같네요. 그럼 조선에서 수렴청정한 여인들을 모아 보겠습니다.
정희왕후 - 13살 성종 대신 7년간 수렴청정
문정왕후 - 12살 명종 대신 8년간
인순왕후 - 16살 선조 대신 1년간
정순왕후 - 11살 순조 대신 3년간
순원왕후 - 8살 헌종 대신 7년, 18세 철종 대신 6년간
신정왕후 - 13살 고종 대신 2년간
이 중 1년만 하고 손을 뗀 인순왕후, 합쳐서 13년이나 했지만 세도정치기간이라 딱히 크게 한 게 없는 순원왕후, 사실상 대원군 섭정기였던 신정왕후(조대비로 유명하죠) 시절은 크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럼 남은 건 성종 때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그 유명한 문정왕후, 그리고 정순왕후가 되겠군요. 시작해 보죠.
2. 정희왕후
예종이 죽었을 때 신숙주는 세조의 사위인 정현조와 함께 몇 차례 대비전을 드나듭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네 살로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죠. 세종에서 문종으로 이어지는 단 한 번 빼고는 왕위 계승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세조-예종이 그나마 제대로 되긴 했지만 그 예종이 1년만에 죽은 상황이었습니다. 세조 덕분에 공신들의 입김은 워낙에 큰 상황이었구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기 남편이 어린 왕을 몰아낸 걸 본 사람입니다. 왕건부터 이어진 전통대로 망설이는 남편을 다그치기까지 한 여걸이었죠. 왠지 마초 같은 세조가 팔불출 느낌이 날 정도로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훈련할 수 있는 기회다"면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했던 사람이었죠.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지만, 그녀가 울고만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원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자산군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마는 세조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네 살의 제안대군, 열여섯 살이었지만 "병약"했다는 월산대군 대신 그녀가 선택한 건 열세 살의 자을산군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둘에게는 없는 게 있었죠. 그의 장인이 한명회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한명회를 후견인으로 두면서 왕권에 대한 위험을 없애려 한 정희왕후 윤씨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 한명회, 신숙주 등의 합작품이었던 것이죠. 어차피 그녀에게는 셋 다 귀여운 손자였으니까요. 성종을 앉힌 그녀는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나름 우려도 있었겠습니다만, 그녀의 치세 동안 별로 흠 잡을 만한 건 없습니다. 당시 시각이나 현대 시각 어느 쪽으로든요. 대표적으로 볼 만한 것이 자식이나 손자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에 손 댄 거였습니다. 단종의 부인 송씨를 챙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기 남편이 저지른 걸 정리해 나간 거였죠. 호패법 역시 아들부터 손자인 예종과 성종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거였는데, "세조가 이랬다"면서 과감하게 없애 버립니다. 거기에 성종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죽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했고,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를 예종의 비인 인혜대비보다 더 높여서 왕대비로 합니다. 신하들은 반대했지만 역시 세조가 이랬다면서 집안일이라는 걸 강조, 밀어붙이죠.
정치에서도 자기를 부각시키지 않고 언제나 "주상이 이랬다" "주상의 결정이다"면서 성종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반면 실책이 있을 경우 자기가 덮어 썼죠. 정말 제대로 된 후견인의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성종이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녀는 수렴청정을 중단한다는 언문으로 된 교지를 내립니다. 신하들이 제법 반대했지만 결심을 돌리지 않았고, 그 후에는 정치에 절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성종 14년 3월 30일, 세상을 뜨는데 사관의 평은 정말 칭찬 일색이죠.
"(성종을 왕에 앉힌 건 좀 논란이 되겠지만) 후사를 계승하는 중대함을 근심하여 그 허물을 몸소 떠맡으며 세조의 유교를 받들고 문종의 영령을 위로하여, 먼 장래의 계책과 인후의 뜻을 베풀지 않음이 없으셨으니, 그 공덕의 넉넉함이 또한 어찌 선인(어진 왕비)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밌는 건 이 때 그녀의 업적으로 든 것이 "간경도감" 혁파였는데, 이는 세조가 불경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습니다. 뒤의 여인들과 비교해 보면 재밌죠 :)
그녀 역시 공신들을 휘어잡지는 못 했습니다. 애초에 한명회와 연합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원상제(원로 대신들이 임금에게 자문하는 제도)를 없애자는 말에 반대하며 원상들을 다독였고, 종친인 구성군 이준이 역모에 관련되었을 때 결국 공신들을 이기지 못 하고 폐서인했죠. 수렴 청정을 빨리 거두려 했지만 스무 살까지 계속한 것도 딱 그 때 성종의 중전 한씨(그러니까 한명회의 딸)가 죽어서 공신들을 자극할까봐였습니다.
대신 그녀는 손자의 권위를 최대한 올려주었습니다. 자신의 친척임에도 외척들을 등용하는 데 엄격했고, 공신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크게 의지하지 않았죠. 어린 임금과 공신들이 설치는 위험한 상황, 나라가 막장이 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은 오히려 세종과 비견될 태평성대로 기록되고 있으며, 성종은 세종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 전기의 성군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순왕후의 노련한 정치와 성종 자신의 무시무시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뭐 그러고도 한명회 등이 물러난 건 시간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대신에 이어 대간들의 힘이 너무 커지면서 고생 많이 했지만요.
2. 소혜왕후
직접 하진 않았지만 빼 놓을 순 없네요. 소혜왕후라 하면 잘 모르겠죠. 그녀가 바로 인수대비 한씨입니다.
성종의 배후에는 세 명이나 되는 후견인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위에서 설명한 정희왕후, 자성대비였죠. 두번째가 성종 자신의 모후 인수대비, 마지막으로 예종의 비인 인혜대비입니다. 후에 안순왕후가 되죠. 성종 대의 기사를 보면 삼대비에게 문안한다는 말이 많습니다. 정말 단종이 생각나는 부분이죠.
이 중 인혜대비는 아무래도 영향력이 적었던 것 같지만 인수대비는 오히려 정희왕후보다 더 영향력이 컸다고 평가받을 정도입니다. 당시 여성들 중에는 정말 드물게 문자를 알았거든요. 유교 경전부터 각종 사서까지 두루 읽었고, 그것을 통해 여성 교육책인 "내훈"을 쓴 사람입니다. 정희왕후도 그녀가 문자를 아니 수렴 청정을 맡기는 게 낫지 않냐고 할 정도였죠. 정희왕후는 수렴 청정 내내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녀의 정책에도 인수대비의 생각이 많이 끼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인수대비가 더 많이 알려진 건 바로 불교 폐지 문제였죠. 그녀는 봉선사에서 금자경 간행 작업을 벌이는데, 여기서부터 대간이 마구 문제 삼기 시작합니다. 인수대비는 강력한 불교 옹호론자였거든요. 그녀가 간행한 불경은 한문, 한글은 물론 산스크리트어까지 함께 썼다고 합니다. 정말 당대 학자들과도 비교할 만한 인텔리였던 거죠. 그런 그녀의 강력한 반대로 불교 탄압은 조금이나마 줄어듭니다. 아예 직접 언문으로 글을 써서 자기 주장을 알리기도 하죠. 그 내용 중 일부입니다.
"나는 사재로 경을 만들고 사곡으로 사람들을 먹여서 조금도 국가에 관계되지 않는데도 대간에서 논란하는 것이 이같이 심하니, 내가 할 수가 없다 (중략) 만일 불도가 허망하다고 하면 어찌하여 선왕과 선후를 위해서 수륙재를 베풀었으며 국가를 위해서 명산과 대천에 제사 지냈겠는가" (성종 8년 3월 7일)
"유교와 불교는 서로 용납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부처를 다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중략) 자고로 후비(后妃)가 부처를 좋아하지 않은 자가 몇이나 있었는가?" (성종 11년 5월 30일)
이렇게 그녀의 강력한 반대로 불교 폐지는 꽤나 시간이 걸리게 되죠. 당시에는 도첩제로 승려가 되는 자격증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것도 불교를 억압하는 제도였죠. 대신과 대간들이 입을 모아 주장한 것은 이것조차도 폐지하고 불교 자체를 금지하는 금승법이었습니다. 이게 통과된 것은 성종 23년이었죠. 이 때도 대비는 인혜대비와 함께 언문으로 교지를 내려 반대합니다만... 여기서 포기할 대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아예 대비의 국정 관여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하죠.
"대비는 국정에 참여할 수 없고 궁위의 말을 조정에 보일 수 없으며 전하도 간하여 그만두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성종 23년 11월 21일)
결국 인수대비는 포기하게 되고 금승법은 통과 되죠. 뭐 그녀의 궁중에서의 힘은 여전해서 중전 윤씨를 폐하는 데도 크게 힘을 쓰긴 합니다만... 덕분에 성종이 죽은 후 큰 고생을 하게 됩니다. 할머니도 협박한 못난 손자 놈 때문이었죠. 직접 청정하지 않았기 때문도 있겠지만 말년이 그래서인지 그녀에 대한 제대로 된 논평은 보이지 않네요.
이 쯤에서 다시 정희왕후의 업적에서 "간경도감 혁파"를 다시 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불교에 대한 자세는 그 군주부터 수렴청정한 대비들을 평가하는 데 크나큰 기준이 됩니다. 특히 이 다음에 나올 사람의 가장 큰 업적이 불교를 되살린 거였으니까요.
3. 문정왕후
(1) 작서의 변
중종 22년, 세자가 있던 동궁 북쪽의 숲에 불탄 쥐가 나무에 매달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며칠 후에는 왕 근처에서도 불탄 쥐가 발견되죠. 왕과 대비는 이를 덮으려 하지만, 어찌어찌 알려졌는지 3월부터 범인을 찾으라는 말이 들끓게 되죠.
당시 중전이었던 장경왕후가 죽고 새로 중전을 들인 상황이었습니다. 남곤은 그를 속히 세자로 세워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여섯 살의 나이에 세자가 되죠. 이 때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에겐 19살 된 아들이 있었는데 복성군이었죠. 세자의 나이 13살 때였습니다. 중종도 그녀를 중전으로 앉히고 싶어했지만 정광필의 반대로 새로이 중전을 들였었죠. 그 중전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를 저주하는 증거물이 발견됐습니다. 그것도 세자를 지지하던 중신 남곤이 죽은 직후였죠. 그렇다면?
경빈은 끝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붙잡힌 시녀들도 끝까지 부인했지만, 신하들부터 대비까지 경빈을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그녀와 복성군은 폐서인돼서 고향으로 쫓겨납니다. 작서의 변이죠.
이 무렵 해서 돌아온 사람이 김안로였습니다. 남곤에 의해 유배된 자였죠. 그는 착실히 반대파를 누르며 돌아왔고, 돌아온 후에도 착실히 반대파를 숙청해 나갑니다. 조광조 이후로 중종의 큰 신임을 받은 자였고 그가 숙청한 이들 역시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몰아낸 이들이었죠. 그가 크게 일을 한 판 벌입니다. 중종 28년이었습니다.
"목패의 1면에 석 줄로 나누어 쓴 글에 ‘이와 같이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이와 같이 세자 부주의 몸을 교살할 것. 이와 같이 중궁을 참할 것.’이라 했고, 또 1면에 쓴 글에는 ‘5월 16일 병조의 서리 한충보 등 15인이 행한 일임.’이라고 하였다"
동궁이 있는 빈청 근처에서 발견된 나무 조각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눈코입부터 머리카락까지 자세히 묘사돼 있었는데 팔다리는 없었죠. 의외로 범인은 쉽게 잡혔는데 수견, 강손, 효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한충보를 대역죄에 빠뜨리려 했다고 답 했지만, 계속되는 조사에서 다른 말이 나오죠.
"수견·강손과 같이 모의해서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바로 박씨를 위하여 동궁을 해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경빈 박씨를 모시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약을 받았고, 이항, 이행 등 김안로가 몰아냈던 인물들도 경빈과 관련됐다는 혐의로 죽게 됩니다. 대신 김안로의 힘은 갈수록 강해졌죠.
그랬던 그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게 됩니다. 뒤늦게 아들을 낳은 중전이었죠.
그녀가 바로 문정왕후입니다.
(2) 대윤 소윤
경빈을 몰아낸 것은 세자에게도 힘이 됐지만, 중전이었던 그녀에게도 힘이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모르겠네요. :) 하지만 그녀가 애초에 욕심이 있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서 그게 본격적이 됐죠. 그녀의 오라비들인 윤원형, 윤원로의 힘도 커져 갈 때였습니다.
김안로는 먼저 수를 써서 "중전이 동궁을 박대한다"는 소문을 퍼뜨립니다. 이에 맞서 윤원로 형제는 세자의 외숙부 윤임을 찾아가서 해명하려 하죠. 이게 퍼지면서 그들 형제를 탄핵하기 시작합니다. 중종은 이들을 잠시 유배 보내지만, 본심은 다른 데 있었죠. 이 때의 상황을 [부계기문]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윤안인은 바로 문정왕후의 당숙인데, 몰래 안로 내쫓을 것을 도모하여 비밀리 왕비에게 아뢰기를, “안로가 모의하여 왕비께 해를 끼치려 합니다.” 하였다. 왕비가 크게 두려워하여 임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우니 임금이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었다. 이에 왕비가 대답하기를, “오랫동안 좌우에 모시고 있었는데 이제 폐함을 당하게 되니 슬퍼집니다.” 하였다.임금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왕비가 안로의 계교를 고하니, 임금이 크게 노해서 즉시 죽이려 하였으니 그 권세가 큰 것을 두려워하여 밀지를 안인에게 내려 도모하라고 하였다."
밀지를 통해 임금의 뜻을 알리고, 그를 통해 대신과 대간들이 입을 모아 탄핵하는 것, 이것은 조광조를 숙청할 때와 똑같았죠. 왕은 이걸 처음 듣는다는 듯이 놀라며 대신들을 불렀고, 여기에는 세자의 외숙부였던 윤임도 가세합니다. 집에서 잔치하고 있던 김안로는 유배되고 곧바로 사약을 받게 되었죠. 이렇게 윤씨 형제를 넘어 중전까지 폐위시키려 했던 김안로는 사라집니다.
이제 남은 건 파워 게임이죠.
"풍문에 의하면 간사한 의논이 비등하여 ‘윤임을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이라 하는데 각각 당(黨)여를 세웠다.’ 합니다." (중종 38년 2월 24일)
조정은 세자를 비호하는 윤임과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을 비호하는 윤원형으로 나뉩니다. 이를 각기 대윤과 소윤이라고 불렀죠. 이런 가운데 중종은 문정왕후를 총애하며 윤원형에게 힘을 주었죠. 대사간 구수담이 이를 문제삼았지만 적극적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고, 저 뒷부분은 "설마 그들이 그랬을까. 다만 그런 간사한 얘기가 있다"라는 식이었습니다. 왕과 신하들도 비슷하게 결론을 내렸죠. 그저 한 번 표면에 꺼내 양 세력에게 경고를 주는 정도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 바램과는 달리 양측의 대립은 심화되죠.
결국 중종은 이듬해에 둘을 모두 벌 줍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충격이었죠.
"신들이 보건대, 위에서 분부하기를 ‘윤임은 외방으로 귀양보내고 윤원형은 파면해야 한다.’ 하셨으니, 신들은 매우 놀랍습니다" (중종 39년 9월 29일)
윤임이 김안로와 연관돼 있다가 배신하기는 했지만 한 쪽은 귀양, 다른 한 쪽은 파직에 그친다는 건 명백히 소윤을 편 드는 거였죠. 더 큰 문제는 세자의 힘이 줄어든다는 거였습니다. 이런 반대에 중종은 윤임의 직첩을 뺏는 정도로 줄였죠. 하지만 대간들은 양 쪽 모두를 무죄로 하라고 연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윤임이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정왕후의 위세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거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종 38년 초에는 동궁에 불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별 일 없었지만, 야사에서는 이를 소윤의 짓으로 단정 짓고 있죠. 이 때 중종이 "어마마마의 뜻이라면 효를 위해 죽겠다"고 나가지 않다가 중종이 찾는 소리를 듣고 "모후께는 효지만 부왕께는 불효구나"라면서 나갔다고 하죠. 과연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을까요? 일단 궁을 관리하는 자를 벌 주는 선으로 끝납니다.
이 힘싸움은 의외로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중종이 얼마 안 가서 죽었거든요. 세자는 무사히 왕위에 오릅니다. 그가 바로 인종입니다.
(3) 정면 돌파
"중전께서 찬궁을 통명전【내전의 깊숙한 곳에 있다.】에 설치하고, 여차는 여휘당에 설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에 대신들이 너무 좁다고 했지만 강행하죠. 이 날 사관론은 왜 그렇게 좁고 깊숙한 곳에 했냐면서 열 받는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후 한 달만에 곡하는 걸 그만두라고 하게 되죠. 경원대군의 종기를 핑계댔는데, 자전(임금의 어머니)의 명이라는 걸로 수많은 반대에도 밀어붙입니다. 뭐 그래도 나라의 국모기는 했지만, 나름 위험을 겪은 상황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의문이 들죠.
인종은 유난히 효성이 지극했다고 합니다. 몸이 아픈 가운데서도 벼락이 치자 문정왕후가 놀라지 않았냐며 문안드리라고 명했을 정도였죠. 그가 일찍 죽은 이유부터가 중종이 죽은 후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정왕후가 까이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왕을 미워했다"는 거죠. 그녀의 졸기에 이런 게 적혀 있습니다.
"빈번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는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윤원형 등 소윤을 처벌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대윤 세상이 된 거나 다름 없었으니까요. 이런 가운데에서 문정왕후는 자기 존재감을 크게 드러낸 거죠. 인종은 오히려 윤원형을 공조 참판에 앉히면서 소윤에 대해서도 별 미움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행동이 이것조차도 계산한 거였다면... 무서워지죠.
인종은 계속 금식하며 중종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신하들은 계속 그에게 음식을 들라 하지만 인종은 딱히 듣지 않았죠. 졸곡이 끝나는 5개월 동안 고기를 먹으라는 대신과 알겠다고만 하는 인종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랜 금식 때문에 탈이 난 거라고 봐야겠죠. 딱히 병을 치료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겨우 9개월, 조광조를 신원하라는 것과 동생 경원대군에게 전위하라는 명을 내리고 세상을 뜹니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병이 들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문종과 함께 상을 치르다 줄초상 당한 케이스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그 자신부터가 살려고 하는 욕구가 안 보이니까요. 착하고 효성스러운 게 강조되었던 인종, 그에게 정치판은 어울리지 않았을지도요. 그리고 그런 착했던 인종과 대비되면서 문정왕후가 더 까였던 거겠죠.
이 때도 문정왕후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들으니 상의 증세가 전보다 훨씬 더 위중하시다 한다. 일이 이러한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이 더욱이 미안하므로 하는 수 없이 의혜 공주의 집으로 옮아가서 자주 안부를 물어야 하겠으니, 모든 일을 빨리 갖추라."
말 자체야 틀린 게 없습니다. 효성 깊은 자식이었으니까요. 이 때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포기하지만, 사흘 후에 다시 시도합니다. 이후 윤임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면 그 이유가 짐작이 가죠.
"나라의 권리를 대비에게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다"
인종이 죽을 때 윤임이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나누던 말이라고 합니다. 누명일지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윤임은 결국 명종의 등극을 허용해야 했죠. 인종에겐 후사가 없었으니 당연한 이치였을 겁니다만... 세상사가 그리 생각대로 되나요. 중종이 죽었을 때, 인종이 죽었을 때 보여준 문정왕후의 돌출행동은 나라의 안주인이자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낸 거라고 평가됩니다.
이후 경원대군은 열두 살의 나이로 무사히 왕위에 오르니 바로 명종입니다. 하지만 모든 게 마음대로 흘러가진 않았죠. 시작하자마자 윤원형의 형 윤원로가 탄핵당합니다. 영의정 윤인경부터 시작된 탄핵으로 윤원로는 해남으로 유배되죠. 여기까지는 감내한 그녀였습니다만... 그냥 당하고만 있을 사람도 아니었죠. 이제 국정의 전권이 그녀의 손에 들어왔으니까요.
오래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조선 역사상 두 번째 수렴 청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정희왕후와 인수대비가 조선시대에 훌룡한 왕가의 여성일수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정희왕후는 남편과 오랫시간 함께하고 의논하고 조언하면서 남편의 쿠데타를 돕고 남편이 왕이 되고
아들이 일찍 죽어서 그렇지 아들,손자가 왕이 되는 모습까지 지켜본 보기드물게 누릴것 다 누리고
성공한 왕가의 여성이라면 생각합니다
인수대비는 남편이 일찍 죽었지요.워낙 똑똑한 여성이라는것은 알겠는데 며느리인 폐비 윤씨한테
한짓을 보면 과부? 홀시어머니의 이기적인 아들사랑과 며느리에 대해 질투했다고 생각합니다
폐비까지는 몰라도 궁녀의 증언까지 조작해가면서 세자를 낳은 며느리를 죽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며느리가 낳은 연산군을 어느집 할머니처럼 사랑하지도 않았을것 같고요
문정왕후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악녀 둘중에 하나는 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정왕후는 살기도 오래살고 죽을때까지 아들인 명종에게도 권력을 주지 않았죠
땡중과의 간통도 워낙 지독한 문정왕후라서 그런 소문이 있는건지 아니면 신빙성이 있는건지도
궁금하네요
드디어!! >(>.<)<
'한국사 최고의 여자 위인'에 대한 질문을 드렸던 입장에서 이번 글을 많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희왕후가 인상 깊네요. 무리수로 보일 수 있는 시작 부분만 빼면 참 좋은 리더이자 좋은 할머니였던 것 같습니다. 칼 같은 리더십 이양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도 공은 돌리고 과는 취하는 것은 '좋은 리더'라고 되는 게 아니고 대상을 향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안되는 일인데... 리더로서 공과를 공정하게 판단하기만 해도 합격점이고, 반대로 공은 취하고 과는 돌리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 [S2]
잘 읽었습니다. 눈시BB님 글 읽다보면 한국사 시험도 통과할 수 있을것같아요.
단종이 폐위된 전적이 있는 가운데 그 뒤 5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또 어린아이가 왕위에 오른다는게 어찌보면 굉장히 위험한 시기였을텐데 정희왕후야말로 성종대 태평성대의 기반을 다져놨다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그러나 오타가 숨어있네요. 정희왕후 부분의 밑에서 둘째줄에 정희왕후가 정순왕후로 쓰여있습니다. 오타를 보며 든 생각이, 한자는 다르지만 두 정순왕후가 있는데 어쩜 그리 다를까 하는...잡생각입니다-_-;
아, 질문이 하나 있는데..
정희왕후, 소혜왕후, 정현왕후 등등 '왕후'로 부를 때의 존호와 자성대비, 인수대비, 자순대비 등등 '대비'로 부를 때 존호가 다른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차피 한 사람에게 올려진 존호인데 말이죠. 대비로 부를 때 왕비때 사용된 존호 그대로 쓰는 경우를 보지 못해서요. 그리고, 사전 찾아보면 존호가 무척 긴데, 그중에 무엇을 보통 쓰는지도 모르겠고..
xx왕후로 부르는 존호는 사후에 붙였던것같기도 한데 그러면 xx대비라는 건 생전에 붙여준건지... 여튼 어렵습니다.
(소혜왕후 부분에 '예종의 비 인혜대비...후의 안순왕후가 된다'란 부분이 있어서 든 생각입니다.대비 존호가 먼저 붙여진 케이스인가요?)
왕들한테 존호 올린것도 그렇고, 한사람한테 웬 존호를 그렇게 자주 올려서 길게 만들었는지ㅠㅠ어차피 두글자만 부를거면서;;
어려운만큼 궁금한것도 많은게 역사인가봅니다
제가 눈시BB 님 글을 다 읽지는 못했기에 놓친 것일 수도 있지만, 문종은 줄초상이 아니라 수양대군에게 독살당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조선왕 독살 사건' 에서 보았습니다. 그 책에서는 당시의 어의, 강맹경, 수양대군 등등의 움직임을 근거로 해서 '이 정도면 물증이 있다고 봐도 되는 수준' 이라고 몰아가던데, 사실 저는 지식이 짧아서 그냥 다 믿어지더군요. 혹시 이 부분에 대해서 눈시BB 님이 커멘트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