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친구의 후배와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얼굴이 무척이나 앳되보여서인지 종업원이 걸어오더니 신분증을 달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대학교 3학년때까지도 신분증을 달라고 했었는데 군대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았다. 그래 2년치의 짬밥에는 5년치의 세월농축제가 들어있다.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지만 항상 술집에서 신분증을 달라고 물어봐줬으면 하는 기대를 가진다. 전역후에도 신학기 교정에서 동아리 권유를 받고싶어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93년생 이시라서 판매가 어려울것 같네요."
"아.. 저 빠른 93인데 어떻게 안될까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힘들것 같네요. 안그래도 저번에 처벌받은적이 있어서..."
93년생이라니... 88년생을 보고 호돌이가 뭔지 아냐고 물었던 때가 어제같은데 이제는 93년생이 나와 함께 술을 먹는 때가 왔구나. 93년 이 친구가 태어난 해에는 내가 기억할만한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93년에 난 대전이라는 곳에 처음 가봤고 외국인을 처음봤고 조용필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처음들었고 보트를 처음 타봤고 치즈버거를 처음 먹어봤고 고아가 될 뻔했다.
그렇게 단편적인 것들은 생각이 나지만 자세한 내용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내 눈으로 보았던 외국인의 생김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축하무대에서 조용필이 불렀던 노래도 그때 내 귀를 울렸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난생 처음 먹어보았던 치즈버거의 맛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의 기억중 아직도 선명한건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베고 누웠던 할아버지의 무릎베개와 그 따뜻했던 손이다. 차창을 때리던 굵은 빗소리에도 불구하고 잡았던 할아버지의 손은 참 따뜻했다.
어찌어찌 친구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할아버지께서 침대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역시 무릎은 그때처럼 넓지 않았다. 문득 손을 잡아보니 손은 그때처럼 따뜻했다. 10년후 2021년에도 이렇게 따뜻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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