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들하고 더치페이로 계산하려면 왠지 좀 썰렁하다. 술값이 아까운건 아닌데 내가 내기도 좀 그래. 내가 부자도 아니고 말이야.
그럼 내기라도 해서 한 사람 몰아주기나 해야되겠다. 걸려도 뭐 기분좋게 쏜 셈치고 안걸리면 뭐 행복한거지.
"야 내기로 그냥 한사람 몰빵 하자"
"뭘로할건데?"
"가위바위보는 심심하고 소주뚜껑 쳐내기는 너무 식상하고 글쎄 뭐가 좋을까?"
"사다리타기 어플?"
"어플은 좀 그래. 우린 아날로그 키드잖어. 어플로하면 손 맛이 떨어져 손맛이."
"왜 그 쪽팔려 게임이라고 있잖아. 우리 중학교 때 수학여행이나 소풍가서 종종 하던거"
"야 이 나이먹고 옆테이블 남자한테 연락처 물어보는 그런거 하자고?"(여자한테 하면 쪽팔려 게임이 아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예전에 했던 일 중에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창피한 그런 기억 있잖아. 그런거 하나씩 말해보고 가장 안구에 습기차고 공감되는 사연 말한 사람이 1등하기. 쪽팔려 게임 토크판 이라고 해야되나?."
"아 나 그거 비슷한거 만화에서 한번 본거 같은데? 일단 한번 해보고 결정하자"
"나 아까 도서관에서 짧은 옷 입은애 다리보다가 눈 마주쳤잖어. 볼려고 한건 아닌데 진짜 창피하더라"
"야 그게뭐냐. 장난하냐? 여기 계산서 있으니까 미리 얼마 나왔는지 확인이나 좀 해봐라"
"아 생각이 안나는걸 어떡하라고... 이런건 하자고 한사람이 제일 생각이 잘나는거야"
"형 정돈 되야 쪽팔린 기억이지. 니들 고 3때 기억나냐? 니들 상향지원은 안하고 안전빵으로 대학 쓸때 내가 니들 엄청 비웃었던 거 기억나냐? 이번에는 어려워서 애들이 다 하향지원 할 거기 때문에 상향이 안될수가 없다고 그랬잖어 그래서 담임한테 갖은 욕 들어가면서도 고 3때 남자의 3상향 지원했었잖아."
"그때?? 허세 부리더만. 결국 재수 했잖여. 근데 그건 쪽팔린 기억이 아니라 슬픈 기억인데? 이제 나만 하면 되냐? 나 1학년때 그 누나 있잖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웃기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한데 3월에 엠티서 한번보고 모임같은데서 밥 몇번 먹었다고 고백했었잖아. 나 그 생각만하면 자다가도 진짜 손발이 오그라든다. 서로 몇번이나 봤다고 머리에 잔뜩 힘주고 옷도 진짜 어색하게 입고 꽃다발들고 편지에 토이CD에.. 아오 내 손발!!!"
"그때 너 지켜본다고 나도 숨어있었잖아. 고백한다고 할때도 엄청 말렸고 그래서 너 거절당할때 진짜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고백끝나고 걸어오는 니 얼굴보고 진짜 웃을라다가 참았다. 군대에서 소대장 깨질때 웃음참던것보다 더 힘든 기억이여."
어쨌거나 술은 되지도 않는 미니스커트 얘기를 한 친구가 사기로 했다. 일단 술 안쏴서 좋긴한데 잊고있었던 창피한 기억이 갑자기 머릿속에 확 떠오르더니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된다. 진짜 거기서 그러면 안되는데. 안돼 제발 말하지마 말하지마.
사실 고백 자체는 후회 안하는데 진짜 타이밍이 좀 그랬다. 탱크보고 홀린듯이 뛰어들어가서 마인에 녹아버리는 질럿같이 난 달려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적어도 아비터 뜰때까지는 기다렸어야 되는데.. 그럼 결과는 좀 달라졌을까? 아비터가 뜨면 이길 수 있는 게임도 있지만 떠도 못 이길 게임이 있다. 아마 아비터가 떠도 그 게임을 이길 순 없었을 거다. 근데 이기든 지든 적어도 아비터가 뜰 시간 까지는 기다렸어야 됐다.
그래 적어도 아비터가 뜰 시간까지는 기다렸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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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자려고 누웠을 때 갑자기 생각나는 기억들이 있죠..
그중에 정말 피곤해서 누웠다가도 기억이 나면 흠칫 놀라며 잠에서 깨게 되는 원탑기억이 있는데..
고3수능 전날에 같은반이었던 아이에게 고백을 했던..
그전까지 그닥 말도 안했었는데 정말 뜬금없는 고백이었던..
뭐랄까 그때는 수능 끝나면 보기 힘들어진다.. 라는 생각이었을 건데..
말그대로 묻지마 초반 올인빌드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