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산 왜영 방화 사건
97년 1월 1일, 이순신에게서 장계가 올라옵니다. 12월 12일 거제 현령 안위가 그 휘하 김난서, 신명학 등과 작전을 짰고, 김난서 등이 부산의 왜영을 불태웠다는 거였죠.
이 때의 전과를 보면 강고 1천여 호, 화약이 쌓인 창고 2개, 군기와 잡물 및 군량 2만 6천여섬, 왜선 20여 척 등이었습니다. 전투로 인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크나큰 전공이었고, 마침 전쟁이 다시 시작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적의 물자를 확실히 불태웠던 거죠.
문제는 이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김신국은 이것이 이원익의 군관 정희현의 심복 허수석이 한 것으로 역시 미리 작전이 짜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록을 살펴보니 부산 왜영을 불태우려고 한다는 말이 보이긴 하네요) 이것은 허수석이 한 것이고 이순신의 군관이 마침 그 곳에 있다가 보고 이순신에게 거짓 보고를 한 것이라는 겁니다. 자세한 건 이원익의 장계에 있다고 하는데... 정작 이원익의 장계가 없습니다.
수정실록에서는 이 내용을 이원익이 자기에게 직접 말 한것으로 나오죠.
문제는 시간입니다. 이순신의 장계는 12일의 전과를 27일에 써서 올렸고, 1월 1일에 도착합니다. 김신국은 25일에 한양에서 출발해서 이원익에게로 가죠. 이순신이 27일에 장계를 보낸 사실을 김신국이 알아내고 그 전말을 알아내서 잘못됐다고 장계를 보내서 도착한 것은 1월 2일. 이것은 김신국 역시 상황을 제대로 모른 상태에서 이원익의 말만 듣고 바로 보낸 것을 뜻 합니다.
이원익의 장계가 수정실록에 있는데 "적의 소굴 중 상당수가 불에 타 어느 정도는 당초 계획대로 되었으나" 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원익 역시 같은 입장이었던 듯 합니다. 하지만 그도 그 불 탄 것 및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김신국이 쓴 내용에 있다고 했죠.
"부산 왜영 방화 사건"의 전말입니다.
하지만 원균옹호론에서 말하듯 이것이 이순신의 죄로 몰리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순신도 자기의 공이 아닌 안위의 공이라 말했고, 역시 안위에게 들은 것 (자기와 함께 작전을 짰다는 말은 없죠)이었죠. 마찬가지로 김신국, 이원익 역시 허수석에게 들은 것이었습니다. 이 허수석은 부산 왜영은 드나들던 사람이었죠. 안위와 함께 일을 벌인 이들도 마찬가지였구요. 제대로 따지려면 이 당사자들을 불러야 될 것인데... 이후 따로 언급이 없습니다. 확실한 상황을 알기 어려우니 그냥 묻어버린 것일지도요. 애초에 김신국의 장계 역시 이순신을 욕 하는 게 아니라 부하들의 거짓 보고를 들은 것 뿐이라고 크게 비난하거나 하지는 않는 모습입니다.
이후 이 사건을 들추긴 했지만... 그 때는 이미 이순신이 한 모두가 그냥 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2.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1월 11일, 김응서의 장계가 올라옵니다.
"이달 11일 요시라(要時羅)가 나왔는데 행장(行長)의 뜻으로 말하기를 ‘청정이 7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일에 이미 대마도에 도착하였는데 순풍(順風)이 불면 곧 바다를 건넌다고 한다. 전일에 약속한 일은 이미 갖추었는가? 청정이 바다를 건너면 비록 심하게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바다 가까운 지경은 틀림없이 약탈할 것이니 나오기 전에 예방하여 간사한 계교를 부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요시라는 고니시의 부하로 김응서와 예전부터 만나던 사이였죠. 그런데 그가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이 언제 오니까 요격하라는 정보를 줍니다. 조선 조정도 요시라에게 호의적이었고 고니시와 가토의 사이 역시 조선도 잘 알고 있었죠. 하지만 김응서도 장계에서 이 말을 다 믿을 수 없고 이미 늦지 않았을까 하는 말을 합니다.
21일자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선 비변사가 대마도에서 2~3일이면 부산으로 갈 테니 해 볼만은 하지만 이미 늦은 게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고, 그 날 도착한 이원익의 서장에 13일에 200여척을 타고 가토가 도착했다고 했죠. 이에 비변사는 "청정이 이미 바다를 건넜으니~"라는 내용의 건의를 합니다. 수정실록에는 권응수의 장계도 있는데, 이 역시 13일에 건너왔다고 돼 있습니다.
한편 남쪽으로 가 보죠.
난중잡록에 따르면 이 달 6일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나와서 한효순을 만납니다. 이후 한산도로 가다가 풍우를 만나 남해현에 정박하죠. 이 때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소식을 듣습니다. 이미 조정과 이순신은 기요마사가 부산에 도착한 이후에야 소식을 들은 겁니다.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말한 것은 11일, 이것을 김응서가 이순신에게 직접 말하고 듣자마자 바로 출동했어도 이미 늦었었던 거죠.
가토의 도해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칠천량 해전 끝나고 육전으로 넘어가면서 얘기하는 게 나을 듯 하네요. 아무튼 가토, -_-; 좋게 소문난 고니시에 비해 조선에 나쁜 놈으로 제대로 찍힌 듯 합니다.
한편 이순신은 그런 상황에서도 병력을 긁어 모아 출전합니다. 수정실록에서는 1월에 "수군을 뽑아 부산 근처로 가서 적을 차단하고 일대 결전을 하겠다"고 했고, 듣는 자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고 돼 있죠. 이순신은 이미 출전할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3. 다시 부산포로
이 출전에 대해서 원균옹호론자들은 입을 다뭅니다. 이 때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아서 그 죄로 잡혀 갔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기록이 실록 여기저기에 남아 있습니다.
우선 2월 17일 권율의 서장, 근데 이 서장을 내리지 않습니다. 보통 이럴 때는 왕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의논을 하지 않고 그냥 숨겨 둘 때입니다. 뭘 숨기고 싶었을까요? 하지만 사관은 이에 대해서 신나게 적어 놓습니다. 장계의 내용을 숨겼는데 정작 사관은 그것을 자세히 썼다. 뭔가 의미심장하죠? 대충 "부산으로 진격하자 적이 맞섰고 요시라가 몇 번 왕래했으며 고니시가 직접 강변으로 가서 부하들에게 전투를 금지했다..." 이런 거였죠.
20일에는 권율이 정탐인에게 보고 받은 내용을 장계로 올렸는데 "10일 수군 200여 척이 다대포를 건너가 머물렀다"는 거였죠. 그런데 이 내용이 "고니시와 밀약을 해서 가토를 유인해 같이 죽인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_-; 네. 이것은 조선 수군이 출동한 것을 본 육군의 "정찰병"의 보고입니다. 어떻게 배 안에서의 대화나 양국의 장수들끼리 대화한 걸 아는지 모르겠네요. 권율도 "정탐인이 참여하여 들은 것도 아닐 텐데 이러니 보고서가 황당하다. 그래도 일단 보고 받은 거니 아뢴다" 이렇게 말했죠.
제대로 된 보고는 23일에 올라옵니다. 김응서의 보고였는데, 정리하면 이렇죠.
"김응서와 이순신이 63척으로 장문포에서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니 적이 저항하려고 했다. 날이 저무니 절영도(영도)로 후퇴했고, 밤에 요시라가 와서 말을 이래저래 하는데 너무 기니 무시하고 -_-; (대충 다 가토 때문이다. 같이 유인해 죽이자 이런 거였죠) 가토가 있는 서생포로 가기에는 영 상황이 아니라서 가덕도에 정박하자 갑자기 적이 초동 1명을 죽이고 5명을 잡아갔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분기탱천, 가덕도를 공격하다가 날이 저물어서 영등포로 왔는데 14일에 요시라가 급히 와서 일본의 사정을 정하는데 그 내용이 "조선 수군이 이러니 대충 경계를 정해서 나가지 말자"고 했고, 여기서 가토도 반대하다가 나중에 서명했다는 거죠.
+) 여기서 나오는, 일본인들이 파악한 판옥선 한 척의 병력이 격군 150, 사수 100, 화포군 60입니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백오십 수준이었던 걸 생각하면 얼마나 과장해서 알고 있었는지 알 만 하죠.
이 때 가덕도에 주둔했던 장수가 왔는데(다치바나 쪽 가문이라고 하네요) "어제 싸워서 14명이 죽었고 17명이 중상을 당했는데 어쩔"이라고 하니 고니시가 "니가 잘못한 걸 왜 여기 와서 그럼? 얼렁 포로 돌려보내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토가 좀 맛이 가긴 했지만 지금 부산에 있는 일본군이 조선을 약탈해서 그거 금지시키려고 여기 온 거다면서 생포된 수군을 돌려주죠. 결국 공격하지 말라고 빌려고 온 거였죠. -_-;
권율은 여기에 정탐인들의 보고와 다르면서 배 한 척이 실수로 불이 나고 사후선 2척을 뺏겼다는 게 적혀 있지 않다면서 의심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이 이상 알아내기는 힘들 듯 하네요.
결국 부산포로 다시 간 것은 적이 피하면서 끝났고, 가덕도에 정박했다가 피해를 입긴 했지만 공성전을 치를 정도로 당당했으며 (이 부분 잘 기억해두셔야 됩니다. 다음 편에서 비교할 수 있죠) 적이 애걸해서 돌아왔던 것입니다. 겨우 63척밖에 없었고 그나마 전염병 등으로 경험 많은 수군도 부족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적을 무섭게 했다는 거죠. 여전히 조선 수군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후 이순신은 파직당합니다.
4. 이순신 죽이기
22일 경상도 제진 위무사 황신의 서장에 이어 23일에는 김응서의 장계가 도착합니다. 공통되는 내용은 가토 기요마사가 13일에 가덕도에 있었다가 14일에 다대포로 옮겼는데 고니시가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다"고 했다는 거죠. 이 날, 상황이 급변합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산해가 수군을 잘 써야 된다고 하죠. 여기서 뜬금 없이 원균 얘기가 나오지만 (원균이 왜 왜놈들을 무서워하냐고 해서 어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수군 때문에 그런 것을 알았다는 거죠) 별로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선조가 이러죠.
“왜추(倭酋)는 손바닥을 보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으니, 우리 나라야말로 정말 천하에 용렬한 나라이다. 지금 장계를 보니, 행장 역시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고 조롱까지 하였으니, 우리 나라는 행장보다 훨씬 못하다. 한산도(閑山島)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었다.”
위의 일들을 다시 보면 이게 얼마나 어이 없는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적당히 이산해가 장판을 깔자 선조가 본격적으로 운을 띄운 거죠. 이제부터 대신들의 앵무새 놀이가 시작됩니다.
윤두수 - 이순신은 적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귀찮아서 그런 거다
이산해 - 정운과 원균이 없으니까 이제 안 나가는 듯
김응남 - 정운이 이순신한테 협박해서 죽이려고 하자 이순신이 무서워서 나간 거
선조-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베라고 바란 것이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제 도체찰사의 장계를 보니, 시위할 약속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이후 한숨) "우리 나라는 이제 끝났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_-... 뭔가 헷갈릴지 모르니 위를 다시 확인해 주세요. 이후 심유경 등 다른 얘기로 빠지기는 합니다.
저 한 마디로 역사 왜곡은 시작됩니다.
27일,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죠. 거의 전문을 축약해서 올릴 테니... 너무 길다 싶으면 밑에 정리한 걸 보세요~
선조 - 적선 200척 왜케 많음?
(약간의 논의)
윤두수 - 이순신은 임금 말도 안 듣고 싸우기도 싫어해서 한산도에 눌러 박혀 있음. 열 받네요.
정탁 - 이순신은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선조 - 이순신이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는데 다들 구라라고 하더라. 비변사가 밑에 애들 말 안 듣는다는데 걔네들이 적당히 해서 그런 거지. 중국애들이 못 하는 짓이 없이 조정을 속이는데 (오호 -_-;) 우리 애들도 그런 거 배우고 있다. 이순신이 저번에 왜영 불태운 것도 속였다.
"지금 비록 그의 손으로 청정의 손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
류성룡 - 순신이랑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는데 일 잘 한다고 생각했고 커서 대장 되고 싶어했습니다.
선조 - "글을 잘 아는가?"
류성룡 - 강직해서 굽힐 줄 모르는데 공 세워서 정헌까지 좀 오바였나 봐요.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하고 게을러지죠.
선조 - 이순신은 용서 못 한다. 무장이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가. 이원익이 내려갈 때 "평일에는 원균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되고 전시에는 써야 된다"고 하였다.
+) 이원익은 저런 말은 했지만 공이 있으니까 쓰는 것 뿐이라고 했었죠.
김응남 - 수군에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버릴 수 없음요
류성룡 - (원균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상당 산성 쌓을 때 토실을 만들어서 감독했대요.
선조 - 수군의 선봉으로 삼자 / 김응남 - 지당하십니다
이산해- 임진년에 둘이서 서서히 장계하기로 해 놓고 이순신이 "몰래" "혼자서" 해서 원균이 열 받았던 겁니다.
+) 이 때부터 이 떡밥이 시작됩니다.
윤두수 - 이순신을 전라 충청 통제사로, 원균을 경상 통제사로 삼죠?
+) 이걸 보면 윤두수도 이순신을 내칠 생각까진 못 한 듯 하네요.
선조 - 만약 적이 원균에게 직접 오면 어떡해 소공과 이현충의 일 생각 안 남?
+) 중국 송나라 사람들로 이현충이 잘 싸우는데 소공이 시기해서 일을 못 이뤘다고 했죠. ... 선조는 거꾸로 대입하고 있네요 -_-;
김응남 - 어사 보내서 감시하면 되죠 / 선조 - 그렇게 할까?
윤두수, 김응남 - 이순신은 조용한 척 하면서 속임수가 많고 나갈 생각은 안 해요
선조 - (이덕형에게) 원균 일 빨리 처리해라
이덕형 - 원균을 처음 수전에 보낼 때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는데, 지금 수군 장수 보면 이운룡이 안 싸우고 있는데 평시 때면 모가지죠. 원균을 좌도로 보내는 게 낫겠네요.
+) 경상좌수사가 그 때 이운룡이었죠. 이덕형은 은근슬쩍 경상좌수사로 말을 돌린 거죠. 이순신에게 피해 안 주려고 한 걸지도요.
선조 - 좌도로는 보낼 수 없다. +) 해석 : 어디서 말장난이야
김수 - 서성이 잔치 베풀면서 화해시키려고 했는데 원균이 이순신에게 "너한테는 아들 다섯이 있다"(권준, 배흥립 등) 했으니 그가 열 받을 만 하죠.
+)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뺏어서 저 다섯 명에게 줬다는 거죠.
이덕형 - 군사 일은 확실하게 알아놔야 되는데 전라도는 매우 문란해서 병력 보고하라니까 전라도는 아무 말이 없으니 매우 허술합니다.
+) 당시 원균이 전라병사인 거 생각하면 은근히 까는 것 같죠.
에... -_-; 선조는 이순신 욕하고 윤두수, 김응남, 이산해도 욕 하고 정탁, 류성룡도 죄가 있다고 했죠. 윤두수가 선조 떠 보려는 건지 이순신 욕해도 자르기는 뭐 했는지 경상도만 원균에게 주자고 하니까 선조는 옛 송나라 장수들을 말하면서 한 쪽이 시기하면 어떻게 하냐고 합니다.
그런데 선조가 병조 판서 이덕형에게 원균의 일을 조처하라고 하니 좌도로 보내야 되겠다느니 전라도(원균이 전라 병사) 상황이 문란하다느니 하면서 돌려서 까고 있습니다. 그러자 선조가 말을 돌리네요. 이렇게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하지만 다른 기사에 보면 곧바로 얘기가 나오네요. 똑같은 걸 다른 사관이 쓴 건지 -_-; 에 이건 실록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 모르겠네요. (아시는 분 답변해 주세요.)
여기서는 윤두수가 이순신을 갈아야 한다고 하고 (위에서 수군 작전권을 둘로 나누자고 한 걸 생각하면 이제 확실히 선조의 의중을 알았다는 거겠죠) 정탁은 죄는 있지만 갈 순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선조는 "이순신은 머리가 모자라다"는 식의 말을 하고 하늘이 준 기회를 버렸다고 하죠. 요시라가 하늘이었나 봐요. 여기서 선조는 자기가 띄워 준 (패배와는 다르다) 녹둔도를 언급하며 이순신이 사람을 가지고 논다고 했습니다. 이정형이 이순신을 최대한 옹호하며 원균이 포악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선조가 반문하죠. 그처럼 포악한가?) 경상도가 망한 것은 모두 원균 때문이라고 합니다.
선조는 이를 무시하면서 원균을 쓰겠다고 하죠. 여기서 류성룡이 상당 산성 얘기를 꺼내는데 이산해가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고 이정형이 "비에 무너졌다"고 합니다.
길고 긴 얘기 끝에 갈지는 않고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삼습니다.
이 때 부산 왜영 방화 사건에 대해 말이 나오는데 선조는 "이순신이 안위의 공을 뺏었다"고 합니다. -_-; 다시 위로 올려 보면, 이순신의 장계는 안위가 공을 세웠으니 안위에게 상을 달라는 거였죠. 하아... 28일 선조는 이어서 원균에게 경상도 통제사직을 내립니다.
그리고 2월 4일, 사헌부는 이순신을 잡아 와서 율에 따라 죄를 주자고 하죠. 선조는 이에 대해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 합니다. 네. 천천히요.
6일 선조는 선전관을 보내 이순신을 잡아 오고, 원균과 교대하게 하라고 명 합니다. 이 때 "전투 중이면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 오라"고 한 걸로 봐서 선조 역시 이순신이 출동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5.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
여기서 끊겠습니다. 시작부터 계획대로 안 되네요. ㅠ
정리를 해 보죠.
예상 외로 부산 왜영 방화 사건은 이순신에게 치명적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안위가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게 큰데요. 안위는 "정여립"의 친척입니다. 역적의 친척에 이런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야 할 텐데, 안위는 계속 거제 현령으로 남고 명량해전 후에는 전라우수사의 자리까지 오르죠.
윤두수, 김응남, 이산해 등도 가담하긴 했지만 이순신 죽이기의 중심은 선조였습니다. 때문에 류성룡 등도 결국 반대를 못 한 거죠. 여기서 선조는 녹둔도의 일과 부산 왜영 방화 사건까지 모두 싸 잡아서 비난합니다.
이렇게 원균은 그렇게 고대하던 수군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나라의 운명은 이렇게 한순간에 바뀌어 버리죠.
원균의 뒷공작은 상당히 치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친척인 윤두수, 윤근수와 서인들은 물론 북인 이산해도 가담했고 이덕형도 원균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오해했다고 나중에 밝힌 바 있죠. 정말 깡패도 삥 뜯는 능력은 있다는 걸까요.
1월 21일 원균의 장계가 올라옵니다. "가덕도에 주둔해서 절영도 앞으로 나가 무위를 떨치면 청정은 겁 먹고 도망갈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죠. 이것이 선조의 의중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나 그 이후 얘기가 나오는 게 23일이었다는 것을 보면 원균이 정말 절묘한 시기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그럼... 다음 편은 [칠천량, 한산의 무너짐]입니다. 좀 많은 것을 뒤로 미뤘으니 사이에 하나 더 쓸 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써 봐야겠네요. 그럼, 다들 M을 느껴봅시다. 열 받다 못 해서 나중에는 웃게 되는 희열을 드리겠습니다.
난중잡록에 나온 내용을 올리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고, 전라 병사 원균(元均)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이 한산도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요적(要賊)이 전후에 행한 바가 모두 우리를 속이는 일인데도 우리 나라는 알지 못하였으니 통탄할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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