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0/09/19 20:45:19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오 마이 팬티
학원가에서 수시 파이널 시즌이 시작했다는 말은, 정규반이 끝났다는 말을 뜻하며, 뜻하지 않게 단기간의 무급주말휴가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뜻해야 하나, 지도교수가 대체 알 수 없는 작업을 지시했고, 외부에서 하던 일들이 마구 쏟아져나왔으며, 몸까지 안좋은 이 상황에서 무급주말휴가따위는 무의미하다.

하루종일 집에서 이상한 문서들을 작업했다. 내용은 대외비. 시간은 그렇게 저녁. 하루종일 먹은 거라곤 점심때 먹은 편의점 추석특집 도시락(무려 우유가 사은품)밖에 없다. 하지만 살은 왜 안빠질까. 이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급 후줄근해졌다. 일 끝나고 카오스나 한판 하기로 한 자취방 친구녀석들은 데이트다 나이트다 나가버리고. 에라. 샤워나 하자.

많은 자취생들의 좋지 않은 습관 중 하나는, 빨래를 제때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서울 소재 자취생들의 32%는 더 이상 입을 옷이 없을 때까지 빨래를 하지 않고 버틴 기억이 한 번 이상 있다. 나도 그렇다. 덕분에 입을 옷이 없다. 샤워나 하는 김에 옷이나 빨기로 결정한다. 푸슈수. 인근 시세에 비해 턱없이 싼, 그리고 턱없이 시설이 안좋은 다락방의 세탁기가 10분만에 죽어버린다. 짜증을 내며 콘센트를 윗칸에 꽂는다. 아래칸에 비해 사망 확률이 상당히 낮아진다는 건, 이 다락방의 도시전설이다. 허나 오늘은 윗칸에 꽂아도 죽어버린다. 아오. 일단 샤워부터 하자. 하고 샤워를 한다. 그러다 급 짜증이 나서 다시 세탁기를 돌린다. 세 번째 세탁기를 돌리다가, 생각해보니 세탁바구니 말고도 방 구석에 던져두었던 셔츠 몇 벌이 떠오른다.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린 채로 방에 들어가 셔츠 몇 별과 등등을 들고 와, 세탁기를 열고 집어넣는다.

그렇게 담배 한대를 피우는 동안, 세탁기는 더 이상 꺼지지 않았다. 이번엔 확실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샤워를 대강 마무리하고 나온다. 어, 그런데 타월이 없네. 아놔 아까 옷가지 집어넣을 때 짜증나서 막 집어넣었구나. 대충 옆방 사는 친구놈의 타월을 빌려 물기를 닦는다. 날이 건조하니, 잠시 서있는 것만으로 몸이 마른다. 자이제 하던일을 계속해야지. 아니 배가 고프니 밥부터 먹고 와야겠는데 한벌 남은 내 옷가지가 어디에 있을까. 내 팬티. 아오.

흘러간 나의 사랑처럼 그것은 축축하고 깊고 어두운 세탁기 속에서 흐늘거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온갖 욕을 다하다가, 잠옷 대용으로 입던, 하와이얀 셔츠에만 어울릴 수 있는 화사한 비치웨어 반바지 한 벌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본받아 오늘은 팬티를 입지 않기로 한다, 하고 자못 진지하게 중얼거리다가 짜증이 더 났다. 노팬티든 말든 티셔츠도 전부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예비군복과 정장셔츠와 춘추잠바 몇 벌만이 뎅그러니 내 옷걸이에 걸려 있다. 저중 뭘 입어도, 화사한 반바지와 어울릴 수는 없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다. 대충 입고 재빨리 나가서 컵라면 사와야지.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abrasax_:JW
10/09/19 20:51
수정 아이콘
잘 읽히고, 재밌습니다.
헥스밤님의 글은 늘 그래요. 잘 읽고 있어요!
문앞의늑대
10/09/19 21:27
수정 아이콘
크크 역시나 실망 시키지 않는 글이네요.
특히 그 미묘하고 잘 읽히게 하는 라임은 참 부럽습니다.
헥스밤
10/09/19 21:41
수정 아이콘
에고..졸문을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독자님들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10/09/19 23:07
수정 아이콘
다듀 제대해서 이 글로 곡하나 만들면 쫄깃하게 뽑아줄 것같은 이 느낌. 글 잘봤습니다.
TheWeaVer
10/09/19 23:50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Darwin4078
10/09/20 00:33
수정 아이콘
집에 있을땐 다 팬티 안입고 있지 않나요? -_-;

전 퇴근하고 들어오면 맨먼저 하는게 샤워하고 노팬티로 츄리닝 갈아입는 건데..
뱃살토스
10/09/20 00:29
수정 아이콘
재미있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5236 [일반] 역사, 민족주의, 신화 [18] swordfish4859 10/09/20 4859 0
25235 [일반] 나의 인생을 바꿔버린(?) 게임..문명3.... [23] 리얼리스트가5627 10/09/20 5627 0
25234 [일반] 양신 은퇴식에 다녀왔습니다! [13] 참치는동원4236 10/09/19 4236 0
25233 [일반] 내가 알고있는 우울한 노래들 [5] 뜨거운눈물4257 10/09/19 4257 0
25232 [일반] [음악] 비오는 날 Ben에게 이야기를 듣다. [7] 코리아범3534 10/09/19 3534 0
25231 [일반] 식민사학의 잔재 [91] 아유6783 10/09/19 6783 0
25230 [일반] 2010 마구마구 프로야구 9/19(일) 리뷰 & 9/20(월) 프리뷰 [23] lotte_giants3877 10/09/19 3877 0
25229 [일반] 운수 좋은 날 [6] Schizo3856 10/09/19 3856 0
25228 [일반] 양신, 눈물의 은퇴식.. [15] Roman_Plto5791 10/09/19 5791 0
25227 [일반] [EPL] 맨유 VS 리버풀 박지성 결장!!! [109] 이종범6106 10/09/19 6106 0
25226 [일반] 오 마이 팬티 [8] 헥스밤5890 10/09/19 5890 0
25225 [일반] 남자의자격 하모니편 거제전국합창대회 한사랑 실버 합창단 영상 [13] 대청마루8721 10/09/19 8721 0
25224 [일반] 한국계 힙합그룹 Far East Movement 빌보드 핫싱글 차트 16위 진입 [3] Heavy_Gear4631 10/09/19 4631 0
25223 [일반] 모임에서 사전 언급 없이 돈을 모두 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84] 기차를 타고7376 10/09/19 7376 0
25222 [일반] 프로야구 중계 불판 올립니다. [232] EZrock6410 10/09/19 6410 0
25221 [일반] 고백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39] 단맛8665 10/09/19 8665 0
25220 [일반] 토익 첫경험[!!!???] 후기 [31] EZrock6238 10/09/19 6238 0
25219 [일반] YANG의 이것저것 - 9월 19일 : 추석에 피자 하나 안드시렵니까~ [12] Yang5159 10/09/19 5159 0
25218 [일반]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에 대해 [46] 레몬커피4000 10/09/19 4000 0
25217 [일반] 과연 직장에서 자신의 성과를 얼마만큼 표현해야 하는가? [13] 선토린4013 10/09/19 4013 0
25215 [일반] 역사에 대한 잡상 (3) 최고의 무기, 일본 [22] 눈시BB10384 10/09/19 10384 1
25214 [일반] 관심이 필요했던 여성 [3] 스치파이5400 10/09/19 5400 0
25213 [일반] '7성급 요리사' 에드워드 권의 고백 [42] 야광충10372 10/09/19 1037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