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성경이야기.
오늘은 야곱 인생의 8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주제로 적는 “소설”입니다.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말이 안 될수도 있지만 너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성경 세계관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에 동감을 하는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세겜 땅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주도자 둘째 시므온 + 셋째 레위) 일으킨 참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결국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야곱 자신의 생각으로 세상과 타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란을 떠날 때
1. 괜히 라반을 악역으로 만들어 라반의 재산 탈취를 정당화했으며
2. 때문에 가나안에 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기보다는 라반으로부터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세상적인 이유가 되었으며
3. 결과적으로 라헬이 라반에 대한 실망으로 우상 드라빔을 훔쳤고
(가나안땅은 임시로 가는것이고 언젠가 하란에 돌아올 것을 상징합니다)
4. 가나안 땅에 와서도 자기가 앞서 고백한대로 벧엘로 가지 않고
(벧엘 갔다가는 그 후에 헤브론이나 브엘세바로 가야하는데 가족들이 특히 라헬이 그건 싫어하니깐)
가족들과 가축 재산을 지킬 목적으로 풍요로운 세겜으로 갔습니다.
결국 아들들은 대형 사고를 터트렸고, 야곱은 이제 겨우 정착한 세겜을 떠나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그리고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드디어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참고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세겜에서 정착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도 야곱에게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하니님 :
[이제 깨달을 때 되었지 않았냐? 너는 니가 나랑 처음에 약속했던 그곳 - 벧엘로 돌아가서 나한테 예배해라]
이 한마디는 야곱의 마음을 제대로 찌릅니다.
그동안 자신의 세상적인 방법대로 살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으니
야곱은 이제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할 생각으로 세겜을 떠나 벧엘로 향합니다.
단순 몸만 벧엘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명령하여 모든 금은보화 재물과 특히 우상 신들을 버리고 정결한 마음으로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당연히 드라빔도 포함되겠죠?)
야곱의 가족들도 이런 야곱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들의 모든 재물과 우상을 세겜 땅에 파묻고는 약속의 장소 벧엘로 향합니다.
벧엘에 도착한 야곱은 드디어 하나님께 자기가 에서를 피했을 때 약속했던 대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받아주시고 앞전 하란을 떠날 때 벧엘에서 야곱에게 했던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 약속이란 바로 믿음의 조상들이 이어받은 그 축복입니다.
[너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너를 많은 후손들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
그것에 +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게 “너를 앞으로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 이라고 부르겠다”
야곱이 이스라엘 이름을 받은 건 세겜에 도착하기 전 에서와의 사건 때입니다.
하지만 이름을 받았다고 끝난건 아닙니다.
그 이름에 맞게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고 야곱이 세겜으로 갔을 때 성경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벧엘로 돌아왔을 때 성경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최종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야 성경은 야곱이 무사히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고 인정 합니다.]
여기까지 야곱의 신앙이 성장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얄팍한 간교만을 의지하는 부족한 신앙인이었지만
이날 이후 야곱은 더 이상 속임수를 쓰지 않는 진정한 믿음의 조상다운 행동을 보입니다. (드디어 성장했구나 ..)
하지만 아직 야곱이 마지막으로 극복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의 정] 혹은
[육신의 사랑] 이었습니다.
벧엘에서 예배를 마친 야곱은 이제 벧엘을 떠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땅이자 진정한 약속의 땅의 중심인 헤브론으로 가서 정착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라헬은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해 언니 레아를 질투하며 야곱을 괴롭혔던 라헬.
결국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요셉을 낳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나에게 또 아들을 주삼!!!” 라고 말하며 땡깡 부리던 라헬.
라헬은 야곱이 에서와 헤어질 때 야곱이 벧엘을 선택 안하고 세겜으로 가서 기뻐했을 겁니다.
(라헬이 그 촌동네로 왜 가고 싶어했겠습니까? 도시로 가고 싶어했겠지.)
그 살기 좋은 세겜에서 라헬은 드디어 꿈이 그리던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합니다.
라헬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제 원수 라반도 없고, 이제 둘째도 낳고 남편과 행복하게 살다가 나중에 라반 죽으면 하란으로 돌아가면 딱 좋겠네”
그런데 세겜 참사가 터집니다.
라헬은 만삭의 몸으로 극히 안정을 취해야 하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피난을 떠납니다.
단순 피난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드라빔을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즉 앞으로 하란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단호한 태도입니다.)
지금까지 예쁜 아내에게 쩔쩔대며 휘둘리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드라빔을 버린다는 건 라헬이 지금까지 꿈꾸던 행복한 미래 계획이 무참히 깨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드라빔도 버리고 벧엘에서 예배도 드렸으면 라헬이 출산하기 까지 기다릴 법도 한데
야곱은 냉정하게 바로 헤브론으로 떠나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데 시간을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였습니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는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다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만삭 라헬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까요?
결국 출산의 시간이 다가온 라헬은 헤브론에 들어가기 전 중간 베들레헴에서 둘째 아이를 출산합니다.
하지만 극한 스트레스와 힘든 여정으로 인해 라헬의 몸이 약해진 탓이었을까요?
라헬은 쉽게 출산하지 못하고 몸의 기력의 점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아이를 낳을 때 쯤에 산파가 라헬에게 기뻐하며 말합니다.
“라헬아! 드디어 니가 그렇게 원하던 아들이 나왔다. 조금만 더 정신을 차려보렴~~”
하지만 라헬은 더 이상 힘이 없었습니다.
라헬은 마지막으로 둘째 아들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나의 아들... 내 인생이 이렇게도 슬프구나.
고생 끝에 원하던 아들을 또 얻었는데 내가 이렇게 죽게 되다니...
이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 라고 지어주세요”
베노니 - 이름의 뜻은 “슬픔의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의 유언은 곧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로 지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라헬은 이렇게 한 많은 인생을 베들레헴에서 마감하고 베들레헴에서 장사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제 냉정했습니다.
그는 라헬이 죽으면서 낳은 아들을 베노니라고 하지 않고
[베냐민]으로 고칩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축복과 권능을 의미함으로 사실상 베냐민 - “축복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냉정한 영적인 입장에서는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탄생은 기뻐할 일입니다.
라헬은 야곱 믿음 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야곱의 모든 문제들은 거의 대부분 라헬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저는 라헬이 얼굴 예쁜 사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라헬이 약속의 땅 헤브론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영적인 새 출발을 해야 하는데 옳지 못한 옛 것은 가져갈 수 없는 것이죠.
즉 야곱은 라헬이 죽었다는 것 보다는 새 출발을 하기에 앞서 아들을 선물 받는 것에 더 집중합니다.
그래서 라헬의 죽음을 애도하기 보다는 아이의 태어남을 축복하며 그 이름을 베냐민 이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라헬이 죽은 것은 창세기 35장 19절에 나오는데,
사실 야곱은 같은 창세기 35장 8절에서 자기 엄마 리브가의 유모 - “드보라” 라는 사람이 죽자 매우 슬퍼하며 장사 지냅니다.
그 엄마의 유모를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는데 그 나무 이름을 “곡하는 나무”라고 지으며 애도를 표하지요.
근데 정작 야곱은 라헬이 죽을 때는 냉정하게 전혀 애도 따윈 하지 않고
베냐민의 탄생만 기뻐하며 헤브론으로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작 엄마의 유모가 죽을 때 애도한 것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장면입니다.
냉정해도 너무 냉정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단호한 결의라고 표현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단호했죠.
정말 야곱이 이제 인간적인 면을 벗어던지고 영적인 사람으로 태어난 것일까요?
하지만 사람의 정은 그렇게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야곱의 인생을 이미 보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오직 라헬을 위해 20년간 노예처럼 일했습니다.
라헬이 온갖 투정을 해도 약간 화는 냈지만 그래도 그 투정을 받아주며
라헬의 뜻대로 레아와 아예 관계도 하지 않고, 라헬의 여종하고 관계를 맺어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야곱이 목숨을 걸고 자녀들보다
[앞서] 에서를 만날 때 자녀들을 배치한 것을 보면 라헬에 대한 애정이 보입니다.
배치 순서가
라헬 & 요셉 --- 레아 & 아들들 ---- 두 여종 & 아들들 ----- 야곱 & 에서입니다.
야곱이 덜 중요하게 여기는 순서대로 에서와 가깝게 배치한 것입니다.
혹시 야곱이 잘못되어 죽더라도 가급적 사랑하는 라헬과 그의 자녀 요셉만은 에서로부터 도망가길 원하는 야곱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순간에 그 정을 떨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솔직히 라헬의 죽음은 야곱 때문입니다.
야곱이 라반이 드라빔을 찾을 때 “여기서 드라빔 훔친 사람 있으면 반드시 죽을 것임”
이라는 말만 안했어도 라헬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즉 야곱은 라헬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성경에는 그것을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라고 표현합니다.
야곱은 자신은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냉정하게 악한 라헬은 잊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내 - 레아와 자녀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다고 애써 마인드 컨트롤을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도 모르는 그의 실제 마음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도 라헬의 죽음을 슬퍼했고 라헬이 죽은 지 30년이 넘어가도록 한번도 라헬을 잊지 못하고 계속 그리워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라헬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지 않았죠. - 믿음의 사람은 그래서는 안되니까...
대신 그 그리움은 엉뚱하게 라헬이 남긴 두 아들 - 요셉과 베냐민에게 표현됩니다.
그 중에서도 예쁜 라헬을 꼭 닮은 외모를 가진 요셉에게 집중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야곱의 집안에 또 다른 비극을 가져옵니다.
다음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