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모 학교에서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월급루팡을 하던 중 우연히 이 글을 보았다.
https://pgr21.co.kr/humor/363922?page=3
이 글을 보자마자 미친듯이 웃었다. 아니 아무리 모태솔로라고 해도 누가 이렇게 말을 해 크크크크크크크. 하하. 하... 하? 웃다보니 어느덧 내 손은 텀블러를 찾았고 살짝살짝 떨리고 있었다. 누가 누굴 비웃는단 말인가. 27년산 모솔이 선배님의 행적을 보고 비웃다니. 강호의 서열이 무너졌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들었고 그래서 더더욱 손이 떨렸다. 마시던 물을 조금 흘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분명 내가 저 자리에 있었어도 똑같은 행동을 했겠지.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우울해졌다. 모솔 주제에 짝사랑을 하고 있는 처지라 더더욱 기분이 안 좋아졌다. 모태솔로에게, 아니 이런식으로 일반화하지 말자. 그냥 나에게 있어서 '짝사랑'이라는 것은 하기 싫은 숙제같은 것이다. 그런 감정은 2년에서 3년 주기로 오는 병치레 같은 것이어서 이겨내야 하지만 언제나 이겨내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내 몸과 마음을 망쳐놓는 존재다. 하기 싫어도 해야하지만 절대로 잘 해낼 수 없는 존재라서 더 짜증이 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기분이 쳐진다. 그렇지만 행복하다. 그 사람이 지었던 미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과 나눴던 카톡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실제로 내개 건냈던 말들을 되내이는 것으로도 나는 행복을 찾는다.
"요원님... 요원님?"
"아, 네."
"이거 옮겨야 하는데 도와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들은 내가 연애를 안 한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하고 있지만 여자친구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 선생님도 있었고 여자친구가 진짜 없지만 언제는 사귈 수 있으면서 안 사귄다고 믿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간혹 내가 진짜 연애에 소질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선생님 몇 분만이 걱정하는 마음에 연애조언을 이따금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회에 나와서 만난 사람들도 대부분 이렇게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자친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고 설령 없더라도 여자친구를 금방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쨋든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일을 도와주고, 조금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자마자 그 사람이 생각났다. 그렇게 또 혼자 미친 사람처럼 웃고 우울해 하기를 반복하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내가 생일날 받았던 영화표.'
문득 생일날 받았던 영화표가 떠올랐다. 게다가 SKT에 매년 성실하게 말랑카우처럼 바쳤던 통신비 덕분에 맴버쉽 프리미엄으로 여유분의 공짜 영화표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평소에 신중하고 안전하게를 모토로 삼는 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나는 카톡을 보낸 뒤였다.
"누나. 저 공짜 영화표 생겼는데. 영화 볼래요?"
"오!!! 공짜 영화표? 굿굿! 보자보자."
한 2분인가 지나자마자 답장이 왔다. 수업끝난 오후시간이라 답장이 빠른가보구나.
"그러면 우선 누나가 편한 요일과 시간을 말해줘요."
"이번주 목요일에 보드게임하려고 너랑 나랑 만나잖아? 금요일이나 다음주 평일에 어때? 근데 금요일에는 딱 영화만 볼 시간밖에 안 나서 다음주 화요일이나 수요일 어때?"
"네 저는 화요일이나 수요일 둘 다 좋아요."
"아 생각하니까 수요일도 동학년 회식있다. ㅠㅠ 그럼 화요일~~~~"
"장소는 역 근처 XX시네마 어때요? 누나 직장이랑 멀어요?"
"아니, 직장에서 걸어갈 수 있어."
"그럼 거기서 봐요. 몇 시에 어떤 영화를 볼지는 이번주 주말이나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이야기 할까요?"
"그래그래!!!! 재밌겠다. 고마워!!!"
"네 그럼 목요일에 봐요."
나답지 않은 추진력이었다. 그것까진 좋았는데 얼떨결에 영화약속을 잡았다. 그러자 머리가 하얘졌다. 약속을 잡은 것은 좋았는데 그 약속에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감이 안 왔다. 그러다 누나가 어떤 영화를 고르자 내가 거절하면서 그 영화 보세요? 라는 망언을 하는 망상까지 해버렸다. 결국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 연애를 애타게 바라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연락을 하자 이 친구들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듯한 기쁨으로 맞아주었다.
"그래도 짝녀한테 형이 인간 이하는 아닌가보네. 아무리 영화보는게 부담이 덜 한 약속이라도 아무나하고 덜컥 약속을 잡지는 않을거야."
"근데 너랑 그 여자 그래서 그렇게 대화가 끝난거야?"
"그럼 뭐 어떤 말이 더 필요한데?"
"그래서 너는 설마 영화를 뭐 볼지, 저녁을 뭐 먹을지, 심지어 어떤 시간에 영화를 볼지도 전부 그 여자한테 떠맡길거냐고."
"최소한 영화를 뭐 볼지 정도는 고르게 하려고 하는데, 나는 그 누나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까."
"하... 너가 뭘 몰라. 그래서 너가 열심히 1안, 2안, 3안을 만들어가서 확인 받는거랑. 아 모르겠는데 알아서 하시면 안됩니까? 딱 봐도 뭐가 낫겠냐?"
"전자가 낫겠네. 그리고 저녁 먹을지도 정해야지."
"뭐라는 거야 이 바보가! 당연히 저녁을 먹겠지 같이."
항상 나의 상담사를 자처하지만 현실은 선생님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나한테 푸는 것이 아닌가 싶은 두 친구들이 자기 할 말들을 뒤이어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 봐봐. 설령 그 여자분이 진짜 공짜영화표가 좋아서 그냥 영화만 보러 온거라고 치자고. 형한테 호감이 없는 상태로. 그래도 저녁은 같이 먹을거야. 그게 예의라니까?"
"그게 왜 예의야. 그냥 나는 영화보자고 했고. 그래서 영화봤는데 그 누나가 나랑 같이 저녁을 먹어줘야 하는 이유는 뭔데?"
"그래 예의없는 너는 그럴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게 매너라고. 영화보자고 해서 진짜 딸랑 영화만 보겠냐?"
급기야 마치 내가 자기 반 학생인 것 처럼 장장 20분동안 둘은 끈질기게 예의범절 교육을 실시했다. 나한테 원래 매너가 없었다는 둥 그래서 모솔이라는 둥 심지어 전인교육이 필요하다는 둥. 참... 나도 사회복무 끝나면 선생님이야. 그건 알고 있는 건가?
"알았어. 알았어. 내가 예의가 없는거로 하고 그러면 저녁을 웬만하면 먹겠지. 그 메뉴 정도는 내가 눈치껏 정하는게 좋을거고."
"그 '웬만하면' 표현만 빼면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듣는 것 같네."
"그리고 저녁을 먹으면 형이 몰래 저녁값을 계산해."
"그건 싫어. 그러면 그 누나는 분명 싫어할 거야. 화를 내던가."
"그러니까 몰래 하라고. 너 눈치에 머리면 그 정도는 하잖아?"
"아니 어쨋든 나중에 내가 계산한 걸 알잖아. 그러면 기분나빠 한다니까?"
"그러고 다음에 누나가 밥 사주세요 라고 하라고 이 답답한 형아!!!!"
그러고선 두 사람은 또 약 20분의 시간동안 나의 연애에 대한 무지함과, 연애에 무관심했던 과거를 상기시켜주었다. 제발 모르면 주입식 교육을 받으라는 어드바이스까지 받았다. 그냥 되었으니 무조건 다음 약속을 잡을 여지를 만들라고 했고. 상대가 싫어하는 것 보다 결국 이어지는게 더 급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고 퇴근을 하자마자 나를 가장 따르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형 여자랑 영화보는 약속 잡혔다며? 희재형이랑 지훈이가 너무 답답해 하던데 크크크크크크"
"벌써 너도 알았냐?"
"그럼그럼. 뭐 틀린 말이 없긴 한데. 옷만 잘 입고가. 어짜피 형 외모가 뭐 크게 딸리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딸리더라도 동호회에서 많이 봤잖아? 그러면 평소 외모는 필요없어. 그냥 살짝 임팩트만 주면 될 것 같아. 이 사람 오늘은 좀 신경쓰고 나왔네 정도?"
"그래 사실 너가 옷을 잘 입으니까 옷은 좀 물어보려고 했다. 필요하면 어짜피 교직 생활 하면서 입을 옷 산다치고 살까도 생각중이야."
"그리고 형이 하고싶은대로 해."
저 톡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날뻔했다. 사실 불안함에 여기저기 조언을 들었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타박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연애를 모르냐고. 여자한테 관심을 좀 두지 그랬냐는 말 투성이였다. 사실 억울했다. 그저 나는 여자한테 어떻게 다가갈지를 몰랐을 뿐이다. 여자한테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 상처받지 않을까 생각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살았다. 내가 나온 대학은 여학우들이 너무나 많이 다니는 대학이었고 거기서 다가가면 여자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살았다. 그게 내 잘못은 아닌데 왜 나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얻는 방법을 물어볼 때 마다 왜 내 모자람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야하는지 모르겠고 서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진짜로 눈물이 났다. 창피하게도 학교 교문을 나오다가 눈물을 훔쳤다.
"어짜피 이런 저런 조언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실제 상황에서 변수가 너무 많아. 그리고 형이면 그렇게 분위기 망칠 말도 안 할거야. 설령 정답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 없잖아? 조금 돌아간다고 생각해. 어쨋든 그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이어지면 되는거잖아?"
"고마워. 나중에 옷 뭐 입을지 물어볼게. 너가 사줬던 신발도 꼭 신을게."
"그리고 몰래는 아니더라도 저녁은 계산해봐. 아마 그 여자분이 후식으로 카페가서 차를 사줄거야."
"알았어. 정말 고마워. 근데 카페 가는건 어떻게 알아?"
"내 감이라고 할까? 이번엔 진짜 같은데? 형수님 얼굴 볼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내 아는 사람의 이야기가 끝났다. 아니 아는 사람 이야기 아니고 소설임 이거 사실 다 가상인물임... 아냐아냐 아는 사람 이야기야... 아무튼 아는 사람 이야기임. 근데 이 사람한테 물어볼게요. 그래서 영화 본 뒤에 어떻게 되었냐고. 혹시 알아요? 여기서 글이 더 이어질 수도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