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9/09 04:09:09
Name 스타슈터
Subject [일반] [10]또 다른 가족 (수정됨)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지낸 나에게 추석이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싱가폴이라는 중화권 나라에서 지내다보니 추석 (중화권에서는 중추절이라고 부른다)을 지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귀성길이 남달리 멀었던 관계로 실제로 고향집에 가서 친적들과 모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히 대학생활을 할때 부터는 기숙사에서 자취를 시작했는데, 알바를 병행하며 간간히 마련한 생활비와 학비로도 벅찬 나에게 비행기표는 사치였기 때문에 추석은 늘 조용하게 혼자서 보내는 날이 되곤 했다.

그래서 난 추석(명절)만 되면 홀로 남겨질 위기를 맞곤 했다. 당나라 왕유(王維)라는 시인이 이런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한 시가 있는데, 그 글귀중 일부를 인용하자면 이렇다:

獨在異鄕爲異客(독재이향위이객)  나 홀로 타지에서 객으로 지내니
每逢佳節倍思親(매봉가절배사친)  매번 명절이 찾아오면 가족들이 배로 그립구나

명절이 오면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찾아 뿔뿔히 흩어진다. 그 와중에 타지에 남은 사람들은 가족을 보지 못해서 그립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도 전부 각자의 고향 집을 찾아 떠나기에 그 공백이 생겨 두 배로 그리운 것이 아닌가 싶다. 길거리로 나가면 왠지 모르게 고요해진 거리는 한복판에 누워서 뒹굴어도 될 만큼 한적해져 있다. 마치 나 빼고는 다 갈 곳이 있는 것 같아서 조금은 쓸쓸해진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귀향길을 오르지 못한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추석을 보내곤 했다. 그 모임이 끝나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격려는 "내년은 이 날엔 보지 말자" 였다. 금의 환향까지는 아니더라도, 집에 가고 싶을 때 집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도, 나도, 집에 가있어야 마땅한 사람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난 추석에 대한 좋은 기억이 더 많다. 가족과 보내는 추석이 가장 좋겠지만, 그런 아쉬움이 들지 않도록 늘 누군가는 나와 추석을 함께 보냈던 것 같다. 밥 한끼 먹으라고 집에 초대해주신 아주머니부터 같이 밤새 문명 멀티플레이 (...) 하자던 친구들까지, 혼자 타지에서 지내는 것이 조금은 덜 서럽도록 적재적소에 온기를 제공해줬던 것 같다. 송편이며 월병(Moon Cake, 중국 추석 음식)이며 한상자씩 챙겨주셔서 내 자취방에 추석 먹거리가 부족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遠水不救近火(원수불구근화)  멀리 있는 물은 가까이서 난 불을 끄지 못하고
遠親不如近隣(원친불여근린)  먼 곳에 있는 친척은 가까이 있는 이웃만 하지 못하다

피를 나눈 가족들만이 아니라, 내 옆에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가족같은 존재가 아닐까? 돌아보면 기나긴 타지 생활중에 가족처럼 챙겨주시던 분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들 또한 가까이 있는 이웃을 가족처럼 여겼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추석이 되면 그 시절의 추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걸 참 많이 느끼는 요즘, 추석을 통해 다시 한번 내 인생에 고마웠던 사람들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싶다.

부디 각자의 집에서, 같은 달을 올려다 보며, 그 시절을 회상할 만큼의 여유를 찾았기를 바라며.

zdt3hNs.jpg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09/09 04:39
수정 아이콘
저도 유학 중후반 가장 힘든 시절에 서로 위로하면서 지냈던 친구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힘든 시절을 같이 보내면 기억에 남기 마련이죠. 모두들 잘 풀려서 말씀하신대로 여유있게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스타슈터
19/09/09 10:56
수정 아이콘
외국에서 오래 지내보면 진짜 친구들이 귀해지더라고요.. 흐흐;
펠릭스30세(무직)
19/09/09 05:5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근데 한국사회에서 추석이 언제나 산케한 명절은 아닌지라 저는 오히려 그런식의 추석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스타슈터
19/09/09 10:59
수정 아이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역으로 덕분에 저는 명절 스트레스를 덜 겪었던 것 같긴 합니다. 흐흐
19/09/09 09:2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19/09/09 10:15
수정 아이콘
한국에서 명절은 가족이 모인다는 정서적 공감대가 기본이긴 하지만 점점더 희미해져가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정서적 공감대가 있는 분들이 같이 모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스타슈터
19/09/09 11:02
수정 아이콘
사실 누구랑 모이느냐도 중요하지만 좋은 시간을 보내는게 더 핵심이죠!
콰트로치즈와퍼
19/09/09 10:29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이번 추석 잘 보내시길.
19/09/09 11:19
수정 아이콘
메리 추석입니다
치열하게
19/09/09 12:21
수정 아이콘
항상 명절은 가족들끼리 시끌벅적해서 타향살이도 안해봐서 그 쓸쓸한 마음은 어떨지 상상이 안가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2663 [일반] (추가) 약간 각색된 어느 회사 이야기 [20] 고구마장수9608 19/09/09 9608 15
82661 [일반] 과연 pgr은 바뀌었는가? [60] mylea10042 19/09/09 10042 16
82659 [정치] 정권 변화로 인한 세상사는 이야기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되나? [28] 이쥴레이9113 19/09/09 9113 13
82658 [일반] 농구월드컵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며 써보는 짧은 이야기 [29] 류지나6440 19/09/09 6440 6
82657 [정치] 민주당 열혈지지자분들께 한마디 [181] nada8216649 19/09/09 16649 180
82542 [일반] [공지] 관련글 댓글화 관련 의견 수렴 결과 및 이후 운영 관련 공지 [21] 오호8445 19/08/27 8445 11
82656 [정치] 검찰 개혁에 관한 시리즈 기사(통제받지 않는 권력과 그늘) [76] ArcanumToss10809 19/09/09 10809 5
82655 [정치] 대통령 말씀에 마지막 희망조차 놓아버리게 되네요. [159] Alan_Baxter16009 19/09/09 16009 71
82653 [일반] 올해는 여름 추석이라고 하네요 [13] 프란넬7566 19/09/09 7566 1
82651 [정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306] The Special One19091 19/09/09 19091 0
82650 [정치] 우리들의 트럼프 남매는 어디 있는가? [16] minyuhee8384 19/09/09 8384 1
82648 [정치] [2보] 文대통령, 조국 법무장관 임명 강행…지명 한 달만에 [677] sakura30568 19/09/09 30568 15
82647 [정치] 대법원, '비서 성폭력' 안희정 징역3년6개월 확정 [263] 괄하이드19101 19/09/09 19101 10
82645 [일반] [10]또 다른 가족 [10] 스타슈터5483 19/09/09 5483 12
82644 [정치] 검찰, 반출됐던 정경심의 동양대 PC에서 각각 다른 '총장 표창장' 파일 3~4개 발견 [191] 고기덕후20338 19/09/09 20338 26
82643 [일반] 예전 커뮤니티에서 논란이었던 문제 [75] 미소속의슬픔11667 19/09/09 11667 0
82642 [일반] [10] 명절기념 와이프 선물용 맞춤 속옷 의뢰 후기 [38] 파란샤프9429 19/09/08 9429 11
82641 [정치] 주광덕의원이 폭로한 조국의 거짓말 증거 [77] 대보름13448 19/09/08 13448 7
82640 [일반] 아디다스 솔라드라이브 후기 [14] 하심군10679 19/09/08 10679 0
82639 [일반] [약스포] <그 것2: 두번째 이야기> 후기 [15] 김유라6075 19/09/08 6075 4
82638 [일반] 목표점(Aimpoint) [15] 성상우5846 19/09/08 5846 4
82637 [정치] 나경원 아들(추정), 고등학교 시절 논문 1저자 등재 논란 [373] 쿠즈마노프24950 19/09/08 24950 36
82635 [정치] 동양대 최성해 총장이 박사학위가 없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162] 갈색이야기19132 19/09/08 19132 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