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둘 모두 들어보셨을 겁니다. 특히 더 유명한 낙지 살인사건의 경우
많은 분들이 알고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둘 모두 '직접 증거가 부재한 상태에서 정황 증거만으로 유죄를 선고할
수 있는가?'라는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정말로 중요한 문제에 대한 실제 사례입니다.
우선 양 사건의 사실관계에 대해 정리하겠습니다.
산낙지 보험 살인사건
[2010년 4월, 결혼을 앞둔 연인 사이인 김아무개씨(30대 남성)와 윤아무개씨(20대 여성)는 데이트를 하고 주점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새벽 3시경 모텔에 들어간 그들의 손에는 산낙지 4마리와 술이 들려 있었다.1시간이 지났을 무렵 김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객실 프론트로 전화를 걸어왔다. "여자친구가 낙지를 먹다가 숨을 쉬지 않는다"며 119에 신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신고 후 모텔 직원이 방에 들어갔을 때 윤씨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을 자듯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윤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보름 후에 숨지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 윤씨와 함께 있었던 김씨의 주장대로 사건은 사고사로 결론 나는 듯했다. 하지만 김씨가 이 사고로 거액의 보험금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된 유족들의 문제제기와 수사기관의 재조사로 김씨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살인동기, 보험가입 등의 이야기는 그냥 짤방을 보시면 쟁점이 이해가 가실것이고,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란은 바로
사망 원인의 문제로 봐도 됩니다. 유죄라고 판단한 1심 재판은 낙지가 기도에 걸려서 죽은 것 (기도폐색질식사)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김씨가 윤씨를 천 등으로 코/입을 막아서 죽였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실제로 낙지를 먹다가 사고로
죽었을 수 있다고 본 것이죠.
다만 위의 짤방은 2심 재판부가 적극적으로 김씨측의 해명을 다 받아들인것처럼 묘사하였는데, 실제 2심 재판부의 표현은
'~할 수도 있다, 매우 어렵다는 것이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할것은 아니다,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쉽다' 등 의심스러운건
사실이지만 유죄라 단정하기엔 증거가 부족하다 정도에 가까웠습니다.
짤방에서 나오지 않은 정황증거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몇가지를 적어보겠습니다.
1. 윤씨의 주량은 소주 반병에 불과한데 사망 시점에선 3병을 넘게 마셨던 점
2. 윤씨가 치아 우식증이 있어 평소 산낙지 등 질긴음식을 아주 싫어했던 점
3. 바로 119를 불러 병원에 갔다면 1분 내로 구급차가 도착할 만큼 가까운 거리인데 일부러 시간을 끌었던 행동이 보이는 점
4. 낙지를 먹은것과 관련하여 김씨의 증언이 지속적으로 바뀐데다가 아예 틀린 부분이 많던 점
5. 김씨는 빚이 여기저기 많아 채권자에게 독촉당했는데, 윤씨가 죽기 전부터 갑자기 채권자들에게 곧 큰 돈이 들어올 것이라 말해왔던 점
이런 점들을 보면 사실 검찰, 경찰은 물론 재판부 조차도 대단히 수상한 정황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였는데요, 이 재판은 놀랍게도
2심, 대법원 모두에서 무죄 확정되었습니다.
니코틴 살인사건
https://namu.wiki/w/%EB%82%A8%ED%8E%B8%20%EB%8B%88%EC%BD%94%ED%8B%B4%20%EC%82%B4%EC%9D%B8%EC%82%AC%EA%B1%B4
[2016년 4월 22일, 53세 남성 오모 씨가 딸(22) 등 가족과 외식하고 돌아온 후 거실에서 맥주를 마셨고, 방에 들어가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오씨의 아내 송모 씨(47)는 귀가한 지 4시간 만에, 안약을 넣어주기 위해 방문을 열어보자 남편이 숨져 있었다며 사망 신고를 했다. 외부 침입이나 외상의 흔적은 없었고, 특별한 사인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오씨는 평소 건강한 사람이었다. 사인이 명확하지 않아 부검을 한 결과, 놀랍게도 사인은 치사량인 1.95㎎/L의 니코틴 중독이었다.(혈중 니코틴이 ℓ당 3.7㎎ 이상이면 치사량으로 간주된다.) 문제는 오 씨는 생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심지어 이 정도면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양이었다. 게다가 수면제 성분인 졸피뎀이 다량으로 검출되었다.]
해당 사건의 유력한 정황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상식적으로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면 119 등 구급수단부터 찾으려는것이 일반적인데, 쓰러지자 당연히 죽을것이라 확신한 것처럼 바로 장례식장부터 연락했다가 장례식장 측이 먼저 경찰에 신고하시라고 말하자 비로소 신고한 점.
2. 남편의 직장 동료등 주변인에게 사망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고(남편 오씨는 외동아들에 부모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셔 친인척은 없는 사람.) 빈소조차 제대로 차리지 않은채 급속으로 장례절차를 대충 해치운 점.
3. 오씨는 초혼이고 송씨는 재혼인데,(위의 딸은 송씨가 데려온 딸) 둘은 2010년부터 동거해 왔으며, 결혼신고는 2016년 경에 이루어졌는데, 결혼신고가 이루어지고 두달만에 오씨는 살해당했다는 점.
- 이 부분에서 특히 의심스러운 대목은 사실혼 배우자에겐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으나 법률혼 배우자에겐 상속권이 인정되는데, 송씨가 오씨에 대한 상속권을 얻고 두달만에 오씨가 살해당했다는 점과 애초에 저 결혼신고 자체가 송씨의 조작이라는 점입니다. 혼인신고서의 오씨 필적은 조작된 것이며 증인란의 황씨는 추후 서술하겠지만 오씨는 누군지도 모르던 송씨의 내연남입니다. 부부의 혼인신고서에 일방의 바람상대가 증인을 선 셈입니다.
4. [앞선 내연남 황씨의 스마트폰 등을 압수해서 뒤진 결과 그가 오씨 사망 전 니코틴 살인 방법, 치사량, 장례절차 등의 단어를 검색한 것이 드러났다. 또 황씨는 사건 일주일 전 중국 사이트를 통해 니코틴 원액 20mg을 주문했다. 그가 구입한 고농도 액상 니코틴은 무색무취해 구별하기 어려우며, 화학물질관리법상 유독물질이라 허가를 받아야 제조하고 유통할 수 있지만 전자담배 인구가 늘면서 국외 사이트 등을 통해 음성적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5. [오씨가 숨지자, 송씨는 10억 원 상당의 오씨의 재산을 처분해 자신의 이름으로 돌렸다. 남편 사망보험금 8000만 원도 수령하려 했지만 보험사는 남편 사망에 대해 경찰이 수사 중인 것을 알고 지급을 거부했다. 이때 송씨가 황씨와 함께 보험사에 찾아간 점이 결정적으로 수상히 여겨지는 계기가 되었고, 내연남이라는 게 밝혀지는 근거가 됐다. 특별한 직업이 없는 황 씨는 2년 전 여행사 가이드를 했을 때 중국 마카오 여행을 하던 송씨를 만나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산낙지 사건과 마찬가지로 소위 직접 증거가 없었던 것이죠. 직접적으로
어떻게 살해당했는가, 즉 어떻게 니코틴을 주입했는지를 전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니코틴 원액은 대단히 강렬한 쓴맛이 나기 때문에 음식 등에 넣어서 몰래 먹이기가 어렵습니다. 수면제 성분이 시신에서 검출된 점을 고려할 때 수면제를 먼저 먹여서 재운 후 니코틴을 주입해서 죽였다 라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추측의 영역입니다. 즉 검/경은 송/황씨가 오씨를 죽이려는 정황증거와 살인 도구(니코틴)까지 찾아냈지만 그 니코틴을 주입했다는 증거와 어떻게 주입했는지를 밝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산낙지 사건과 너무나 비슷해 보이는 이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현재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단순히 생각하기엔 산낙지 사건도 1심에선 유죄가 나왔다가 뒤집힌 것이니, 니코틴 사건도 2심 이후로 뒤집힐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증거가 없이 정황증거만 있는 사건들에서 법원이 언제나 무죄를 선고한게 아닙니다. 즉 법원은 정황증거만으로 유죄를 선고하기 위한 일정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산낙지 사건은 넘기지 못했으나 니코틴 사건은 넘겼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현직 변호사의 설득력 있는 분석이 있습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862929
[손수호> 네. 니코틴 살인사건과 비교해 보죠. 살인의 직접증거가 없는 건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의 법원의 판단은 정반대죠. 니코틴 사망사건의 경우에는 사망한 사람의 몸 안에 치사량의 니코틴이 있었습니다. 또 흡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코틴을 누군가 몸에 주입했다는 점은 확실한 거죠. 일단 누군가 주입을 했다. 그리고 니코틴을 누가 어떻게 몸속에 주입했는지가 밝혀지지 않았던 상황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정황증거들이 서로 모순 없이 연결되기 때문에 아내와 내연남이 살인범행을 한 것으로 판사가 확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김현정> 그런데 낙지 살인사건은요?
손수호> 다릅니다. 살인으로 볼 정황증거가 많은 건 사실이에요.
김현정> 맞아요.
손수호> 그런데 결정적으로 윤 씨가 정말로 살해된 것이냐. 아니면 실제로 낙지를 먹다가 질식한 것 아니냐. 검사는 여기에 대한 증명부터 실패했습니다. 의료진이 낙지에 의한 질식사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죠. 또한 법원도 타살로 확신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을 한 겁니다. 안타까운 점은 윤 씨의 시신이 부검 절차를 하지 않고 화장되었다는 겁니다.]
즉 정황증거가 많은점은 동일하나 니코틴 살인사건은 '정상인의 몸에 있을 수 없는 물질이 발견이 되었다.' 까지는 확인이 되었으니 최소한 '누가 죽였나'의 문제가 남을 뿐 '살인' 자체는 확정됬다 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낙지 살인사건은 '애초에 살인이 맞는가'에 대한 증명에 실패했던 사건입니다. 이 구조는 과거 천일관 사건 논란에서 댓글로 오갔던 소위 조건부 확률 논란과도 연결됩니다.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일 확률은 낮지만, 가정폭력 피해자가 살해당했을때, 가해자가 범인일 확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즉 '살해당했다'라는 부분을 확정할 수 있다면 정황증거만으로도 유죄 선고가 가능해지는 셈입니다. 그런데, 바로 '살해당했다' 부터 확정이 불가능하다면 그때는 대단히 힘든 문제가 되는 셈이죠.
아직 니코틴 살인사건도 2심 3심이 남아있어서 향후 재판부가 어떻게 판단할지는 봐야할 문제겠습니다만, 이미 나온 사실만으로도 나름 전공자로서 흥미로운점이 많아 정리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