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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7/01 14:32:22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삼국통일전쟁 - 4. 642년, 두 거인의 만남 (수정됨)


왕권과 신권의 대립, 중앙집권을 하려는 왕과 그걸 거부하는 귀족들의 대립, 각자가 지향하는 정책으로 인한 대립... 이런 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죠. 이 때 삼국도 그랬습니다. 그 결과가 이후의 역사에도 꽤나 큰 영향을 미쳤을 거구요. 각자의 성향은 기록에 따라 짐작할 수 있지만, 많은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죠. 기록이 부족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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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다섯 자루라면 역시 (...)

연개소문이 대당 강경파라 온건파인 영류왕과 대립했고 쿠테타로 이어진 것이다... 이 역시 전후의 상황을 본 해석입니다. 영류왕은 온건책을 폈고 연개소문은 맞설 테면 맞서보자로 나왔으니까요.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건 동부(혹은 서부)대인 대대로의 아들로 성질이 포악해서 많은 견제를 받았다는 것, 그래서 최고 관직인 대대로를 이어받을 피임에도 반대를 받았다는 것이죠.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고 임시로라도 해 달라, 못 하면 쫓아내도 받아들이겠다고 해서 겨우 이어받게 됐죠. 이런 거야 구밀복검인지라 [흉포하고 잔인해서] 왕이 대신들과 함께 죽일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수를 쳤죠.

660년에 당에서 써진 한원에는 고려기를 인용한 고구려의 관등이 나와 있습니다. 대대로가 1등이었는데 삼년에 한번 교체한다고 하는데... 이게 지들끼리 싸워서 결정한다고 합니다. (...) 왕은 궁문을 닫고 참견하지 않고 말이죠. 정확한 시기를 알 순 없지만, 고구려 말 귀족들의 권력이 이랬습니다.

광개토-장수-문자-안장으로 이어지는 전성기 후, 안원-양원으로 이어지는 혼란기가 옵니다. (일본서기에는 안장왕부터가 살해당했다고 나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 사이에 추군과 세군으로 일컬어지는 귀족 세력이 싸우면서 자기가 미는 자를 왕으로 앉히려고 했고, 안원왕은 이 과정에서 죽고  양원왕을 미는 쪽이 승리해서 왕이 됐습니다. 패배한 세군 쪽이 이천명이나 죽었다 하니 얼마나 큰 갈등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죠. 평원-영양은 이런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했다고 평가받고, 이전 글에 썼듯 평원왕의 온달 등용이 기존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죠. 을지문덕도 이런 느낌으로 보기도 하는 거구요.

연개소문이 대대로를 이을 사람이었고 그 중요한 천리장성을 감독한 걸 보면 귀족 세력들 중 손 꼽을 만할 사람이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참 독한 사람이었는지 왕은 물론이고 귀족 반대파도 많았던 모양이죠. 그것도 참 많이요.

겉으로는 사열식을 보여준다면서 귀족들을 초대했고, 술을 대접하는 척 하면서 군사를 풀어 다 죽여버리니 삼국사기에는 백여명, 일본서기에는 무려 180여명이었습니다. 이게 다 귀족들이면 그야말로 몰살이죠. 이어 영류왕을 죽이고 시체를 몇 개로 토막냈다 하니 -_-; 대체 무슨 원한이 있었는지 몰라도 처참하게 죽였죠. 그리고는 영류왕의 조카를 왕으로 앉히니 보장왕입니다. 그리고 조정을 자기 편으로 다 채운 후 자신은 대막리지라는 이름으로 실권을 장악했죠.

영류왕이 했던 온건책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죠. 글쎄요. 어느 길이 옳았을까요? 온건vs강경이 쿠테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고구려가 강경하게 나가고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양측이 온건, 강경으로 갈렸다는 건 확실할 겁니다. 하지만 영류왕도 충분히 할 말이 있습니다. 맞서면 얼마나 큰 피해가 날 지를 자신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무턱대고 숙인 것도 아니고 천리장성이라는 큰 사업도 벌였구요. 물론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 지나치게 숙였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 건 분명했습니다. 명백한 내정 간섭이었으니까요. 여기다 온건책을 계속했다고 과연 당태종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인가, 당태종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전쟁을 막을 정도라면 얼마나 많이 퍼줘야 했을 것인가도 걸리긴 하죠.

저로서야 온건책에 생각이 더 갑니다. 못 해도 시간은 더 벌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연개소문이 잘 싸웠다 한들 쿠테타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문제, 약해진 정통성과 분열을 생각하면 더 그렇죠.

연개소문 자신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겠습니다. 이렇게 642년, 고구려의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리고 남쪽에서도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또 하나의 거물이 그를 찾아오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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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동성-무령-성왕으로 가며 부흥했지만, 관산성 전투로 다시 망해 버렸죠. 그 후 혼란기를 겪다가 무왕 대에 다시 부흥합니다. 이 과정에서 문제된 것들 역시 귀족들을 어떻게 다루냐는 거였죠. 무왕의 익산 천도 움직임을 여기서 보기도 하는 거구요. 기존 웅진(공주)-사비(부여)의 귀족들에 맞서 익산에서 신진 세력을 끌어들여서 견제한다는 것이요.

641년, 무왕의 아들 의자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 별명이 해동증자,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 유명한 유학자죠. 학문, 특히 유학에 능하지 않았다면 붙기 어려운 말이겠죠. 이렇게 유교로 중앙집권을 강화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위 초부터 그는 강경한 모습을 보입니다.

"지난해 11월 대좌평 지적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윤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 기미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 일본서기

642년, 일본서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숙청을 벌입니다. 사택지적비로 유명한 사택지적의 죽음도 이와 연관돼 있는 것으로 추측되구요. 다만 저 일은 일본서기의 오기로 655년설이 나오기도 합니다. 일단 일본서기에서 사택지적이 나중에 또 나오기도 하고 말이죠 (...) 그 시대로 가면서 다시 얘기하면 되겠습니다. 어느 때의 일이든 의자왕이 강하게 나온 건 맞을 테니까요.

이런 강경함은 대외적으로도 마찬가지였죠. 원수의 나라 신라에게 말입니다.

647년 7월, 임금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8월, 장군 윤충을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성주인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는데,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의 목을 베어 왕도에 보냈다.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와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병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임금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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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신라를 밀어붙인 것이죠. 거기다 대야성까지 점령합니다. 현재의 합천, 신라의 서쪽을 무너뜨린 겁니다. 그리고 의자왕의 성향을 보면 이대로 끝날 리도 없었구요. 이후 신라의 상황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죠.

+) 후삼국 때도 중요도는 마찬가지라서 대야성은 대표적인 격전지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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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병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복수하고자 합니다."

이 때 나선 이가 있으니 김춘추였습니다. 이 피해는 신라 혼자서 막을 수 없는 거였고, 앞으로 이어질 공격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손 잡을 나라가 필요했고, 백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고구려가 제격이었습니다.

그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습니다. 딸 고타소가 대야성에서 죽었거든요. 딸을 많이 아꼈는지 하루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이 지나가도 알지 못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분연히 일어나서 간 거였죠.

단순 원한만도 아닐 겁니다. 대야성의 함락에는 사위 김품석의 잘못이 결정적이었거든요. 부하들의 아내를 빼앗았고, 그에 분노한 부하들이 배신한 거였죠. 오히려 김춘추가 직접 패죽이고 싶을 정도의 사위였지만... 사위인 만큼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었을 거고 그에 대한 수습도 해야겠죠.

신라가 망할 수 있는 위기, 딸의 죽음에 대한 분노, 자신의 정치적 입지... 많은 게 걸려 있었습니다. 최소한 진흥왕 이래로 고구려와 신라도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김춘추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를 결단을 내린 거죠.

그가 떠나는 길에 그를 배웅하는 동지가 있었으니... 김춘추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공은 일심동체로 나라의 고굉지신(임금이 가장 믿고 중요하게 여기는 신하)이 되었소. 이번에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이 어찌 무심할 수 있겠소?"

그는 이렇게 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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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께서 만일 가서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백제 두 왕의 궁정을 짓밟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 나라 사람을 볼 수 있겠습니까?"

김유신이었죠. 둘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나눠 마시고는 맹세합니다.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약 이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이렇게, 김춘추의 길고 긴 외교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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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백제는 무도한 뱀과 돼지처럼 되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금이 대국의 병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보장왕의 답은 이거였죠.

"죽령은 본시 우리의 땅이었다.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병사를 내보낼 수 있으리라."

영양왕 때 온달이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못 하겠다고 나갔던 게 죽령 이북의 땅이었습니다. 소백산맥 쪽이죠. 백제의 원한과는 별개로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을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맞았고, 고구려는 이 땅을 회복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신라가 참 악착같이 한강을 지켜냈고, 중국에 맞서느라 여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죠.

진짜 돌려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해서 에둘러 거절한 거겠죠.

"저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고자 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좋게 지내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저는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협상이 될 수 없는 문제, 보장왕은 그를 별관에 가둡니다. 김유신 열전에는 이 때 선도해라는 신하에게 뇌물을 주고 술을 마시니 그가 살아날 조언을 해 줬다고 합니다. 별주부전의 모태로 보는 이야기죠. 이 버전에서는 용궁으로 가는 길에 거북이가 사실을 알려주자 토끼가 급히 간을 놔두고 왔다고 해서 살아납니다. 김춘추는 보장왕에게 이렇게 말 했고,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죠.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대국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할 수 있게 해주시면 저희 왕에게 청하여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한편으로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혹은 몰래 사람을 보내 잡힌 사실을 알리자) 김유신이 분노해서 병력을 이끌고 북진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1만, 김유신 열전에는 3천을 이끌고 고구려 땅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이 그를 놔 주었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영향을 줬을진 모르겠네요.

아쉽게도 연개소문과 김춘추가 설전을 벌이는 그림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그가 등장하는 건 보장왕의 명에 따라 그가 김춘추의 숙소를 주고 잔치를 베풀어 줬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재미있는 창작을 할 수 있겠죠. 그게 아니더라도 실권자가 직접 그를 대접했다는 걸 보면 고구려에서도 그를 크게 보고 있었던 건 맞을 겁니다. 그리고 실권자가 그이니만큼 보장왕의 뜻은 곧 그의 뜻이라 해도 되겠죠.

고구려로서는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을 겁니다. 백제를 친다 해도 고구려와는 한강 유역의 신라 영토로 단절돼 있었으니까요. 잘 돼서 백제를 공격한다 해도 신라가 더 이득이죠.

이후의 상황을 보면 백제를 같이 공격한다는 것보단 양측의 불가침 조약을 생각했어야 할 일일 겁니다. 신라를 자기 편으로 잡아두고 중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거죠. 하지만 이건 뒷날의 일이고,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으니 생각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차피 수나라 떄도 백제와 신라가 다 고구려 쳐 달라고 했었구요. 하지만 중국과 두 나라의 연계는 딱히 없었죠.

오히려 고구려로서는 백제와의 연계가 더 탐이 났을 겁니다. 잘 하면 한강도 다시 먹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상황에서 신라보단 백제가 더 잘 나가고 있었구요. 그 이전이 삼국이 서로서로 공격하는 모양이었다면, 이후는 고구려와 백제가 손을 잡고 신라를 집중 공격하는 형태가 되었죠. 여제동맹으로도 보긴 합니다만, 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뭔가 연계해서 서로를 돕는다거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죠. 불가침 정도가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이 동맹에 대한 게 꽤나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연개소문을 설득해서 여제동맹을 만든 주인공이 바로 성충이죠. 조선상고사에는 성충의 여러 활약들이 나오고 백제의 에이스로 나옵니다. 하지만 신채호가 딱히 이에 대한 출처를 남기지 않았고 비슷한 기록도 없는지라... 크게 쓰이진 않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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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년,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쿠테타로 정권이 바뀌었고, 대당 정책도 바뀌게 됩니다. 백제는 외적으로는 신라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내적으로도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해 갔죠. 신라는 큰 위기에 몰렸고,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지만 실패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위기는 계속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위기 속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은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해 갑니다. 김유신은 이 해에 압량주(=압독주, 현 경산) 도독이 됩니다. 대야성 대신에 신라의 새로운 방패가 된 곳이죠. 김춘추는, 신라는 새로운 동맹을 모색합니다. 백제는 물론 고구려를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동맹 말이죠. 642년 이 한 해 동안 참 많은 게 바뀐 것이죠.

당태종은 이런 삼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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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안시성으로 가 보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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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17/07/01 14:57
수정 아이콘
쭉쭉 읽었네요.

재밌고 유익함요 이응이응 추천
Jon Snow
17/07/01 15:18
수정 아이콘
다 알고있는건데도 흥미진진 하네요
카서스
17/07/01 15:24
수정 아이콘
고구려 백제간 연계가 있다는건 둘이 연합해 당항성을 공격한 사건으로 알수있죠.
동맹이라고 하긴 애매하긴 하지만... 이게 교과서에서 나오는 십자외교중 세로축이죠.
하심군
17/07/01 15:41
수정 아이콘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이 절반은 개그성 기획이었지만 비슷한 기획으로 드라마를 만들어도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카루오스
17/07/01 15:45
수정 아이콘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앞장섰던 김춘추는 훗날 왕건으로 환생해 고구려를 다시 이어갑니다.
시라카와 미야코
17/07/01 16:09
수정 아이콘
자기가 멸망시키려던 나라를 대조영/왕건 두번이나 환생해서 이어가는겁니까 크크
시라카와 미야코
17/07/01 16:09
수정 아이콘
다음화가 안시성이군요 기대됩니다
호리 미오나
17/07/01 16:27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흥미로운 인물은 윤충입니다. 당시 격전지였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목베었을 정도라면 백제군의 총사령관일 텐데, 이후 기록이 없죠;; 이 부부의 시체는 무려 5년 후 백제 장수 여럿과 맞교환될 정도의 가치가 있었으니, 이들을 목베는 것은 왕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자의 허락이 있었을 테죠.
흔히 백제 말기 두뇌의 대명사로 성충과 흥수가 꼽힌다면(삼국지 원소 멸망기의 전풍과 저수 느낌) 무력 에이스는 계백이 아니라 윤충이었을 텐데 말이죠. 일설에는 계백의 5천 결사대는 신라군을 막은 거고(처자식을 베어죽인 이유에 대해서는 계백이 의외로 젊을 가능성도...아들이라면 종군시켰을 테니까요) 또다른 병력이 당군과 싸웠을 거라 보던데 그럼 이게 윤충일지도 모릅니다. 대야성전투 때 항복한 신라장수들은 김법민(훗날 문무왕)이 처형한 기록이 있으니, 윤충을 가만 놔뒀을리 만무한데...
기록이 없으니 참 답답하죠. 옛날 사극 '삼국기'에서는 윤충에게 백제 말년의 에이스다운 인상적인 마무리를 선물합니다. 백제 멸망 후 나당전쟁을 수행하던 신라군중에 결사대를 이끌고 잠입, 무열왕의 목을 땁니다(...) 그리고 자결했던가 싸우다 죽던가, 여튼 최후를 맞이하죠. 이때 윤충이 무열왕(누군지 기억안남)의 목에 칼을 겨누며 "백~제의 넋이요."라던 대사가 떠오르네요.
무무무무무무
17/07/01 16:35
수정 아이콘
임혁씨는 양만춘 역이었습니다. 근데 윤충이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네요. 꽤 비중있는 인물이었을텐데....
호리 미오나
17/07/01 16:39
수정 아이콘
헉 수정하는 사이 댓글이^^; 정도전에 조민수 역으로 나오셨던 김주영씨더라고요. 성충이 김갑수씨... 용의눈물은 구할 수 있던데 삼국기는 너무 오래 되서ㅠ 볼수 없으니 아쉽습니다.
무무무무무무
17/07/01 17:13
수정 아이콘
김갑수씨가 삼국기에 나왔었군요. 전혀 기억 안나는데 흐흐흐
그리고 무열왕 역 배우가 기억 안날만도 한게 송영창이어서.... 이후 나올 수가 없었죠....
김유신 역을 맡았던 서인석씨가 이후 사극에서 승승장구했던 것과 비교하면 참 씁쓸합니다.
고기반찬
17/07/01 16:56
수정 아이콘
평범하게 그 전에 죽었을 수도 있죠. 실제로 백제군 주력은 당군을 요격했다가 전략 미스로 그냥 박살나버리는데 윤충 쯤 되는 인물이 이 부대를 이끌었다면 기록이 남았을겁니다.
호리 미오나
17/07/01 17:05
수정 아이콘
아... 그냥 싸워서 졌다 정도가 아니고 자세한 기록이 있군요.
고기반찬
17/07/01 17:20
수정 아이콘
현경(顯慶) 5년(당 고종 660), (황제가) 태원(太原)에 행차하는데 수행하였는데, 황제가 명하여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總管)을 제수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하게 했다. 소정방이 성산(城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웅진강 입구(熊津江口)에 이르렀는데, 적들이 군대를 주둔시키고 강에 웅거하고 있었다. 소정방이 (강의) 동안(東岸)에 올라, 산의 지세를 이용해 진을 치고, 적과 크게 싸웠는데, (수군의) 올린 돛이 바다를 뒤덮고 계속 이어져 왔다. 적의 군대가 패바하였는데, 죽은 자가 수천명이오, 나머지는 스스로 달아나 흩어졌다. 조수를 만나 또 올라가는데, (전함의) 고물을 연이어 강에 들어오고, 소정방은 강안 위에서 진영을 끼고 있으니, 수륙으로 아울러 진군하는데, 노를 빨리 저으며 북을 쳐 고조시키고, 곧바로 도읍으로 향했다. 도성과 20리 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적이 온 나라를 기울려 와서 항거하는데, 이와 크게 싸워 대파하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1만여 명이나 되었고, 추격하여 성곽에까지 들어갔다-구당서 소정방전

비슷한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있는데 윤충이 이 백제군을 이끌었다면 당서에는 기록이 안남았어도 삼국사기에는 남지 않았을까 싶네요.
호리 미오나
17/07/01 17:55
수정 아이콘
오~ 굉장히 자세한 기록이네요. 답변 감사합니다^^ 백제군 지휘관 이름이 없는게 아쉽네요. 계백 같은 경우도 장군이 아니라 문관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17/07/01 17:30
수정 아이콘
아.. 고구려 양각이네요.. 망해쓰요..
보통블빠
17/07/01 18:11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궁금한게 백강전투를 일본-백제 부흥 연합군이 승리했으면 백제는 다시 살아 날 수 있었을까요??
17/07/01 19:58
수정 아이콘
동아시아사에서 많이 나오는 문제지만...675년.
아니요.
김블쏜
17/07/01 20:55
수정 아이콘
야 이세민!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안시성으로 따라와!
Je ne sais quoi
17/07/02 00:28
수정 아이콘
고구려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나라는 참 위치가...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홈런볼
17/07/02 00:39
수정 아이콘
지난번 눈시님 글에 댓글로 달았지만 이미 고구려 입장에선 답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나라 시절 요동원정에서의 대굴욕으로 체면을 구긴 입장에서 당은 이미 고구려를 손보려고 마음을 먹은 입장이었고 신라와 백제는 서로 중국에 고구려를 쳐 달라고 일러바치는 형국이니 고구려의 국력으로서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정치체계가 강력한 중앙집권이 아닌 5부족 연맹체의 귀족중심체계라 힘을 모으기도 힘들었을거라 보고 그 상황에서 연개소문의 정변은 그마저도 많은 세력이탈을 불러오지 않았을까 예상해 봅니다.
수나라 대부터 당태종의 침입까지 대륙에서 대군이 몰려오면 모든 들판의 곡식들은 다 아작이 나고 전국의 성인남자들은 군사로 차출이 되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을 리가 없고 한두번이나 호국정신으로 목숨바쳐 막아내지 그런 침입이 계속 되면 제 입장이라도 질려서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홈런볼
17/07/02 00:46
수정 아이콘
저도 처음에는 당에게 온건책을 폈던 대수전쟁의 전쟁영웅 고건무(영류왕)의 정책(어찌보면 굴욕 외교죠.)이 의아스러웠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이 어쩔 수 없으면서도 가장 현명한 정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고 나름 최악의 상황을 준비했으니까요.
삼십만의 별동대를 살수에서 수장시켜버렸는데도 다음해에 어마어마한 전력으로 다시 쳐들어오는 수를 보며 그는 이미 상대가 안될거라는걸 직감했다고 봐요.
무무무무무무
17/07/02 01:57
수정 아이콘
일단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안하는 게 1순위에 요동 방어선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백제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668년 고구려 멸망, 670년 당의 대비천 전투 참패와 안서사진 함락, 675년 매소성 전투....
국제정세를 등에 업고 신라도 당을 몰아냈는데 고구려가 딱 10년, 아니 5년만 더 버텼으면 모르지 않았을까요.
홈런볼
17/07/02 00:29
수정 아이콘
저 때 백제가 합천 대야성을 얻고 당항성까지 함락했을 때 당이 나서서 함락했던 당항성을 포기했었죠. 아마 중간에 당이 나서지 않았다면 어쩌면 신라가 백제에게 수도가 함락당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전 한국사기에서 본 내용인데 26대 성왕이 나제동맹에서 배신을 당하고 옥천싸움에서 신라의 노비출신 군사에게 허무한 죽임을 당하죠. 그리고 그 유골이 금성(경주)의 궁궐 계단 밑에 묻힌다는 얘기를 듣고 꽤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의자왕은 아무래도 그런 과거의 역사인식이 투철했던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역사에게 만약이란 없지만 그 때 백제가 신라를 제압했다면 지금쯤 일본과 우리나라는 같은 나라까진 몰라도 굉장히 절친한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8년째도피중
17/07/02 08:33
수정 아이콘
일반적인 중학생 수준에서 저 부분을 이해하려면 저 부분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여제동맹'이어야만 합니다.
교과서도 그렇게 유도되어있고, 문제지 학습지는 더하니까요. 그래서 대범하게 고구려와 백제를 선으로 잇고 "여제동맹!"이라하니 모두가 행복해졌습니다.

학교선생님이 "여제동맹 아닌데?"라고 했다해서 놀림받기 전까지는요.

눈시님 글 잘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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