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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7/05/15 01:07:27 |
Name |
깐딩 |
Subject |
[일반] 동물의 고백(16) |
우리는 그동안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 이야기. 친구 이야기.
자신의 꿈과 그 노력에 대한 것들.
그리고 현실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것.
회사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들.
자취하면서 바뀐 생활들.
논스톱을 보면서 생긴 대학에 대한 환상들.
어릴 적 지상파에서 해주던 만화 이야기들.
서른이 되고 바뀐 많은 것들.
어릴 적 하고 놀았던 놀이들.
학창시절 했던 PC 게임들.
어릴 때 보던 지상파 만화영화들.
특히나 땅 불 바람 물 마음까지 알고 있었던 건 정말 놀랐었다.
같은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에 공감할 것도 많았고
추억할만한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일부러 화젯거리를 만들어 내지 않아도 대화가 즐거웠다.
친구처럼 편하지만 설렜고 두근거렸다.
점심 친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 내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네 좋아요! 이번 주 토요일에 보실래요?"
어? 의외로 대답이 쉽게 나왔다.
너무 흔쾌히 대답을 해서 당황했다.
"근데 제가 요즘 본가에 일이 있어서 주말엔 경기도 쪽에 가있거든요. ☆☆역에서 봐도 괜찮으실까요?"
멀어도 지하철만 닿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다.
"저는 뭐 주말에 시간이 남아돌아서요. 괜찮습니다. 거기서 보시죠."
"그럼 거기서 오후 3시쯤 볼까요?"
그러자고 했다.
그 시간에 맞춰서 알아서 예매를 했다.
좋은 자리에서 보고 싶어서 틈날 때마다 예매 오픈 시간을 확인했다.
그렇게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스크린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장 좋은 자리 예매에 성공했다.
내가 인생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였던 적이 있던가?
멜로 영화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내가 이렇게 간절했던 적이 있던가?
약속 장소에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주변을 구경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첫 데이트 비슷한 것이 아닌가?
절대로 지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 곧 도착해요. 어디세요?
-천천히 오세요. 저는 건물 입구 1층이에요.
저 멀리서 여자가 보인다. 처음 보는 사복 차림이다.
평소에도 사복 차림인 나와 달리 여자는 회사 특성상 꼭 갖춰 입어야 했다.
깔끔하고 단정했던 모습만 보다 이렇게 입은 사복모습을 보니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연청재킷에 흰 원피스, 정말 잘 어울린다.
"오시느라 힘드셨죠. 아직 3월밖에 안됐는데도 좀 덥네요."
"그러게요. 얇게 입고 왔는데도 벌써 후덥지근하네요."
여자가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 마신다.
생수병 사서 들고 다니는구나. 접수 완료.
"우리 오늘 똑같은 옷 입고 왔네요?"
여자가 내 청재킷을 보며 말한다.
사실 지금 시즌이 청재킷이 유행이기도 하고 제일 많이 입는 날씨이기도 하다.
"저 사실은 오늘 여기 나오려고 청재킷 새로 장만한 거예요. 이쁘죠?"
일부러 속일 것도 없고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신경 써서 나왔다' 를 은연중에 어필했다.
여자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진짜요? 저도 이거 며칠 전에 산 거예요! 우리 통했나 보다."
가슴이 뛰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데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영화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곁눈질로 여자를 수시로 쳐다보며 영화를 봤다.
팔걸이에 놓인 팔이 맞닿았다.
손.
손을 잡아도 될까?
내 손이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하염없이 손가락으로 박자만 타고 있다.
괜히 손을 덥석 잡았다가 이상한 놈 취급받으면 모든 게 끝난다.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다. 참자.
여자가 소리 내며 웃는다.
영화가 재밌나 보다.
다행이다.
여자가 영화관을 나오면서 말한다.
"생각보다 영화가 재밌네요! 사실 저는 액션이나 SF 아니면 안 보거든요.
미녀와 야수는 어릴 때 책으로 많이 봤던 거니까 다 뻔히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이렇게 뮤지컬 형식으로 보니까 재미도 색다르고 엄청 몰입해서 봤어요! 덕분에 잘 봤어요."
안 보는 장르의 영화를 보러 왔다고?
"저녁은 제가 살게요. 뭐 먹으러 갈까요?"
생각할 틈도 없이 여자가 저녁을 먹자고 한다.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대답했다.
"이 근처에 유명한 맛 집이 있다던데 혹시 여기 아세요?"
"사실 저도 여기는 많이 오는 곳이 아니라서 잘 몰라요 크크"
"그럼 일단 나가죠."
뭐였지 방금?
밥 먹는 내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의 손만 보였다.
웃을때 마다 크게 드러나는 목덜미만 보였다.
내가 무슨말을 하고 있길래 여자가 저렇게 웃는걸까.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 9시다.
나는 꽤 멀리 나왔기 때문에 지금 집에 돌아가도 10시는 족히 넘는 시간이다.
이 여자와 더 같이 있고 싶다. 미치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대로 보내면 너무 후회할 것 같다.
어떻게 되든 일단 던지자.
"요즘 여기저기서 봄 축제하시는 거 아세요?"
"아 벚꽃축제 같은 거요?"
"네 뭐 벚꽃축제도 있고 장미축제도 있고 놀데는 많아요.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어디 놀러 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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