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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1/14 00:01:03
Name aura
Subject [일반] 첫사랑의 맛

내 나이 스무 살, 대학생이 되어서 처음 먹은 밀크실론티 데자와의 맛은 아주 뭐 같았어.
뭐랄까. 이걸 돈주고 사먹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지.
물론 나도 내 돈 주고 사먹었던 거지만.

내 나이 앞에 1을 2자로 바꾸고 성인이 되었지만, 입맛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다시는 내 돈주고 이 음료를 사먹지 않겠다 생각했지.

그런데 사람사는게 참 재밌어.
대학교와서 딱 첫 눈에 반해버린 같은 과 선배가 정자에 앉아서 데자와를 마시고 있더라고.
나는 냉큼 주머니에서 짤짤이들을 털어 데자와 하나를 자판기에서 뽑았어.
그리고 냉큼 그녀 옆에 앉았지.

- 안녕하세요. 누나. 누나도 데자와 좋아하세요?

맙소사. 나는 정말 끔찍한 거짓말쟁이야. 누나'도'라니.
나도 데자와를 좋아한다는 뜻이잖아.
우습지만, 다시는 내 돈주고 안사겠다던 음료를 들고 실없이 웃음을 팔았지.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줏대없고, 간사한 녀석이었어. 난.

그치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내 돈주고 이 음료를 살거고,
그녀에게 말을 걸거야.

- 신기하다. 나 말고 이거 좋아하는 사람 처음봐.

그녀가 신기하다며 눈을 반짝였었거든.
데자와가 아니었으면, 그녀의 관심을 살만한 일이 없었을거야.

물론 그녀와 함께 벤치에 앉아 먹던 데자와 맛은 여전히 뭐 같았어.
거 참 우유도 아닌 것이, 홍차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자극적인 것도 아니고.
뭔가 살짝 부족한 맛이었어.

이후로 이 맹맹한 음료를 쭉 돈주고 사먹었던 까닭은, 그녀가 마셨기때문이야.
매주 같은 시간에 단과대 앞 정자에 앉아서.
맛은 부족한 친구일지 몰라도 내게 황금보다 귀한시간을 만들어줬던 녀석이지.

- 근데 누나는 데자와가 왜 좋아요?

정말 이 누나는 이게 맛있어서 좋아하는걸까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본적도 있지.
내 질문에 누나는 빙그레 웃었어. 참 예뻤는데.

- 글쎄? 그냥? 그냥 마시다 보니까 좋아진 것 같아. 너는 왜 좋아하는데?

누나의 반문에 부끄럽지만, 단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지.

- 그냥요. 그냥 좋아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거짓말은 아니야. 데자와는 아니지만 누나는 정말 그냥 좋았거든.
어쨌든 이 맹맹하고, 부족한 음료수 덕분에 그녀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했던 것 같아.
스무 살 모지리였던 나지만, 다행히도 그녀와 사귈 수 있게 됐거든.

사귀고 난 후에도 그녀와 곧잘 데자와를 마셨어.
다른 연인들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홀짝일 때 우린 길거리에서, 벤치에서, 강의실에서 데자와를 마셨어.
그때쯤인가?
이 맹맹하고 이상한 음료가 썩 괜찮게 느껴지더라고.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가봐.

하나 고백하자면, 그녀와 만나지 않았던 날에도 혼자 데자와를 사서 마신적이 있어.
참 내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렇게 혹평했던 이 녀석을 내 의지로, 내 돈으로 사버리다니.
한 캔 따서 혼자 마시는데 재밌게도 그녀와 같이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
웃기지?

같이 걷고, 영화보고, 놀이공원도 가고.
같이 축제를 즐기고, 노래 듣고, 손잡고.
같이 공부하고, 안고, 그리고.. 키스하고.

어떻게 하다보니 그녀와 하게 된 첫 키스의 맛은... 그래 데자와 맛이었어.
공원 둔치에 앉아 데자와를 마시다가 하게되어서 그랬던 걸까?
어쨌든 이후로는 습관적으로 데자와를 마셨던 것 같다. 참 좋았었는데.

나도 건장한 대한민국 청년이었기 때문에 결국 피할 수 없었지.
군대를 가야했어. 군대 문제 때문에 어떻게 하다보니 싸우게 됐고, 헤어지게 되었어.
그렇게 좋아했는데도 이별은 한 순간이더라.

그녀와 헤어지고 군대를 가고, 전역할때까지 데자와는 까마득히 내게서 잊혀졌어.
복학하고 나서 어느 날 문득 자판기에 데자와가 보이더라.
잠깐 고민하다가 데자와를 자판기에서 뽑았어.

다시 세상에 나와 마시는 데자와의 맛은 놀랍게도 생각보다 괜찮더라. 아니 좋았어.
적당히 달짝지근하고, 은은한 홍차향이 느껴지고.
벤치에 앉아 그때 그녀처럼 데자와를 홀짝였지.
우습게도 그렇게 벤치에 앉아 데자와를 마시던 내 나이가 딱 그녀를 처음봤을때 쯤 나이더라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더라. 어쩐지 그녀가 보고 싶었는데, 그 때.

- 와, 선배님도 데자와 좋아하세요? 학교에서 이거 마시는 사람 처음봐요.

여자 후배 하나가 한 손에 데자와를 들고 묻더라.
조금 기분이 이상했어.

- 근데 선배는 데자와 왜 좋아하세요?

피식 웃음이 났어. 나도 모르게 대답했지.

- 그냥. 그냥 좋아해.

사실 그냥 좋아하는 건 아니야.
마실 때마다 좋은 추억이, 좋은 사람이 떠오르거든.
같이 웃고 떠들던, 웃음이 예뻤던 사람이.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싫어하던 것도 좋아하게 되버릴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했던 내가 떠올라서 좋아.

지금도 나는 데자와를 마시고 있어.
첫사랑의 맛으로.




-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로 PPL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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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로크루소
16/11/14 00:04
수정 아이콘
그래서 여자후배와는 어떻게 되는겁니까...
농담이고,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이네요.
16/11/14 00:09
수정 아이콘
삘받아서 갑자기 휘갈겨버렸는데 (퇴고도 없이...) 감사합니다~
16/11/14 00:14
수정 아이콘
저도 학창시절 데자와만 먹었지만 누구도 나에게 말걸지 않았죠
16/11/14 00:15
수정 아이콘
말을 먼저거셨어야죠! 크크.
미카엘
16/11/14 00:14
수정 아이콘
그 여후배와 잘 되는 겁니까?
16/11/14 00:16
수정 아이콘
미카엘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크크.
후배와는 글쎄요...

카페 그녀 완결내야하는데..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있을까요? ㅠㅠ 죄송스럽네요..
회사에서 급한일 끝나고 언제든 완결 내야지라고 생각만하고 있습니다...
미카엘
16/11/14 00:17
수정 아이콘
흐흐 기다리고 있습니다. 타임 슬립도 있지요.
16/11/14 00:18
수정 아이콘
타임슬립은 플롯만 짜놓고 진행을 못하네요. 미카엘님 한 분이라도 기다려주시니.. 카페그녀 되는대로 완결을... 후, 사실 얼마 남지도 않았습니다. 크크.

그나저나 다시 쓰려고 제 글을 읽는데 뭔가 오그라들고, 너무나 못쓴 것 같아서 쥐구멍에 숨고 싶습니다. 크크.
새벽포도
16/11/14 00:19
수정 아이콘
흐...음?
군대휴가 나와서 짝사랑하던 여자애랑 같이 영화를 보고 나왔습니다. 영화보고 나왔던 그 애가 갑자기 어지럽다고...
그러고는 웬 남자선배한테 전화 걸어서 어지러운데 데자와 마셔도 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맥락없이 데자와를 사서 마셨습니다.
아마도 그 애는 전화한 그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들어 드네요 허허
16/11/14 00:39
수정 아이콘
저도 요즘은 연애하고 싶습니다. 솔로라 감성이 마르고 감성이 마르니 글도 안써지고 읍읍.(사실 글재주가 없음)
호리 미오나
16/11/14 00:22
수정 아이콘
해, 해로운 글이다!
여자 후배 이야기 내놓으시죠!!
16/11/14 00:39
수정 아이콘
기회되면 써보겠습니다.
사라세니아
16/11/14 00:33
수정 아이콘
수능 끝나고 데자와만 한 박스 사서 먹었지만 생기지 않았습니다... 죽창!
16/11/14 00:40
수정 아이콘
아지르밴점..
약쟁이
16/11/14 00:38
수정 아이콘
전 차 중에 밀크티를 가장 좋아하고 데자와도 좋아합니다.
데자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밀크티를 불호하는 사람이 많은 건가요?

데자와 마셔보면 가루 밀크티와 뭔가 약간 다른 맛이 나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 걸까요?
16/11/14 00:40
수정 아이콘
글쎄요. 제 친구들은 다들 데자와 싫어합니다 크크.
요즘 립톤 밀크실론티 먹어봤는데 괜찮더군요.
한걸음
16/11/14 00:44
수정 아이콘
전 이상하게 물건에 담긴 추억이 별로 없어서.. 부럽네요.
16/11/14 00:50
수정 아이콘
부러울 것 없습니다. 저도 솔로...
그나저나 카페그녀 완결을 얼른 내도록하겠습니다..(기다려주신다면요.. 내용 다 잊으셨겠지만..)
16/11/14 01:08
수정 아이콘
추억이란 해마속의 신경반응이며 데자와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가 형성된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부대원들은 커플지옥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T_T
16/11/14 07:14
수정 아이콘
저도 솔로부대...
16/11/14 01:37
수정 아이콘
공대에선 데자와 먹고있으면 누군가가 봉투에 대여섯개 들고 "선배님도 데자와 좋아하세요?" 라고하는 남후배들이 있었죠. 저는 박스째로 시켜먹었습니다만...
16/11/14 07:14
수정 아이콘
요즘은 공대에도 여자가 꽤많다고 합니다.
테바트론
16/11/14 02:13
수정 아이콘
첫사랑의 맛은

유통기한 두달 정도 지난 우유를 썩은 꽁치 통조림 국물이랑 잘 섞은 걸 입에 머금고 있는 그런 맛 아닌가요.

그 시절 느꼈던 감정을 맛으로 표현해볼라니까 이래 되어버리네요
16/11/14 07:14
수정 아이콘
안 좋게 끝난건가요?
테바트론
16/11/14 14:50
수정 아이콘
짝사랑이었는데다가...
제 이성관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크게 받아서요 하하
여우왕
16/11/14 02:26
수정 아이콘
첫사랑의 맛은 역시 액정보호필름 맛 아니겠습니까? (엄격, 진지, 근엄)
self.harden()
16/11/14 02:28
수정 아이콘
글 쓰실 때마다 '아! 카페 그녀!!'하고 떠오르네요 크크크
16/11/14 07:15
수정 아이콘
죄송합니다. 쓸겁니다..
self.harden()
16/11/14 12:55
수정 아이콘
아 부담드린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진짜 재미있게 읽어서 기억에 남았다는 뜻이었어요.
이 글도 재미있어요.
16/11/14 02:34
수정 아이콘
첫사랑의 맛은 참 썼네요....
지금은 어느 신문사 기자하고 있는거 같던데..행복하게 잘 살길 바랍니다^^
이런날은 승환형의 눈물로 시를 써도란 노래가 듣고 싶어지네요.
16/11/14 07:16
수정 아이콘
잘살겁니다.
16/11/14 06:34
수정 아이콘
얼른 카페 그녀 완결 내놓으시죠 흐흐..
16/11/14 07:16
수정 아이콘
급한일 마무리하고 짜투리시간 나는대로 완결까지 달려보겠습니다 크크.
물탄와플
16/11/14 08:10
수정 아이콘
역시 데자와. 사랑의 맛이죠 (흐뭇)
따뜻하게 데운 데자와의 계절이 돌아왔네요.
Zakk WyldE
16/11/14 08:23
수정 아이콘
저도 데자와 참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저도 비슷한 기억이 있는데 제 첫사랑 맛은 레모네이드맛이었습니다..
16/11/14 10:56
수정 아이콘
솔의눈 분발해야...
gallon water
16/11/14 15:48
수정 아이콘
데자와 마시면 생기는 겁니까?
첫사랑 맛은 원래 소주맛 아닙니까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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