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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8/20 12:26:37
Name 깐딩
Subject [일반] 동물의 고백(2)
나의 직장 생활 신조가 말조심인 이유는 말을 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책임과 결과는 모두 내가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말을 되게 가볍게 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특히나 '약속' 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더더욱 싫어한다.

말 한마디를 해도 신중하고 겸손하게 표현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좋다.

내가 좋아했던 이 선배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이 선배의 일을 자처해서 일부 받아와서 도와주었다. 선배가 먼저 퇴근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모두 해결했다.

해결이 안 되는 일은 주말도 반납하여 완료했다.

이것을 빌미로 어떻게 해보려는 심산은 아니었다.

단지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 고통을 내가 나눠 받기를 원했다.

그렇게 완료된 소스를 받은 선배는 고맙다는 인사 대신 항상 이렇게 말했다.


"역시 OO씨, 월급받으면 밥살께요"


같은 말을 수차례 들어왔으니 나는 정말로 월급날이 되면 같이 저녁 식사나 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의 기억 속에는 그저 가벼운 인사였던 모양이다.

2월 월급을 받고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먼저 "선배 저번에 밥 사기로 하셨잖아요? 언제 사실 거에요?" 라고 능청스럽게 묻는 성격은 아니었다.

자신이 한 말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일이 많고 바빠서 그런것일까?

정말 그런 이유였다면 적어도 지금은 일도 너무 많도 바빠서 여유가 생기면 그때 대접을 하겠다는 식의

미안함이 묻어나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는데 그 말 조차 없었다.





3월이 되어서도 선배의 할 일은 태산 같았다.

같은 날의 연속이었고 이 선배는 3월에도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말의 무거움과 중요성을 모른다.'

점점 정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같을 순 없으니 나는 다름을 인정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회사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OO 씨 부산에 볼 거 뭐 있어요?"

"글쎄요 뭐 광안대교 야경도 좋고 태종대나 용두산공원? 휴가 때 부산 가시게요?"

"네, 얼마 전에 남자친구 생겼는데 2박 3일로 거제도부터 부산까지 올라오면서 같이 여행하려고요"

"어..."



그때가 3월 중순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5초간 정적이 흘렀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듯했다. 하지만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


"비프광장 가면 씨앗호떡도 있고 자갈치 시장 구경 한번 하는 것도 좋아요. 횟감 사서 바로 회 떠먹어도 맛있죠. 좋겠다 남자친구랑 여행도 하고..."





그날 밤 나는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입에 대지 않았던 냉장고 안의 무수한 맥주를 한 캔 개봉했다.

상실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크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동안 정이 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으리라.

'내가 다이어트가 필요 없는 몸이었으면 내가 먼저 고백을 하고 나랑 연인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같은 헛된 망상을 이어나가며 두 캔, 세 캔 마셔나갔다.

'X바, 이게 인생이구나. 참 덧없다.'

다이어트의 원인이 없어졌으니 그렇게 다이어트를 그만두려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1주일 후 다이어트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인생 살면서 한 번도 다이어트를 결심해 본적 없는 내가 덕분에 살을 빼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자 였고

둘째는 같은 실수를 두번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였고

셋째는 2월에 들어온 내 후배가 선배에게 내줬던 마음의 자리를 어느 순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후배는 1편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2월에 입사한, 갓 대학을 졸업한 22살의 신입사원이었다.

2015년에 들어왔던 내 인생 첫 후배는 6개월간 나에게 엄청난 고통만 주고 떠나갔다.

그때의 나는 내가 와우 속으로 뛰어들어갈 수만 있다면 굴단이던 아키몬드건 직접 맞짱 떠서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분노 게이지가 충만한 상태였다.

그런 경험을 겪고 난 후 다시 받은 후배라는 존재에 대해 나는 의심하고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걱정은 기우였다.





이 후배는 어린 나이에도 성격도 싹싹하고 일도 잘했으며 사회성도 좋았다.

더군다나 회사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 게임 이야기를 할 존재도 없었는데

그 자리를 후배가 들어와 게임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관심사도 비슷하고 농담 따먹기를 해도 죽이 척척 맞았다.

냉정하게 생각해도 나와 후배의 인간 상성이 너무 좋았다.

내 비록 연애를 몇 번 안 해봤지만, 상성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후배가 나에게 잘 맞춰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나는 이런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을 넘게 사귄 친구들도 나와 이 정도로 잘 맞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내 후배가 들어온 2월부터 선배에게 말도 못하고 차인 3월 중순까지

진짜 삼류 드라마 각본 같은 머저리 같은 행동을 했었다.

이때까지만해도 나에게 이 후배는 친한 친구 정도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OO선배 회사에 좋아하는 사람 있죠?"



이 말을 듣는 순간 뜨끔했다.

내가 그 정도로 티를 내고 있었나? 나는 최대한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XX선배 좋아하시죠?"



후배의 입에서 나온 사람은 전혀 다른 3자였다. 왜 그렇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어찌 되었든 내가 회사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게 들통났고

그걸 누구로 이해하고 있던 소문이 나는 순간 나와 소문의 당사자가 되는 사람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후배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연애 조언을 듣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후배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후배도 어이가 없고 내가 당사자지만 나도 참 얼간이가 아닌가 싶다.

이 시점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항은 '내가 선배에게 더는 마음이 없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리는 법' 이었다.

뭐가 어찌 꼬여도 이 후배가 아직도 내가 선배를 좋아하고 있다고 알고 있으면 고백은커녕 죽도 밥도 안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계기는 회사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나를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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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0 12:35
수정 아이콘
오호라.. 흥미진하네요. 난 피지알러지만 어쨌건 해피앤딩을 원합니다.
그와는 별개로 선배라는 사람, 딱 사람 이용해먹는거 쉽게 생각하는 사람 같이 느껴지네요. 저도 싫어하는 유형입니다.
16/08/20 12:50
수정 아이콘
흥미진진합니다만 경계를 늦추진 않겠습니다
Outstanding
16/08/20 13:10
수정 아이콘
저 다음편은 어딨죠 결제하고 미리보기 가능한가요
16/08/20 13:14
수정 아이콘
다음편 어딨죠? 결제하고 미리보기 가능한가요?(2)
전광렬
16/08/20 13:22
수정 아이콘
크 삼각관계 였다니!
그래요
16/08/20 13:38
수정 아이콘
다음편 어딨죠? 결제하고 미리보기 가능한가요?(3)
저도 말만 앞세운 사람은 싫더라구요..
16/08/21 01:13
수정 아이콘
빨리 다음글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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