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날은 차례에 성묘에 아침부터 부산스럽다. 성묘를 다녀오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야 여유가 생긴다. 후손의 도리를 다한 사내들과 남편과 아이들의 배를 채운 아낙들은 자연스레 빙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운다. 진달래 같은 꽃이라면 좋으련만, 장미처럼 가시 돋친 이런 개나리 같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그들이 여유로울수록 나는 괴롭다.
"그래 병재는 이제 졸업했나?"
"아니요. 그래도 올해가 마지막이네요."
"너 작년에 4학년 아니었니?"
"한 해 더 다니려고요. 아무래도 취업하기가 힘들어서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취업이 힘들다니. 요즘 여기저기서 일손 부족하다고 난리던데. 젊은이들이 일을 안 하려고 드니깐 외국인 노동자만 점점 늘어나잖여. 시방 부산하고 인천은 아예 중국땅이 되어버렸다니깐."
"아유, 인천은 이제 무서워서 함부로 못 다닌다드만. 조선족 여자들이 한국 남자 꼬셔서 결혼한 다음에 본국에 있는 남편 불러다가 살해하고 둘이 한국 국적으로 세탁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고..."
"그러니깐 일손 부족하다고 외국인을 마구 불러들여가지고 아주 나라 꼴이 개판이여."
"시골 초등학교는 베트남 아이가 한 반에 절반이 넘는댜."
"이렇게 일손이 부족한데 실업률은 10%가 넘는다는 게 나는 도통 이해가 안 간다."
"아 그러게. 병재야 너가 좀 말해봐라. 도대체 왜 취업이 힘들다는 거여?"
"일자리 수준이 형편없는 걸요. 일손이 부족하다면서 월급은 최저 시급만 주고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비정규직만 내세우는데 거기 취업할 사람이 있을 리가요. 그러니 외국인 노동자들만 몰리죠. 결국, 그나마 정규직을 뽑는 대기업에 입사하려고 다들 아둥바둥하는 거죠"
"최저 시급이 어때서? 우리 때는 최저 시급이 하도 비현실적이어가지고 한 달에 88만 원 밖에 못 벌었어. 한 시간 일해봤자 커피 한 잔도 못 먹었다니깐. 지금은 햄버거 2세트는 먹잖아."
"그러게 요즘 애들은 배가 불렀다니깐. 우리 때는 취업을 하고 싶어도 못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일자리가 널렸는데도 건강한 일자리가 어떠니, 노조가 어떠니 따지는 것도 많아. 일단 취업하고 사람 구실부터 해야 할 거 아냐."
"우리 때는 진짜 꿈도 희망도 없었지. 오죽하면 삼포 세대라고 그랬다니깐. 병재 너는 여자친구는 있잖아?"
"네. 여자친구는 있어요."
"이것봐봐. 임마 삼촌은 결혼도 포기, 출산도 포기, 연애도 포기한 세대였어. 스물다섯이 넘도록 여자 손 한 번 못 잡았지. 그랬더니 마법이 벌어지더라고. 매일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사라졌지. 그래서 이후에도 여자를 만날 수 없었단다..."
"학생 수도 없어가지고 대학도 편히 가지. 취업문은 열려있지. 여자친구도 있지. 도대체 이렇게 누리는 게 많은데 니들은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요즘 대학이 대학이야? SKY 아니면 그냥 취업 학원이지. 그래도 병재가 머리가 있어서 SKY라도 갔으니 망정이지."
"그러게 넌 학벌도 좋잖아. 임마 너가 뭐가 아쉬워서 아직도 졸업도 못 하고 그렇게 빌빌대면서 사는 거야? 느 사촌 형들 좀 봐라. 다들 취업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응? 그 뭐다냐 본분을 다하고 있잖아."
꾹 참고 듣고 있던 나는 그만 그 말에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훌륭하신 형들은 얼마나 다망하시길래 명절인데 차례도 못 지내러 오나요?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신중하려는 겁니다."
"아니 뭐라고? 어린 노무 새끼가 어디서 말대꾸야?"
나는 분한 마음에 집을 나와버렸다. 할일 없이 동네 한 바퀴를 돌고나서 더 돌기가 민망해 늘 가던 동네 VR 카페에 들어갔다. 명절인데도 가게는 가득차있었다. 나처럼 자의반 타의반 집에서 쫓겨나온 놈들이 한둘이 아닌가 보다. 나는 헤드기어를 쓰고 일일베스트에 접속해 오늘 있었던 썰을 풀었다.
제목 : 야 나 집에 있기 역겨워서 걍 나왔다.
아이디 : 네다보
내용 : 진짜 이 나라는 답이 없다. 최저 시급 받고 야근하며 사는 게 축복인 줄 알아. 진짜 헬조선 세대는 극혐이다. 아오 개빡. 사촌 형들은 일한다고 명절에 오지도 못해요. 근데 이것도 거짓말일걸? 검사인 형이 하나 있는데 이 형은 분명 해외여행 갔을 거다. 젠장 삥땅 쳐 먹은 게 얼마나 많은지 집이 100평이여. 그렇게 많이 버는 인간이 명절날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는 게 진짜 친척들을 무슨 상 그지로 보는 것도 아니고. 근데 큰 아빠가 또 잘나신 검사 아들 가지고 생색내려고 하길래 "얼마나 다망하시길래 차례도 못 지내러 오나요?"라고 쏴댔더니 큰 아빠 부들부들하더라 크크.
아 진짜 내년 총선에는 뭔가 기적이 일어났음 좋겠다. 벌써 10년이 넘게 더누리가 다 해먹는데 뭐 사회가 개선할 여지가 전혀 없다. 머저리 같은 야당 놈들은 맨날 지들끼리 누가 빨갱이냐고 싸워대는데 아주 신물 난다. 야 북한이 중국에 흡수된 게 벌써 몇 년인데 아직도 빨갱이 소리가 나오냐... 아유. 진짜 이 나라는 노답이다. 노답.
댓글
애국진보 : 야 다망이 뭐냐?
2042년 10월 7일 15:42에 작성된 글입니다.
※ <주토피아>를 보면서 차별받던 존재가 차별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꼰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모습이 과연 어떨까 싶어 재미삼아 적어봤습니다. 저리 되면 안 될텐데 말이죠;;
※ 서른이 채 안 됐을때 고등학교 동창이 제가 페이스북 댓글로 '긔긔체'를 쓰는 것을 보고 나잇값을 못한다며 저를 나무란 적이 있었습니다. '내 친구도 꼰대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직 나이 운운 했다간 커뮤니티 형님들께 드롭킥을 맞을 것 같은 나이지만, 저도 늙어갈수록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될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말이죠. 그 사실이 서글프네요. 누군가 저에게 청춘이 언제 끝났냐고 묻는다면 '꼰대를 걱정하던 때'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 이 글도 SF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Written by 충달
http://headbomb.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