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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17 00:51:14
Name 자이체프
Subject [일반] 조선시대 인권이야기 - 3
조선시대 인권이야기 세번째 입니다. 지난번의 참혹한 사건을 뒤로 하고 훈훈한 얘기를 가져왔습니다. 잡지 편집자가 내년에도 이렇게 훈훈한 얘기를 부탁한다고 하는걸 보니 계속 청탁이 올 모양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은 19세기 후반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적인 관점에서 본 것으로 조선 시대에도 고아원이라고 부를 만한 시설이 존재했다. 1435년 6월 22일, 예조에서는 세종대왕에게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길을 잃은 아이들을 기르기 위한 고아원의 설립을 건의했다. 한양의 인구가 십만을 넘어서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길 잃은 아이들은 제생원에서 거둬들였는데 처음에는 노비들에게 나눠서 기르게 했다. 하지만 빈곤한 노비들은 자기 자식들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노비들에게 나눠서 양육시키는 대신 한군데에 모아서 돌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예조의 건의를 즉시 받아들였다.

고아원은 제생원 옆에 세워졌다. 세 칸짜리 집을 짓고 한 칸은 온돌을 깔고, 다른 한 칸은 난방 시설을 하지 않고, 나머지 한 칸은 부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제생원의 남녀 노비 한명씩을 소속시켜서 아이들을 돌보게 하고, 옷과 이불을 비롯해서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도록 했다. 아울러 일반 백성들이나 천민들 중에서 돕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참여시키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고아원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 제생원의 관리가 항상 살펴보도록 했다. 단순히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서 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돌볼 수 있는지 고민하고 걱정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 시대에 벌써 고아원이 세워지고, 세세한 운영 절차와 감찰방안까지 정해진 것은 세종대왕을 비롯한 관리들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나라가 돌봐야 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인식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단순히 길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넘어서서 춥고 굶주리지 않도록 신경을 썼으며, 그것을 위해 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이 흥미롭다. 세종대왕은 두 달 후인 8월 28일 길에 아이를 버린 부모를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린데 이어서 길 잃은 아이를 제생원에 데려오면 포상금을 주도록 하는 후속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벽제역 근처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즉시 사람을 보내서 옷을 주고 제생원 옆의 고아원에 보내도록 지시했다. 고아를 입양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감면하는 특혜를 베풀기도 했다. 세종대왕 때 세워진 고아원이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불쌍한 아이들을 국가에서 돌본다는 전통은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1783년, 정조는 부모를 잃은 아이를 구호하기 위해 자율전칙이라는 법을 만들어서 공포했다. 4살 이상의 아이들은 진율청에서 돌보고, 4살 이하의 아이들은 양부모를 정해주고 이들에게 곡식을 지급했다. 일반백성들이 입양을 원하면 진율청에서 심사를 통해 결정하도록 했다. 정조는 이런 내용을 한문과 한글로 적어서 한양을 비롯한 전국에 방을 붙여서 백성들이 보도록 했다. 조정에서 관심을 기울인 것은 고아뿐만이 아니었다. 1405년 태종 때 이미 과부와 홀아비를 비롯해서 가족에게 의지할 수 없는 이들을 제생원에서 모아서 돌보도록 지시했다. 이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고아원뿐만 아니라 노인요양원과 여성쉼터 까지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고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이렇게 고아들의 양육은 물론 입양까지 책임지고 관리했다.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과부와 홀아비들의 생계까지 책임졌다는 점은 오늘날 진행 중인 복지 논쟁에 흥미로운 이정표를 제공하고 있다. 개인과 국가 모두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실패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국가의 실패는 어느 정도 복구가 가능하지만 개인의 실패는 때로는 목숨을 위협할 만큼 큰 충격을 주기도 한다. 넘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서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것이 바로 국가의 진정한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음번 쓸 주제를 고민중입니다. 하나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운영했던 환자 치료용 사우나에 대한 얘기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서 솔로들을 책임지고 결혼시켜줬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게 흥미로우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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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BBbr
12/12/17 03:59
수정 아이콘
역시 세종대왕이군요 '-') 그 사이, 특히 양란 이후에 어땠는지가 궁금한데 아쉽네요...
그리고... 후자요!
자이체프
12/12/17 11:11
수정 아이콘
조선전기때를 보면 세종대왕때 영토문제부터 공법 시행까지 시스템이 완성되었거나 정착되어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역시 두번째가 인기가 좋군요.
12/12/17 04:10
수정 아이콘
....솔로들을 책임지고 결혼!?;;;; 구,,국내도입이 시급하지 말임다?;;
자이체프
12/12/17 11:12
수정 아이콘
저도 개인적으로 계승을 주장합니다.
12/12/17 08:2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두가지 주제 모두 궁금하긴 한데 아무래도 후자가 인기가 더 많을 것 같군요 크크크크
자이체프
12/12/17 11:12
수정 아이콘
알겠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솔로들을 결혼시켜줬던 것은 이들의 원한이 하늘에 닿으면 나라에 변고가 일어난다는 믿음 때문이었답니다.
뚱뚱한아빠곰
12/12/17 11:57
수정 아이콘
아... 그럼 지금 우리나라가 이런 저런 변고가 있는 것은 국내 솔로들의 원한 때문인건가요???
얼린피카츄
12/12/17 11:17
수정 아이콘
"길 잃은 아이를 제생원에 데려오면 포상금을 주도록 하는 후속조치를 취했다"
세종대왕은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에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리고 전 전자요!
산적왕루피
12/12/17 11:17
수정 아이콘
그럼 노처녀뿐만이 아닌 노총각의 원한도 그만큼 셌다는 의미일까요?
25살 넘게 동정을 가지고 있으면 마법사가 된다는데, 평생을 마법사로 살던 사람들이라 힘이 더욱 크겠군요. 크크크크
자이체프
12/12/17 21:20
수정 아이콘
뚱뚱한아빠곰 님// 개인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다고 믿습니다. 사실 다 한번쯤은 하늘 보고 한숨 푹푹 쉬잖아요.
자이체프
12/12/17 21:21
수정 아이콘
얼린피카츄 님// 백성을 사랑한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자신감일 수 도 있고, 전쟁이다 공사다 괴롭힌 것에 대한 미안함일 수 도 있고요.
자이체프
12/12/17 21:23
수정 아이콘
산적왕루피 님// 노처녀보다는 노총각들의 원한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요?
알킬칼켈콜
12/12/17 21:42
수정 아이콘
처녀귀신이니 총각귀신이 하는 건 그런 믿음의 발로일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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