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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21 04:47:56
Name Abrasax_ :D
Subject [일반] 4년만에 써보는, 고3후기
키비의 고3후기라는 곡이 있습니다.
원곡으로 따지면 8년은 더 된 곡일텐데 Part 1, 2를 즐겨 들었습니다.
고3 생활을 하면서 저도 고3후기를 써봐야겠다고 늘 생각했었지요.


'수능을 보고 나서 써야지', '대학교 합격하면 써야지' 하다가
정작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매년 수능철이 되면 '이제는 써야지' 했던 것이 4년이 지나버렸네요.
우울하고 늘 잠이 부족하던 고등학교 3학년이 이제는 대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겪었던 고등학교 생활 전반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사실은 고3후기를 빙자한 '제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는 책과 음악에 깊게 빠져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읽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진중권과 김규항, 홍세화, 박노자 등 좌파 지식인들의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시를 쓰시던 아버지 덕분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집에는 늘 한겨레 신문과 작은 책, 삶이 보이는 창 등이 있었는데요.
아마 그때부터 왼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담이지만 책과 신문을 많이 읽은 덕분인지 언어영역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음악의 경우는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힙합을 기반으로 참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방의 사립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저희 학교에는 장학반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반은 '평반'이라고 불렀습니다.
입시학원이라는 것에는 다녀본 적이 없었고, 부모님은 공부에 있어서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저는 1학년 입학과 함께 평반에 배정됩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저는 반(半)문제아인데다가, 반항적이었고 부적응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가 봐도 신기할 정도로 고등학교의 저는 정말 조용한 학생이었습니다.
남고이고, 교사의 90%가 중년 이상의 남자였으니 학교에는 종일 욕설과 매 맞는 소리가 가득했지만 제가 맞을 일은 없었습니다.
무슨 계기로 그랬는지 공부도 열심히 해서 수학을 제외하면 줄곧 '(평)반에서는' 상위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저는 문과 장학반으로 배정됩니다. 저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머릿속은 그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동자인 아버지가 집에 거의 돈을 벌어다주지 않은 것이 지속되고 있었고 어머니가 한문학원을 운영하면서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원 사정은 점점 좋지 않아졌고 여러 이유로 집에 빚이 늘어갔습니다. 어느샌가 필요한 책이 있어도 말하기가 힘들어서 겨우 말하고, 1-2주 정도 '선생님이 검사하는' 책인지 기다렸다가 사는 일이 늘어갔습니다. 중고 사이트를 뒤져보기도 하고요. 과외나 학원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때 참 어렸나봅니다. 교내 백일장대회가 많이 열렸는데, 참가하는 학생이 없어서인지 수상은 늘 제 차지였습니다.
상품으로 받은 문화상품권으로 참고서를 사기보다는 음악 CD를 샀습니다. 당시에는 불법다운로드 해서 받은 수많은 음원들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랬는데, 가끔 집에 가서 CD들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그때부터 끝까지 저를 괴롭혔던 것 하나가 수학이었습니다.
저는 수학을 정말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2 장학반 담임이 수학 선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첫 시간에 처음으로 한 말이 "너네 어디까지 해왔냐?" 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개념이 없던 저는 수1에 어떤 단원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절반 정도 해왔다는 아이들의 말에 담임은 한숨만 내쉬더군요.
저는 지수와 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1년간 제가 겪었을 고통은 짐작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공부를 나름 해서 장학반에서도 어느 정도 성적은 나왔습니다. 그러나 수학은 여전히 바닥이었습니다.
담임과의 크고 작은 마찰이 생겼고(라고 거창하게 썼지만 수학만 성적이 너무 안 나오니까 갈굼을 당했습니다.)
저는 두피가 굉장히 안 좋아지면서 탈모까지 생겼습니다. 집안사정은 갈수록 안 좋아져서 우울증 증세까지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교사들이 일상적으로 행사하는 욕설과 폭력 때문에 점점 적응하기가 힘들더군요.
자퇴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못했습니다만.
책과 음악에 많이 의지를 해서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어영역 참고서나 문제지의 지문들을 읽는 것도 참 즐거웠습니다.
물론 지금은 읽으라고 해도 안 읽습니다.


어쨌든 시간은 지나는 법이지요. 고2를 지나 고3이 되었습니다.
저는 사회학과나 심리학과에 가고 싶었습니다.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했고, 결국 '우리집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머니가 원하는 교육대학교에 진학하기로 목표를 잡았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면 빨리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2003년부터 해왔던 Pgr도 끊고, 스타리그도 안 보고, 스타도 지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는 안 했지만 그래도 성실하게는 했던 것 같네요.
자퇴를 못했듯이 하지 못했을 것 같지만 저는 입시에 실패하면 자살할 생각이었습니다. 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죽는지 묻지만 저는 오히려 왜 사는지 묻고 싶은 학생이었습니다. 꿈이라는 것이 없어졌고 매일을 살기보다는 견뎠습니다.
중2병에 계속 걸려있었나봐요.


그렇게 수능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지역의 교육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별로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운이 좋았습니다.
기쁘기는 했는데, 이내 담담해지더군요. 졸업식 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놀랄 정도로 모든 것이 담담했습니다.
4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왠지 그때의 '아무런 느낌도 없는' 느낌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길게는 썼지만 고등학교 때를 생각하면 수업을 들으면서 창 밖을 내다봤던 것이 기억납니다.
답답한 교실에 앉아 밖을 쳐다보는 것이 왠지 모르게 서글펐습니다.


고등학교 내내 대학교에 합격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돈을 벌어야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입학하고 1달만에 알게 되었습니다.


재미없고 짜증나게 길기만 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은 고3후기인데 이상하게 고3 부분이 제일 적네요.
다음에는 교대생으로서의 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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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1 06:11
수정 아이콘
누구나 살면서 정도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자신만의 고민을 짊어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글 읽으면서 저와 비슷한 면이 많이 보여서 반갑기도 하면서 씁쓸하기도 했네요.

저도 글 읽는 것을 참 좋아해서 고등학생 때 공부보다는 책 읽었던 기억이 더 납니다.

저도 지금 교대에 다니고 있구요.(4학년인데 임고는 망한 것 같습니다.-_-)

수능을 보고 pgr질게에 교대진학에 대한 글을 썼던 기억이 나네요. 벌써 4년이란 시간이 덜덜...

신기한 건 저도 교대를 다닌 4년 동안 '아무런 느낌도 없는 느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적성에 크게 맞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제 경우엔...

실습을 나가서 학생들을 보면 참 사랑스럽고 귀여운데, 또 직업으로서의 교사는 생각할 면이 많은 직업인 지라...

그래서 전 방학때나 심지어 학기중에도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여행을 하면 좀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도피같지만서도

괜히 제 이야기를 했는데 글 잘 읽었고, 말 뿐인 것 같지만 힘내시길 바랍니다.
Abrasax_ :D
12/12/15 02:05
수정 아이콘
늦었지만 읽고 리플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12/11/21 15:3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입시에 실패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다... 입시에 실패하셨더라도 그런 선택은 내리지 않았을거라 믿지만 그래도 슬프네요. 고3 학생들이 입시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대학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을지 궁금하네요. 마지막 내용을 보아하니 초반생활은 쉽지 않았을거라 보지만.
Abrasax_ :D
12/12/15 02:05
수정 아이콘
요새도 다들 그렇겠지요. 당장 앞에 보인 것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리플 감사합니다.
12/11/22 02:07
수정 아이콘
같은 교대생으로써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Abrasax_ :D
12/12/15 02:05
수정 아이콘
벌써 한 달이 되어버렸네요. 과제에 시험에 너무 바빠서 이제서야 쓰려고 합니다.
리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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