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인터넷에 펌글이나 유머 글로 올라오곤 하는 게 '나라별 행복지수 비교'라는 글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동남아의 어디 국가가 행복지수 1위라는 글이고, 변종으로 북유럽 국가들을 칭송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상식을 깨고 잘 사는 나라들이 행복지수도 높다는 글도 있다. 그런 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이나 반박을 표시하기 마련이다.
이런 글에 공감하면서 사람들은 더 나아가 '정신적 가치'에 대한 소홀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며, '정신적 가치'로 고개를 돌리자는 논리를 편다. 이 글도 총체적인 맥락에서는 이런 '행복지수' 비교에 담긴 생각, 방법, 결과들을 살펴보며 공감하는 글이 될 것이다. 물론 반박들도 다양하다. "가난한 나라가 행복하게 사는 걸 과연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물질주의적 접근이 있다. 좀 더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논리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국민을 이데올로기나 종교로 세뇌하는 국가도 가난하고 행복지수만 높으면 괜찮다는 건가?"하는 반 공리주의적 반박이다. 방법론에 회의를 가질 수도 있다. "이렇게 작은 표본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정도의 소극적 반박에서 "행복이란 것을 과연 비교할 수는 있는가?" 라는 전면적인 반박도 있다.
이 글은 행복을 과학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해서 의견을 표시하기 전에 나는 먼저 이러한 비판들에 해명을 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행복"을 "수치"로 다루는 것은 적절한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이전에 이런 의문부터 풀어 볼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글을 쓰는 데 있어서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라는 책에 기반을 둔 내용이 가장 많을 것이다. 특히 이번 (1) 글은 그 책의 좀 긴 요약문+독후감이라고 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또한, 행복에 관해 권위자로 알려진 심리학자 에드 디에너(Ed Diener)나, 서은국 교수님의 논문을 인용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공식적인 리포트인 것이 아니므로 간혹 인용을 빠트리거나 하는 일이 있고, 정확하지 못한 내용도 많을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질문이나 태클을 부탁한다. 특히 철학에는 많이 야매이므로 어쩔 수 없다.. 라는 말로 미리 실드를 치고 들어가겠다.
(1)'행복'을 어떻게 정의하고, 비교할 수 있을까?
*아래의 모든 내용은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의 내용에 기초한다. 정확히는 진중권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하는 법>에 나온 것 중 "책 안 읽고 논문 쓰기"라는 꼭지에 적힌 내용과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기억에 있는 구조대로 쓰고 나중에 헛소리한 게 없는지 검토하는 식이다.
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66146&page=2&menu=5003029&keyword=&sdate=&edate=&reporter=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행복'도 심리학이 다루기 이전에는 철학이 다루는 주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또한 문과 출신에게는 익숙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일 것이다. 그의 철학은 흔히 '목적론'적 철학으로 불린다. 거칠게 요약해서, 세상의 모든 것에는 목적(텔로스, telos)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특히 인간의 목적은 행복(eudemonia)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에우다이모니아(eudemonia)는 지금의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과는 많이 다르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말초적인 감각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덕(Arete)을 실현하면서 얻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잠재능력을 잘 개발해서 온전히 발휘하고, 미적으로 훌륭한 삶을 개발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이나 이와 비슷한 변형들을 윤리적인 행복, 혹은 "객관적인 행복"이라 칭하겠다. 물론 이러한 행복은 다루기가 아주 곤란하다. 우선 이러한 행복을 어떻게 평가할 지가 도덕, 윤리적인 잣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테면 최근에 논란이 된 백선엽 씨를 나 같은 사람들은 "너절한 기회주의자"라고 평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빨갱이들의 침입에서 조국을 수호하"여 "위대한 덕을 이룬" 사람으로 평할 것이다. 다른 문제도 있다. "객관적인 행복"이 뒤에서 말할 "주관적인 행복"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국 독립을 위해 살다가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 사람은 가족이 죽고 본인도 붙잡혀서 고문을 받다가 죽은 사람이다. 이 사람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뒤로하더라도, 이 사람이 "행복했다"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즉, "객관적인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꽤 다른 것이다.
이제 바톤은 심리학으로 넘어왔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다룰 다음 개념이 "주관적인 행복" 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정서적인 행복" 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심리학에서는 정서를 감각 자극과 감정과의 연합이라고 정의한다. 감정적인 행복, 한마디로 우리가 "행복"하면 떠오르는 그것이 바로 "주관적인 행복"이다. 물론, 이런 행복을 다룬다고 했을 때에도, 이런 행복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측정할 것이냐?"에 관해서 여전히 비판이 존재할 수가 있다.
첫째로는 심리적인 비판이다. (1) '타인의 마음 문제'라고도 알려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심상을 알 수 없다. 내가 "검정"에 해당하는 색의 파장이 내 망막에 닿아서 심상에 보이는 그 "검은색"이 당신에게는 사실 "노랑"일지도 모른다. 또는 나는 "나가"들이 "니름"을 주고받는 느낌을 무전이나 텔레파시 비슷한 것으로 상상만 하지 그 정확한 느낌을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나가토 유키에게서 싹트는 '마음'을 상상하지만, 결코 유키가 되어 그 심적 상태를 그대로 느낄 수 없다.(...) 하물며 행복이란 것을 어떻게 크기를 재서 비교할 수 있겠는가?
(2) 다음으로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뒤에서도 나오겠지만, 사람은 같은 정서 경험을 가지고도, 상황에 따라 다른 평가를 하곤 한다. 하물며 두 개의 정서 경험을 비교하는 데는 오류가 더 많다. 사람들은 까먹고, 잘못 기억하고, 지어내고, 합리화하기도 하는 등의 최악의 기록기계다. 분트의 내성법도 이런 이유로 실패하고, 심리학계 패러다임이 왓슨과 스키너의 행동주의로 넘어가지 않았던가?
다음으로는 "객관적 행복"의 입장에서의 비판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객관적으로 빈곤하고 빈약한 상황에서도 종교의 색채가 높은 나라는 행복지수가 높을 수 있다. "방글라데시도 행복지수 1위다!"라고 하면 따라오는 비판도 이런 것이다. "그럼 네가 방글라데시가서 살아." 이처럼 객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행복이 7이라고 답하더라도,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 7이라고 대답한 행복과는 같게 쳐줄 수 없는 게 아닐까? 이런 비판이다.
이 두 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먼저 심리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 반박이다. (1) 행복은 수학처럼 정확하게 재고 다루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행복"이란 정서가 없거나, 대소의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100% 정확하게 잴 수는 없더라도 그것을 재기 위해 심리적, 뇌 의학적 도구를 개발하는 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2) 또한 사람의 정서경험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의 뇌파를 측정해서 그 파형을 보고 "당신은 화가 나 있군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파형이 '분노'를 의미한다는 것은 결국 그 파형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데이터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결국, 사람 마음을 알아내는 시작은 그 사람의 주관에 묻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것이 있다. 바로 통계적인 처리이다. 설령 몇 사람이 합리화를 하고, 누구는 잘못 기억하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보고하는 정서보고는 정규분포에 근사하는 곡선을 그린다. 이를 통해서 모집단에 대해 제법 믿을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객관적인 행복" 접근에 대한 반박이다. 일단은 "이런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야! 수정해주겠어!"라는 말에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을 모른다"고? 반대로 당신은 좀 지저분하더라도 물질에 쫓기지 않고, 어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느낌을 당신은 아는가? 더 부자인 국가가 더 가난한 국가보다 행복해야 한다는 것은 물질주의에 대한 우리의 변명이 아닐까? 물론 여기서도 절실하고 유용한 측면이 있다. 나는 "매트릭스" 적인 행복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인간적인 행복 역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말할 때에는 신중해야 하며, 또한 수치적이고 감정적인 "행복"을 다루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으로 말할 행복이 바로 이 "주관적인 행복"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관적인 행복은 정서적인 행복이다. 즉, 주관적인 감정이 바로 행복이다. 이는 심리적인, 즉, 통계적인 방법을 통해 측정된다. 그 방법은 우리가 흔히 보는 [당신은 ~~할 때 ~~합니까?, 매우 아니다 1 ....]요런 것일 수도 있고, 뇌파로 측정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가지고 읽어낼지도 모른다.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측정되는 "무언가"들은, 제대로 검증된 방법으로 측정되었다면 동일하거나 혹은 연관성이 아주 높은 "무언가"들이다.
이제 이러한 행복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회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등을 뒤에서 다룰 것이다.
*다음화. (2) 우리가 불행한 이유. 로 찾아뵙겠습니다.